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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9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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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황징 |
한글표제 | 황징 |
한자표제 | 黃徵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숙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응삼(應三) |
호 | 대치(大痴), 반계(蟠溪)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35년(인조 13) 10월 25일 |
사망 | 1713년(숙종 39) 3월 30일 |
본관 | 상주(尙州) |
주거지 | 충청도 청원군(淸原郡) 문의(文義) 덕일촌(德一村) |
묘소소재지 | 충청도 청원군(淸原郡) 문의(文義) |
증조부 | 황세은(黃世慇) |
조부 | 황우상(黃佑商) |
부 | 황이환(黃以煥) |
모_외조 | 순흥 안씨(順興安氏): 안세헌(安世憲)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배천 조씨(白川趙氏): 조기(趙錡)의 딸 →(자녀)3남 (둘째부인)전주 이씨(全州李氏): 이양진(李陽進)의 딸 →(자녀)무후 |
자녀 | (1자)황윤희(黃允熙) (2자)황윤후(黃允垕) (3자)황윤섭(黃允燮)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황징(黃徵)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숙종 8년 10월 21일, 『숙종실록』 숙종 15년 3월 3일 |
총론
[1635년(인조 13) ~ 1713년(숙종 39) = 79세.]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무신. 어영대장(御營大將) · 포도대장(捕盜大將)을 지냈다. 자는 응삼(應三), 호는 대치(大痴) · 반계(磻溪)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청원(淸原) 문의(文義)다. 아버지는 중추원(中樞院)동지사(同知事)황이환(黃以煥)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판관(判官)안세헌(安世憲)의 딸이다. 상산군(商山君)황효원(黃孝源)의 6세손이고, 대사헌(大司憲)황우한(黃佑漢)의 형인 현감(縣監)황우상(黃佑商)의 손자이다.
현종 시대 활동
1662년(현종 3)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부황 정거(付黃停擧)’를 당하였다. ‘부황(付黃)’이란 유생의 잘못을 황색 종이에 적어서 유적(儒籍)에 붙이는 것을 말하고, ‘정거(停擧)’는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일찍이 고향 문의(文義)의 향시(鄕試)에서, 입산(入山)한 적이 있는 친구를 시험장에 못 들어가게 하는 응시생[擧子] 변 아무개[卞某] · 채 아무개[蔡某] 두 사람과 옥신각신 다툰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알려져서, 황징은 불교도를 비호하였다고 ‘부황 정거’를 당하였다. 이리하여 10여 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다가,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의하여 과거의 문과(文科)를 포기하고, 무과(武科)를 선택하였다. 1669년(현종 10)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5세였다. 병조 판서민유중(閔維重)의 추천으로 훈련원(訓練院)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1671년(현종 12) 나라에 큰 기근(饑饉)이 들자, 비변사(備邊司) 당상(堂上) 민정중(閔鼎重)이 황징을 진휼청(賑恤廳) 낭관(郎官)에 임명하였는데, 그때 기민(饑民)을 빠짐없이 잘 구제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1672년(현종 13) 무과 출신으로서 호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호조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곧 훈련원(訓練院) 정(正)으로 옮겨서 사복시(司僕寺)내승(內乘)을 겸임하였다. 왕명을 받들고 지방에서 대궐에 바치는 말들을 점검하는 일을 맡아서, 한꺼번에 말들을 훑어보고 임금이 탈 만한 명마(名馬)를 골라내니, 감목관(監牧官)들이 “관인(官人)은 귀신처럼 밝다.”고 감탄하였다. 그때 전라도 해남(海南) 지방에 연달아 흉년이 들자, 조정에서 특별히 그를 선발하여 해남 현령(海南縣令)에 임명하였다. 그는 전라도 감영(監營)에서 대출을 받아서 기민(饑民)을 구제하였고, 창고의 부족한 부분[逋欠]을 보충하여, 2년 만에 해남 지방의 경제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 1) 풍천 부사(豊川府使)로 승진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훈련도감(訓練都監) 도제조(都提調)유혁연(柳赫然)의 막료(幕僚)로 발탁되었다. 1676년(숙종 2)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어, 내금위 장(內禁衛將)을 겸임하였다.