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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9 판




총론

[1369년(공민왕18)~1430년(세종12) = 62세]. 고려 우왕~조선세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검교(檢校) 중추원(中樞院)판사(判事)변옥란(卞玉蘭)이고, 어머니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제위보(濟危寶) 부사(副使)조석(曺碩)의 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승지변중량(卞仲良)의 동생이다. 목은(牧隱)이색(李穡)과 양촌(陽村)권근(權近)의 문인으로서 조선 초기 관인 문학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려 우왕~조선 태조 시대 활동

1382년(우왕8) 나이 14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나이 15세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고려 말 사마시 양과(兩科)에 합격하였다. 1385년(우왕11) 고려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17세였다. 어린 나이로 생진과(生進科)와 대과에 합격하여 그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1387년(우왕13) 전교시(典校寺) 주부(主簿)에 보임되었다가 전교시 시랑(侍郞)으로 승진하였고, 밀직사(密直司) 당후관(堂後官)으로 옮겼다. 1389년(창왕1) 비순위(備巡衛) 정용낭장(精勇郞將)에 임명되어, 성균관(成均館) 진덕박사(進德博士)를 겸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창신교위(彰信校尉)를 거쳐 천우위(千牛衛) 우령중랑장(右領中郞將)에 임명되었고, 전의감(典醫監) 승(丞)과 의학 교수관(敎授官)을 겸임하였다. 1395년(태조4)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친 다음 1396년(태조4) 교서감(校書監) 승에 임명되었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397년(태조6) 종4품하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승품(陞品)하고 사헌부 시사(侍史)에 임명되었다. 1398년(태조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중형 변중량이 정도전(鄭道傳) · 남은(南誾) 일파로 몰려 죽움을 당하였는데, 춘당(春堂)변중량은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였다. 이때 변계량(卞季良)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태종 시대 활동

1401년(태종1)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정(學正) · 사예(司藝)로 승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사재감(司宰監)소감(少監)을 거쳐, 1404년(태종4)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직관(直館) · 응교(應敎) ·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40세이던 1407년(태종7) 4월 친시(親試) 문과(文科)에서 을과(乙科) 제1등으로 뽑혀 특별히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초자(超資)하여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또 그 해 8월 중월(仲月)에 관각(館閣)제학(提學) 이상 문신에게 부시(賦詩)하여 30인을 선발하였는데, 변계량이 제1등으로 뽑혀 예문관 제학(提學)에 임명되었다. 이때 태종의 친시 문과와 중신(重臣)의 부시는 권근의 건의를 따른 것이다. 문신들이 과거에 급제한 뒤에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면 학문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권근은 문신(文臣)이나 중신에게 부시하도록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시(重試)이다. 권근이 시권(試券)을 평가하여 제자 변계량을 1등으로 뽑아, 문형(文衡)으로 밀어 주었다. 변계량은 1408년(태종8) 생원시 시관(試官)이 되어 윤수(尹粹) 등 1백 명을 뽑았으며, 세자 좌보덕(左輔德)에 임명되어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를 가르쳤다. 1409년(태종9)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다시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어 춘추관 동지사(同知事)와 경연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1410년(태종10)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였고,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가 설치되자 그 제조(提調)에 임명되어 고려의 의례를 새로 바꾸어 제정하였다. 또 문묘(文廟)에 비(碑)를 세웠는데, 변계량이 그 비문(碑文)을 지었으므로, 태종이 그에게 전지 20결을 내려주었다. 1412년(태종12) 세자 우부빈객(右副賓客)에 임명되었다가 검교(檢校)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로 옮겼다. 1414년(태종14) 회시(會試)를 맡아 조서강(趙瑞康) 등 33인을 시취(試取)하였다. 1415년(태종15) 날씨가 크게 가물어서 태종이 매우 근심하였는데, 판부사변계량이 건의하여 원단(圓壇: 천단)에 기우제를 지내자 큰 비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은 이것을 “태종비[太宗雨]”라고 불렀다. 1416년(태종16) 경승부(敬承府) 윤(尹)을 거쳐 수문전(修文殿) 제학을 겸임하였고 세자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옮겼다가 다시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 1417년(태종17) 생원시를 관장하여 권채(權採) 등 1백 명을 뽑았다.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였고,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418년(태종18) 의정부 참찬(參贊)에 임명되어 의금부 제조사(提調事)를 겸임하였다.

