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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9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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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정길 |
한글표제 | 박정길 |
한자표제 | 朴鼎吉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중기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양이(養而)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83년(선조 16) |
사망 | 1623년(인조 1) |
본관 | 밀양(密陽)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박인령(朴仁齡) |
조부 | 박유경(朴裕慶) |
부 | 박채(朴綵) |
모_외조 | 인동 장씨(仁同張氏): 장경안(張景安)의 딸 |
형제 | (형)박승길(朴升吉) |
처_장인 | 전주 이씨(全州李氏): 이수전(李秀全)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정길(朴鼎吉) |
총론
[1583년(선조 16)~1623년(인조 1) = 41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병조 참판(參判)을 지냈다. 자는 양이(養而)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채(朴綵)이며,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장경안(張景安)의 딸이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수전(李秀全)의 딸이다.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이이첨(李爾瞻)과 가까웠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06년(선조 39)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09년(광해군 1) 2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고, 그 해 4월에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이 되었으며, 9월 대교(待敎)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4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고, 9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으며, 12월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5월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고, 7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8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그 해 9월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같은 달에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고, 10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으며, 11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 1월 암행어사(暗行御使)가 되었고, 6월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2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고, 3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5월 이조 좌랑이 되었고, 같은 달에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다가 같은 달에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입격(入格)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문학(文學)을 겸하였고, 11월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1월 응교(應敎)가 되고, 4월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고, 5월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문신 중시(文臣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617년(광해군 9) 1월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고, 3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그 해 9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는데, 10월에 춘추관(春秋館)수찬관(修撰官)을 겸하였고, 11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5월 초에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있다가 같은 달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또 같은 달에 성절사 겸 진주사(聖節使兼陳奏使)가 되었다가 8월 체차되었다. 그 해 9월 대사성과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하였으며 12월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6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10월 공조 참판이 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3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고, 7월 예조 참판이 되었다. 1622년(광해군 14) 접반부사(接伴副使)가 되어 명(明)나라 도독(都督)모문룡(毛文龍)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병조 참판이 되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 1) 3월 13일 병조 참판으로 재직 중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만나 폐모(廢母)에 앞장선 죄목 등으로 주살(誅殺) 되었으니, 이 때 나이가 41세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는 대간에서 그가 “원래가 간사하고 독살스러운 인물이다.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속여 가며 계속하여 남을 모함 하였다.”라고 임금에게 아뢴 기록이 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3년 5월 2일] 그러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가 <인조 반정>을 일으킨 이들이 편찬한 실록이므로 그에 관한 기록과 평가에 한계가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대동야승(大東野乘)』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