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충주 영장(忠州營將)이 되었다. 1679년(숙종 5) 경기도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옮겼다가, 1680년(숙종 6)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그때 숙종은 황징의 학문이 깊은 줄 알고 강경(講經)할 적에 황징에게 경서(經書)의 뜻을 해석하게 하고 칭찬하기를, “이 사람은 마땅히 경연(經筵)에 두어야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해 3월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가 되었으나, 4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남인(南人)이 몰락하고,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공조 판서유혁연이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으므로, 황징도 수사(水使)에서 쫓겨나서, 고향 문의 덕일촌(德一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1682년(숙종 8) 7월 남인 유생 <허새(許璽)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황징과 윤천뢰(尹天賚)가 허새와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고 함경도 경흥(慶興)의 서수라(西水羅)에 유배되었다. 아버지가 연세가 높았으므로, 유배지에서 항상 남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시(詩)를 지어 아버지에게 부쳤는데, 그 시에, “부자의 은의(恩義)는 깊으나 집은 만리 밖에 있고[父子恩深家萬里], 군신(君臣)의 의리는 격조(隔阻)하나 한 밤중에 꿈만 꾸네[君臣義隔夢三更].”라고 하였다. 북변(北邊)에 유배된 지 4년 만에 경상도 하동(河東)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하동으로 가던 도중에 1686년(숙종 12) 7월 아버지가 돌아갔으므로, 고향집에 들려서 아버지의 영구(靈柩) 앞에서 통곡하였다. 하동으로 옮겨서 귀양살이한 지 3년 만에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서, 곧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道使)가 되었다. 이어 금군(禁軍)별장(別將)으로 발탁되었고, 포도대장(捕盜大將)으로 승진되었다.
1690년(숙종 16) 영의정권대운(權大運)의 천거에 의하여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임명되어 훈련원(訓練院) 도정(都正)을 겸임하였다. 1691년(숙종 17) 훈련원 지사(知事)가 되었다가,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임명되어, 비변사 당상을 겸임하였다.[『어영청등록(御營廳謄錄)』] 그때 각 군영(軍營)의 전곡(錢穀)을 조정의 대신들이 빌려가서 오래도록 갚지 않으므로, 비변사 당상황징이 법으로 이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자, 조정 대신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였다. 1692년(숙종 18) 황징은 대신들의 견제를 받아서 어영대장과 비변사 당상을 사임하였다. 1693년(숙종 19) 평안도 병사(平安道兵使)가 되었다가, 함경도 북병사(咸鏡道北兵使)에 임명되었으나, 기침과 천식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였다. 1694년(숙종 20) 2월 다시 어영대장에 임명되어, 훈련원 도정을 겸임하였다.[『어영청등록』] 공조 참판이 되었다가 판서의 자리에 의망(擬望)되었는데, 황징이 고사(固辭)하기를, “내가 본래 유신(儒臣)의 집안 사람으로서 불행하게 무관(武官)의 최고 자리에 등단(登壇)되었으므로, 그것으로도 족한데, 다시 무슨 높은 관직을 바라겠는가?”고 하였다.[『담인집(澹人集)』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刑曹參判磻溪黃公行狀)」]
1694년 4월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남인이 몰락하고 소론(少論)이 집권하자, 황징은 전라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1695년(숙종 21) 6월 가뭄이 들자 억울한 죄수를 석방하였는데, 황징은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신여철(申汝哲)의 도움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거처를 충청도 문의의 옛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고향집으로 돌아온 황징은 20여 년 동안 문의에 살면서 한번도 서울로 발걸음하지 않았고, 녹봉(祿俸)을 받지 않고 사양하기를, “내가 지금 벼슬하려고도 않는데, 공연히 국가의 녹(祿)을 앉아서 타먹을 수 있겠는가? 의리상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문의의 덕일촌 고향집 남쪽에 계천(溪川)이 흐르는데, 시냇가 위로 우거진 소나무들의 용틀임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 호를 ‘반계(蟠溪)’라고 부르고, 촌로(村老)들과 어울려 매일 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캐고 물가에 나가서 낚시를 하면서, 우거진 소나무 사이를 소요(逍遙)하고 시를 음영(吟詠)하였다.[『담인집』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 그러다가 1713년(숙종 39) 3월 30일 덕일촌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니, 향년이 79세였다.
