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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총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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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 세조 시대 활동'''== | =='''단종 · 세조 시대 활동'''== | ||
− | 1452년(단종 즉위) 7월에 다시 우승지가 되었고 이 해 12월에 좌승지가 되었다가 1453년(단종 1) 6월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 해 10월에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계유정란(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김종서( | + | 1452년(단종 즉위) 7월에 다시 우승지가 되었고 이 해 12월에 좌승지가 되었다가 1453년(단종 1) 6월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 해 10월에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계유정란(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란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이때 세종대왕과 영빈 강씨(令嬪姜氏)의 아들이자 박중손의 사위인 화의군(和義君)[[이영(李瓔)]]이 수양대군을 반대하다 귀양가게 되어 한때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
1454년(단종 2) 2월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고, 6월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1455년(단종 3) 2월에 공조 [[판서(判書)]]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윤6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이 해 5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6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57년(세조 3) 1월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고, 7월에 죄참찬(左參贊)이 되었다. 그는 세 번이나 과시(科試)를 고선(考選)하였는데, 그가 뽑은 사람 중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많았다. | 1454년(단종 2) 2월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고, 6월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1455년(단종 3) 2월에 공조 [[판서(判書)]]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윤6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이 해 5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6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57년(세조 3) 1월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고, 7월에 죄참찬(左參贊)이 되었다. 그는 세 번이나 과시(科試)를 고선(考選)하였는데, 그가 뽑은 사람 중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많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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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비문'''== | =='''묘소와 비문'''== | ||
− |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묘소는 교하현(交河縣) 북쪽 탄포(炭浦)의 오고미리(烏告美里)에 있다. 김수녕( | + |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묘소는 교하현(交河縣) 북쪽 탄포(炭浦)의 오고미리(烏告美里)에 있다. 김수녕(金壽寧)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부인은 남평문씨(南平文氏)공조 정랑문승조(文承祚)의 딸인데,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박전(朴栴)이고, 2자는 한성부서윤[[박미(朴楣)]]이며, 3자는 승정원 우승지[[박건(朴楗)]]이다. 1녀는 화의군이영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유오(柳塢)의 처가 되어다.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4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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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중손 |
한글표제 | 박중손 |
한자표제 | 朴仲孫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경윤(慶胤) |
호 | 묵재(黙齋) |
봉작 | 응천군(凝川君), 밀산군(密山君) |
시호 | 공효(恭孝)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성 |
출생 | 1412년(태종 12) |
사망 | 1466년(세조 12) 5월 26일 |
본관 | 밀양(密陽)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교하현(交河縣) 탄포(炭浦) 오고미리(烏告美里) |
증조부 | 박침(朴忱) |
조부 | 박강생(朴剛生) |
부 | 박절문(朴切問) |
모_외조 | 개성왕씨(開城王氏): 왕격(王鬲)의 딸 |
처_장인 |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승조(文承祚)의 딸 →(자녀)3남 2녀 |
자녀 | (1자)박전(朴栴) (2자)박미(朴楣) (3자)박건(朴楗) (1녀)화의군부인(和義君夫人): 이영(李瓔)의 처 (2녀)유오(柳塢)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중손(朴仲孫) |
총론
[1412년(태종 12)~1466년(세조 12) = 55세].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의정부(議政府) 죄참찬(左參贊)이다. 자는 경윤(慶胤)이고, 호는 묵재(黙齋)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교서관(校書館)정자(正字)박절문(朴切問)이고,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왕격(王鬲)의 딸이다. 증조부는 호조 전서(典書)박침(朴忱)이고 조부는 안변부사(安邊府使)박강생(朴剛生)이다.
세종 · 문종 시대 활동
1426년(세종 8)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다시 1435년(세종 17)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박사(博士)가 되었다. 이어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는데, 춘추관(春秋館)을 겸직하였다. 또 서운관(書雲觀) 판관(判官)을 맡았으며 여러 자리를 옮긴 다음 이조 정랑(正郞)이 되고 지제교(知製敎)를 맡았다. 통례문(通禮門) 첨지사(僉知事)로 있으면서 동첨사(同詹事)를 겸임하였다. 1444년(세종 26) 7월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고, 그 뒤에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으며, 1449년(세종 31) 1월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병조 지사(知事)를 겸하였다. 1451년(문종 1)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그 뒤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우승지,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단종 · 세조 시대 활동
1452년(단종 즉위) 7월에 다시 우승지가 되었고 이 해 12월에 좌승지가 되었다가 1453년(단종 1) 6월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 해 10월에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계유정란(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란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이때 세종대왕과 영빈 강씨(令嬪姜氏)의 아들이자 박중손의 사위인 화의군(和義君)이영(李瓔)이 수양대군을 반대하다 귀양가게 되어 한때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1454년(단종 2) 2월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고, 6월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1455년(단종 3) 2월에 공조 판서(判書)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윤6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이 해 5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6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57년(세조 3) 1월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고, 7월에 죄참찬(左參贊)이 되었다. 그는 세 번이나 과시(科試)를 고선(考選)하였는데, 그가 뽑은 사람 중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많았다.
1459년(세조 5) 7월에 다시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다. 이때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상기(喪期)를 마치자 1461년(세조 7) 11월에 다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지고, 위계(位階)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올랐다. 1466년(세조 12) 5월 26일 정침(正寢)에서 향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지, 조정에서 공효(恭孝)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성품과 일화
박중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온아(溫雅)하고 용의(容儀)는 단정(端正)하며,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다른 사람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는 겸손하고 공손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일찍이 상주(喪主)가 되어 여막(廬幕)에 있을 때에, 글을 지어 고금(古今)의 사치와 검소의 득실을 논하여 아들들을 경계하였으며, 또 계주명(戒酒銘)을 지어서 자신(自身)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묘소는 교하현(交河縣) 북쪽 탄포(炭浦)의 오고미리(烏告美里)에 있다. 김수녕(金壽寧)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부인은 남평문씨(南平文氏)공조 정랑문승조(文承祚)의 딸인데,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박전(朴栴)이고, 2자는 한성부서윤박미(朴楣)이며, 3자는 승정원 우승지박건(朴楗)이다. 1녀는 화의군이영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유오(柳塢)의 처가 되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