원유관복(遠遊冠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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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세자가 신하를 대할 때 입는 의복으로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 일습.

개설

왕과 왕세자가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을 때 입는 옷이다. 원유관과 강사포를 포함하여 규(圭)·상(裳)·대대(大帶)·중단(中單)·패(佩)·수(綬)·폐슬(蔽膝)·말(襪)·석(舃)으로 구성된다. 왕·왕세자·왕세손의 관복(冠服)은 모두 같지만, 왕의 원유관은 9량, 왕세자는 8량, 왕세손은 7량이다. 구성상에서는 면복(冕服)과 같지만 면복과 달리 장문이 없다.

연원 및 변천

원유관복은 정조, 동지, 삭망 등에 신하들로부터 하례를 받을 때 왕과 왕세자가 착용하는 복식이다. 그러나 조선초 원유관복의 제도를 알지 못해 건국 초기에는 관복을 착용하였으나 왕이 원유관을 청한다면 피변을 하사할 것이라고 하여 피변이 원유관복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19년 12월 24일). 그 후 예문관 대제학 홍여방(洪汝方)이 칙서와 함께 원유관복을 가지고 왔다(『세종실록』 20년 10월 4일).

그러나 원유관복의 구성이 제대로 정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26년(세종 8)에는 왕이 망궐례를 행하고 근정전에서 조하를 받을 때 강사포에도 방심곡령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묻자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이 역대 제왕들의 화상을 보아도 모두 방심곡령이 있었다고 하여 이때부터 강사포에 방심곡령을 가하게 되었다(『세종실록』 8년 1월 1일). 그러나 1532년(중종 27) 방심곡령은 면복을 입을 때라도 제사를 올릴 때에만 착용하는 것이라고 하여 망묘례가 제례와 같지 않다 하더라도 역시 신명과 접촉하는 것이니 방심곡령을 착용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중종실록』 27년 10월 10일) 강사포에 방심곡령을 가한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왕세자의 원유관복은 7량 원유관과 강사포를 갖추면 옛 제도에도 부합하고 현실에도 마땅하여 사리와 체면에도 맞는다고 하여 예조에 명하여 참작해서 아뢰라고 하였으며(『성종실록』 24년 3월 14일), 1500년(연산군 6)에도 왕세자의 삭망 조하 시 7량 원유관을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하자 옛 제도를 참작하여 시행하라고 했다(『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그러나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에는 관은 모라로 싸고 양쪽에 주색의 끈이 달려 있는 것은 왕의 관과 같으나 다만 관의 량이 8개이며 매 량마다 전후 각 8옥이 3가지 색으로 되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왕세자의 8량관은 영조 때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왕의 원유관복은 규, 관, 의, 상, 대대, 중단, 패, 수, 폐슬, 말, 석으로 구성된다. 왕세자의 원유관복도 왕의 구성과 같다.

규는 청옥으로 만들며, 면복의 규와 같다고 하였으므로 청옥으로 만든 규를 사용했다. 그러나 기해년인 1659년(현종 14)에는 백규를 사용하였다고 하면서 전에 사용했던 백규가 훼손되지 않았으니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백옥규를 사용했다(『현종실록』 14년 9월 9일). 실제로 『상방정례(尙方定例)』의 대전 법복인 면복 안에 백옥규가 수록되어 있으며,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고종의 어진에서도 백옥규를 들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국조오례의서례』를 보면, 원유관은 현색 나(羅)로 만들며 9량이 있어 매량에 18옥을 꿴다. 옥은 황·창·백·주·흑의 순서로 꿰고 금잠을 꽂고 붉은색 끈 2줄을 양쪽 턱 밑에서 맺고 그 나머지는 늘어뜨린다. 왕세자의 원유관은 8량이며 매량마다 3채색의 옥을 꿰고 왕세손은 7량에 3채색의 7옥을 꿴다. 원유관복에 해당하는 것은 강사포이다. 강라(絳羅)로 만들면 형태는 면복과 같다.

상은 강라로 만든다. 앞을 3폭, 뒤를 4폭으로 하고 폭마다 양옆을 1촌씩 꿰매는데 그 폭이 줄어드는 것을 가리켜 삭폭(削幅)이라고 한다. 허리에는 많은 주름을 잡는데, 상의 가장자리에 있는 선을 벽(綼)이라고 하고, 아래에 있는 선을 석(緆)이라고 하며, 벽과 석의 넓이는 각각 반씩 하여 안과 겉을 합해 3촌이 되게 한다. 이것은 면복과 같으나 장문이 없다.

대대는 의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규를 꽂을 때 사용하는데 비색(緋色)과 백색을 합하여 꿰맨다. 대대의 아래로 늘어뜨려진 끈은 신(紳)이라 한다. 그 옆에 늘어뜨린 소대(素帶)는 심청색 실로 땋은 띠를 사용하다가 1731년(숙종 39) 심청색 광다회로 수정했다(『영조실록』 19년 4월 14일). 중단은 백라(白羅)로 만들며 깃과 소맷부리에 선을 두르고 깃에는 불문(黻紋) 11개를 그리는데 왼쪽 깃에 5개, 오른쪽 깃에 5개, 목뒤에 1개이다. 왕세자의 중단에는 불문이 9개이다. 패옥은 면복의 패옥과 같다.

수는 면복의 수와 같으므로 홍화금으로 만들고 쌍금환을 베푼다. 그러나 1743년(영조 19)에는 문단의 사용을 금했으며, 대신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적(赤)·청(靑)·현(玄)·표(縹)·녹(錄)의 비단으로 짜서 만들되 무늬는 넣지 않았다. 하단에는 망(網)을 늘어뜨렸다.

폐슬은 강라로 만들며 위에는 비(紕), 아래에는 준(純)이라고 하는 선을 둘렀다. 면복의 폐슬과 같으나 장문이 없다. 고종 어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폐슬은 가장자리에 오색다회(五色多繪)를 두르고 있다. 『상방정례』에도 그 물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의원에서 새롭게 제조한 것으로 보인다.

말과 석은 비단으로 만든다. 『국조오례의서례』에 왕과 왕세자의 원유관복도에 관한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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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하례를 받을 때, 왕비와 왕세자빈을 책봉할 때, 교서(敎書)를 반강(頒降)할 때, 향을 전달할 때에 원유관복을 입었다. 종묘·사직 등 친제를 지내기 위해 왕이 궁궐을 드나들 때도 원유관복을 입었으며, 1745년(영조 21)에는 희생을 살필 때에도 입었다.

참고문헌

  •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
  • 『상방정례(尙方定例)』
  • 이민주,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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