당파 싸움에서 청의(淸議)를 주장한 ‘기사완인(己巳完人)’ 황징
1669년(현종 10) 나이가 35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처음 벼슬할 때 그를 천거한 사람은 여주(驪州) 출신 민유중 · 민정중 형제였다. 병조 판서민유중의 추천으로 훈련원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1671년(현종 12) 비변사 당상민정중의 추천으로 진휼청 낭관에 임명되었다. 민정중 · 민유중은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제자이고, 민유중은 바로 숙종의 둘째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민정중 · 민유중 형제는 이웃 고을 출신 황징이 동인(東人) 계통의 유생들에 의해 ‘부황 정거’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그 스승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에게 부탁하니, 송준길이 성균관에 청하여 황징의 정거(停擧)를 풀어 주었다. 그러므로 황징은 처음부터 서인에게 나쁜 감정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1604년 <기사환국> 이후에 남인이 집권했을 때에도 홀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서인의 우두머리 송시열과 대립하였던 남인의 거두 권대운은 바로 황징의 당숙(堂叔)이었다.[『담인집』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 황징은 남인 유혁연 · 권대운의 천거로 무관의 높은 관직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당파 싸움에서 무력을 동원하는 힘을 가진 대장(大將) 같은 무관의 관직이 판서와 같은 문관의 대신 자리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1679년(숙종 5) 숙종이 의정부(議政府) 대신들에게 수령관에 적합한 인물을 추천하게 하였는데, 유혁연은 황징을 천거하여, 모두 11명의 젊은 인재가 추천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5년 11월 9일] 유혁연은 어영대장과 포도대장을 역임한 당대의 명장으로서 그의 뒤를 이을 장수로 황징을 추천하였다. 황징은 그의 막료가 되어서 유혁연을 존경하고 따랐는데, 유혁연은 남인의 무장이었으므로, 황징도 서인의 공격을 아울러 받게 되었다.
남인은 1674년(현종 15) 8월 현종이 돌아가자, 예론(禮論) 논쟁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았으나, 5년 뒤 1680년(숙종 6) 8월 이른바 <유악(油幄) 사건>이 발생하여, 실각하였다. 영의정허적(許積)이, 조부 허잠(許潛)의 시호를 받는 날, 비가 오자 잔치를 위하여 대궐의 유악을 임금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적으로 사용하였다. 유악은 기름칠을 한 장막으로 궁중의 유악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쓸 수 있었다. 숙종은 신하가 왕을 무시하였다고 격분하여 포도대장유혁연을 해임한 다음에, 남인들을 요직에서 축출하고 서인을 등용했다.
이때 오시수(吳始壽)는 허적에게 아부하였다고 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현종이 승하하였을 때, 청나라에서 조문사(弔問使)를 보내왔는데, 원접사(遠接使)우의정오시수는 청나라 사신들과 대화하는 중에 “현종 때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하였다”는 이른바 ‘왕약신강(王弱臣强)’의 말을 듣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강한 신하는 바로 서인의 송시열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서인들은 이 사건을 이때 다시 거론해 오시수를 맹렬히 공격하여 숙종이 오시수에게 사약을 내리게 만들었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당파싸움을 이용하여, 수시로 정변을 일으켜 서인과 남인의 대신들을 숙청하였으므로, 조선 시대 숙종 때 당파 싸움이 가장 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경신대출척> 때 남인의 영수 허적과 소론의 영수 윤휴(尹鑴)는 죽음을 당하고, 남인 민암(閔黯) · 권대운 · 김덕원(金德遠) 등은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영의정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정원로(鄭元老)가 고변(告變)하기를, “영의정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 복창군(福昌君) · 복선군(福善君) · 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꾀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1682년(숙종 8) 이회(李*)등이 남인 유생 허새(許璽)가 복평군을 추대하려는 역적 모의를 한 증거가 있다고 고변하면서, “황징은 우선 양주(楊州) 지방에 머물고 있다가, 거사가 성공한 뒤에 서울로 들어와서 조정의 훈련대장을 맡아서 치안을 담당한다.”라고 하였다.(『숙종실록』 숙종 8년 10월 21일) 황징은 서울로 잡혀와서 혹독한 국문(鞫問)을 당하고 함경도 경흥의 서수라에 유배되었다가, 경상도 하동(河東)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이 옥사들은 정원로 · 이회 등이 서인에게 아부하고자 조작한 것으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후 무고임이 밝혀졌다.
숙종의 첫째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김씨(金氏)는 20세의 나이로 1680년(숙종 6) 승하하였는데, 인경왕후는 서인(西人) 김만기(金萬基)의 딸이고, 김만중(金萬重)의 조카였다. 1681년(숙종 7) 서인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숙종은 둘째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민씨(閔氏)를 맞아들였는데, 서인 민유중(閔維重)의 딸이었다. 그러나 계비(繼妃) 민씨(閔氏)가 왕비가 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왕자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후궁인 장숙원(張淑媛)을 총애하여, 훗날 경종이 되는 왕자 이균(李畇)을 낳게 되었다.
숙종은 왕자 이균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하자, 서인은 인현왕후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원자로 책봉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이균의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때 남인들이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으므로, 숙종은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이균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숙원을 장희빈(張禧嬪)으로 승격하였다. 이것이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이다. 서인의 영수 우암(尤庵)송시열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대노하여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押送)하는 도중에 사약(賜藥)을 내렸다. 숙종은 현종 때 ‘강신(强臣)’ 송시열을 죽임으로써 그의 시대에는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고 싶었던 면도 있었다. 서인 김수흥(金壽興) · 김수항(金壽恒) 등은 유배되고, 남인 민암 · 권대운 · 목래선(睦來善) 등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廢黜)하고, 그 대신 장희빈을 왕비로 삼았다.
1689년(숙종 15) 3월 병조 판서민암이 황징을 석방하도록 상소하자, 숙종이 허락하였다.(『숙종실록』 숙종 15년 3월 3일) 조정에 돌아온 황징은 전라도병마사(全羅道兵馬使) · 함경도병마사(咸鏡道兵馬使) · 황해도병마사(黃海道兵馬使)를 역임하였다. 1690년(숙종 16) 2월 영의정권대운이 숙종에게 아뢰기를, “황해도병마사황징은 대장(大將)의 직임을 감당할 만한데, 지금 형조 참판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황징을 한번 임명해 보면, 그를 시험해 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여, 무관으로서 형조 참판에 특별히 임명되었다.[『숙종실록』숙종 16년 2월 3일] 그 뒤에 황징은 영의정권대운의 천거로 포도대장 · 어영대장을 두 번씩이나 역임하였다. 이때 황징은 당숙 권대운을 찾아가서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인 오두인(吳斗寅) · 박태보(朴泰輔) 등이 폐비에 반대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는 “상공(相公)이 두 사람의 죽음을 구원하지 못하면, 이것은 상공의 잘못입니다.” 하고, 두 사람의 목숨을 구원하려고 노력하였다.[『담인집』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
1694년(숙종 20) 서인 김춘택(金春澤)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일으키다가 발각되었는데, 남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숙종은 도리어 남인의 영수 민암을 처형하고 남인을 모두 축출한 다음에, 소론 남구만(南九萬) · 박세채(朴世采) 등을 등용하고, 폐비 민씨를 다시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것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황징은 처음에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가, 1695년(숙종 21) 6월 유배에서 풀려나서 고향 문의로 돌아와서 20여 년 동안 살면서 여생(餘生)을 보냈다. 그러나 황징은 <기사환국>의 초기에 홀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고, 서인 오두인 · 박태보 등을 구명(救命)하는 등 청의(淸議)를 주장하면서 당쟁(黨爭)에서 초연하려고 노력하였으므로, 스스로 ‘기사완인(己巳完人)’이라고 일컬었다.[『담인집』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 곧 <기사환국> 이후에 그는 당파 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살았으므로 자기 스스로 “흠이 없는 사람[完人]”이라고 자부하였던 것이다.
성품과 일화
황징에 관해서는 그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담인집』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 그의 키는 보통 사람보다 작았으나, 양 미간이 넓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생김새가 잘 생기고 기품이 아주 높아서 마치 ‘시냇가에 우거진 소나무’와 같았다고 한다. 황징이 어렸을 때 관상을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넓은 양미간에 병사의 기상[兵氣]을 띠고 있는데, 군사를 총괄할 기상이므로, 장차 무관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예언하기를, “문관(文官)으로 출세하면, 8좌(坐) 곧 6판서와 좌우 참찬의 지위에 오를 것이지만, 무관(武官)으로 출세하면, 3군(軍)을 지휘하는 대장(大將)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성품은 단정하고 신중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도 않았다. 자애롭고 너그러워서 남에게 동정심이 많으며, 공손하고 부지런하여 남보다 절약하고 검소하였다. 네 고을의 수령관을 지냈으나, 관가의 일을 집안일처럼 생각하여, 책상 위에 민원서류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이를 해결하였다. 그는 옛날 인습(因習)을 그대로 구차스럽게 따르고 그 자리만을 지키면서 녹을 타 먹은 적이 없기 때문에 부임해 가는 곳마다 모두 훌륭한 치적(治積)이 있었다. 큰 고을의 부사(府使) · 목사(牧使)나, 큰 군영의 수사(水使) · 병사(兵使)를 십여 차례 이상 역임하였으나, 털끝만큼도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행낭(行囊)이 텅텅 비어 있었다. 또 관가의 하례(下隷)들과 모리배들이 횡포를 부리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기 때문에 가는 고을마다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그러나 집에 있을 때에는 살고 있는 집의 담장과 지붕을 고치지 않아서 집체의 몇 간이 무너지고, 대문 앞에 말을 돌릴 만한 공간이 없었다. 집안사람이 고하기를, “대감의 지위가 아경(亞卿)이고, 대장을 지내신 분인데, 집이 너무 비좁아서 친구와 장교(將校)가 찾아와도 앉을 자리가 없으니, 집을 조금 넓히시지요.”라고 하니, 황징이 대답하기를, “요즈음 사대부들이 고을 현감을 한번 지내더라도 반드시 자기 집 대문을 높이고 집을 넓히는데, 나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내가 사는 집은 비록 좁지만, 내 마음은 저절로 넓어지는데,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황징은 사람을 대할 때에는 화기애애하였으나, 자기를 엄하게 다스려서 아무리 위급한 때를 당하더라도 말을 빨리 하거나, 얼굴색을 변하는 일이 없었다. <경신대출척> 이후에 고향 문의 덕일촌에 머물 때 황징은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백(重伯)이우정(李宇鼎)과 나이가 같고 과거에 함께 급제하였으므로 서로 가깝게 지내고, 또 이우당(二憂堂)이만원(李萬元)과도 서로 처지가 비슷하여서, 매일 서로 만나서 정담을 나누고 시를 지어서 주고받으면서 우정을 나누었다. 이우정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서 대사헌 ·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이만원은 연안이씨(延安李氏)로서 대사간 · 이조 참판을 지내고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황징은 몸체가 작았지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무예가 아주 뛰어났다. 그의 행장을 보면, “그는 말을 아주 잘 탔는데, 말을 타고 달릴 때 어깨 근육이 위로 불끈 솟아오르고 뒤돌아보는 눈길에는 번갯불이 번쩍였다.”라고 하였다.[『담인집』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 황징의 무예에 대한 일화는 많은데, 그가 젊어서 내승(內乘)으로 있을 때와 늙어서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있을 때 그의 무용담은 매우 유명하다. 1676년(숙종 2) 황징이 부호군(副護軍)으로 내승을 겸임하고 있을 때,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 문의에 가까운 고을의 수령관을 자원하였는데, 병조에서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道使)에 의망(擬望)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모르는 척 하면서 활을 잘 쏘는 황징을 멀리 내보내고자 아니하여, 낙점(落點)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의 아버지가 매우 늙었다는 말을 듣고 숙종이 놀라서 말하기를, “내가 알지 못하였다. 지금 본도(本道)에 빈자리가 없는가?” 하고, 충주 영장(忠州營將)에 임명하였다. 그때 숙종은 활을 잘 쏘는 황징을 오래도록 내승에 두어서 임금을 호위하게 하려고 하였다.
또 1692년(숙종 18) 숙종이 춘당대(春塘臺)에서 무과의 인재를 직접 시험하여 뽑을 때 어영대장황징이 그 시관(試官)이 되었다. 과거의 합격자를 발표한 다음에, 숙종이 뒤이어 황징을 불러서 시범으로 활을 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 황징은 이미 나이가 58세여서 늙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경흥의 서수라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풍토병에 걸려서 항상 기침과 천식(喘息)을 앓고 있었다. 그는 거의 몸을 가누지도 어려울 정도였지만, 임금의 명령을 듣는 순간에 몸을 안장 위로 날려서 날아가는 듯이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과녁에 모두 명중시켰다. 숙종이 칭찬하기를, “활을 쏘고 말을 달리는 재주가 늙은 신하의 나이를 잊어버리게 만들었구려.” 하고, 내구마(內廐馬)와 얼룩 표범 가죽을 특별히 하사하여,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담인집』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
황징은 대장이 되었을 때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강단(剛斷)이 있고 과감하였으며, 일을 종합(綜合)하여 처리하였지만, 두루 빈틈없이 치밀하였다. 황징은 평생토록 명예와 절개를 지키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구차스럽게 시세(時勢)에 영합하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갑술옥사> 이후에 반대파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때 서인들은 청의(淸議)를 주장한 황징을 조정에 다시 벼슬시키고자 하였으나, 황징은 벼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기사환국> 이후에 정권을 잡은 남인의 대신들이 서인 계통의 전 어영대장신여철(申汝哲)을 죽이고자 하여 의논하기를, “신여철이 북병사(北兵使)로 있었을 때 무사(武士)를 많이 길렀는데, 장차 대란(大亂)을 일으키려고 하므로, 만약 이 사람을 먼저 없애지 않으면, 나라가 장차 위험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삼사(三司)의 남인 출신 젊은 관료들이 합동으로 상소하여 그 죄를 청하였다. 황징은 같은 무장으로서 신여철의 국가를 위한 충성심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영의정권대운을 찾아가서 간청하기를, “이 사람을 무고하게 죽이는 것은 공정한 의논이 아닙니다. 원컨대, 힘써 그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권대운이 대답하기를, “나도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였지만, 나이 젊은 관료들의 날카로운 비판이 너무 심하여 반드시 그를 죽이고자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황징이 곧 신여철에게 글을 보내어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자취를 감추라고 권유하였다.[『담인집』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 이리하여 신여철이 마침내 대문을 닫아 잠그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갑술옥사>가 일어나서 남인이 몰락하고 황징은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 1695년(숙종 21) 6월 가뭄이 들자 억울한 죄수를 석방하였는데, 의금부 판사신여철이 건의하기를, “황징은 여러 해 동안 군사 일을 맡아보았으나, 한 점의 하자(瑕疵)도 없었습니다. <기사환국>의 초기에도 홀로 청의(淸議)를 주장하였으니, 지금 죄수를 석방하는 때를 당하여 이 사람을 누구보다 먼저 풀어주어야 합니다.” 하니, 숙종이 황징을 유배지에서 풀어주어 거처를 충청도 문의의 옛집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서인 출신 어영대장신여철과 남인 출신 어영대장황징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면서 상대방의 충성심을 굳게 믿고, 그 의리를 지켰다. 숙종 시대 초기 명장은 유혁연이고, 후기 명장은 황징과 신여철이었다. 세 사람은 숙종 때 무관으로서 최고의 지위인 어영대장과 포도대장을 정변(政變) 때마다 서로 넘겨주고 넘겨받았던 사이였다. 그러나 당시 강직한 무인이 간교한 문관보다 당파 싸움에서 정도(正道)를 지켰던 것을 <황징과 신여철의 일화>에서 볼 수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청원군(淸原郡) 문의(文義)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이조 판서신좌모(申佐模)가 1세기가 지나서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담인집(澹人集)』 권17 「형조참판 반계 황공 행장(刑曹參判磻溪黃公行狀)」] 첫째 부인 배천 조씨(白川趙氏)는 참봉(參奉)조기(趙錡)의 딸인데, 1659년(효종 10) 28세의 나이로 돌아갔으나, 자녀는 3남을 두었다.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진사(進士)이양진(李陽進)의 딸인데, 자녀는 없다. 1715년(숙종 41) 황징의 묘소는 첫째 부인 배천 조씨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다.
장남은 황윤희(黃允熙)인데,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를 지냈고, 차남은 황윤후(黃允垕)이고, 3남은 황윤섭(黃允燮)인데,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을 지냈다. 그 손자 황침(黃琛)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귀양갔다. 황침은 3남 황윤섭의 아들인데, 할아버지 황징이 충성하던 경종(景宗)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려고 반란에 가담하였다. 장희빈이 낳은 경종이 죽고 최숙빈(崔淑嬪)이 낳은 영조가 세제(世弟)로서 즉위하는 과정에 많은 의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론의 영수 윤휴(尹鑴)의 손서(孫壻)인 이인좌는 소론의 입장을 지지하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후손 밀성군(密珹君)이탄(李坦)을 옹립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때 충청도 청주를 점령하자, 문의 등지의 민중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무과방목(武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어영청등록(御營廳謄錄)』
- 『담인집(澹人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무명자집문고(無名子集文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