세종 시대 활동

1418년 8월 태종의 선위로 충녕대군(忠寧大君)이도(李祹)가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태종이 예조 판서변계량에게 명하여 전위(傳位)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참찬에 임명되었는데, 세종이 그에게 태종을 위한 악장(樂章)을 짓게 하고, 상왕(上王)태종에게 헌수(獻壽)하니 태종이 아주 흡족하게 여겼다.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왜구들이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을 침입하자, 변계량은 왜구의 소굴을 역습하여 대마도 도주(島主)의 항복을 받아내어 한다는 강경론을 펼쳤다. 이에 1419년(세종1) 이종무(李從茂) 장군이 삼군(三軍)을 이끌고 가서 대마도를 정벌(征伐)하였다. 이때 변계량은 교문(敎文)을 지어서 왜구의 죄악을 낱낱이 들추어내어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우사타모리(宗貞盛)에게 선전 포고하였다. 그 이후로는 왜구가 조선의 역습을 두려워하여 감히 우리나라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세종의 명을 받고 예문관 대제학유관(柳觀)과 함께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였는데, 3년 동안 이를 교정하여 완성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그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뒤에 김종서(金宗瑞) ·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새로운 『고려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예문관 제학변계량이 집현전(集賢殿) 설치를 건의하니, 세종이 이를 받아들여 1420년(세종2)에 집현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를 집현전 대제학에 임명하여 집현전의 모든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422년(세종4) 상왕 태종이 승하하자, 변계량은 빈전도감(殯殿都監)제조(提調)에 임명되어, 태종을 헌릉(獻陵)에 안장(安葬)하였다. 그때 세종이 변계량에게 헌릉의 신도비문(神道碑文)과 지문(誌文)을 짓게 하였는데, 그의 글이 세종의 뜻에 맞았으므로, 변계량에게 안장 갖춘 말을 1필 하사하고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하였다. 1425년(세종7) 대제학변계량은 세종의 업적을 찬양하는 「화산별곡(華山別曲)」 8장을 지어서, 세종에게 그 악장을 바쳤다. 한편 변계량은 사주(四柱) 운명을 볼 줄 알았는데, 세종이 그를 불러 세자(世子: 문종)의 배필을 점쳐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1426년(세종8)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하여 우군 도총제부(右軍都摠制府) 판사(判事)에 임명되어 세자 이사(貳師)를 겸임하였다.

1429년(세종11) 세종이 대신들을 불러 해마다 중국에 공물(貢物)로 바치는 금은(金銀)을 면제 받을 수 있는 방책을 의논하였는데, 변계량이 명(明)나라 황제에게 감면해 줄 것을 바로 주청(奏請)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세종이 즉시 변계량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에다 우리 실정을 자세히 쓰도록 하고 그 표문을 명나라에 보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조선 출신 환관 태감(太監)윤봉(尹鳳)이 선종(宣宗)선덕제(宣德帝)에게 조선의 어려운 형편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금은의 공납을 영구히 면제 받았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과의 외교에서 가장 큰 숙원 사업을 해결한 것이다. 1430년(세종12) 우군부 판사변계량이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병중에도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4월 23일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2세이다.

저서로는『춘정집(春亭集)』 3권 5책이 남아 있다.

변계량의 위대한 식견

세종은 변계량에게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시호법은 그 사람의 성격과 업적을 반영하는데, 배우기에 부지런하고 남에게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마음을 굳게 다잡고 큰 일을 결단하는 것이 ‘숙(肅)’이다. 이를 보면, 변계량은 학문을 좋아하는 학자였고,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좋은 계책을 내어 결단하는 책사(策士)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변계량의 「졸기」에는, “일을 의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이따금 다른 사람의 상상 밖에 나오는 일을 하였다.”라고 하여, 그가 나라의 큰일이나, 어려운 문제를 당하였을 때에 다른 사람들이 감히 생각도 못할 좋은 생각을 내어놓았다고 하였다.

1418년(세종즉위) 일본의 대마도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모자라자, 왜구들이 충청도 비인현을 침입하여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태종이 세종과 함께 여러 신하들에게 대마도 왜구의 토벌에 대하여 의견을 물었다. 모두가 왜구를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으나, 변계량만은 혼자서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역습하여 대마도 도주(島主)의 항복을 받아내어 왜구를 근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왕 태종은 변계량의 의견을 받아들여 마산에서 함선을 건조하고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 병사를 징발하였다. 그리하여 1419년(세종1)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이종무가 병선 227척, 병사 1만 7천여 명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征伐)하였다. 이때 변계량은 왜구의 죄악을 낱낱이 열거하고 항복할 것을 촉구하는 선전포고문을 지어 대마도주 소우사타모리에게 보냈다. 마침 풍세(風勢)가 순조롭지 않았고, 일본 구주(九州) 지방의 영주(領主)들이 대마도주를 응원하여, 조선의 정벌군이 비록 대첩(大捷)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대마도주가 스스로 조선에 항복해 와서 경상도 계림부(鷄林府)에 소속되었고, 그 이후로는 왜구가 조선의 역습을 두려워하여 감히 조선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 조선은 거의 왜구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그 대신 중국은 왜구의 피해를 크게 입어서 명나라가 멸망하는 데 한 원인이 되었다.

1420년(세종2)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변계량을 집현전 대제학에 임명하여, 집현전의 모든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세종은 집현전 학사(學士)에 제수되는 자는 반드시 변계량의 추천을 받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변계량이 세종에게 “집현전을 설치해서 문신 중에서 연소하고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경서(經書)를 연구하게 해서 정책의 자문에 대비하기를 청합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세종은 변계량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궁궐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사 10명을 선발하여 항상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으며, 각종 국가 정책을 자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집현전은 1420년(세종2)에 설치되어 1456년(세조2)에 폐지될 때까지 37년간 존속하면서 90여 명에 달하는 훌륭한 학자들을 길러내었다. 집현전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기여하였고, 언어 · 역사 · 의약 · 천문 등의 서적을 총 35종이나 편찬하였다.

1429년(세종11) 세종이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는데, 해마다 중국에 바치는 공물이 무려 1천 냥(兩)씩이나 되니, 이를 줄이거나 면제 받을 계책을 의논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변계량이 “마땅히 그 사유를 자세히 써서 명나라에 보내어, 감면하여 달라고 황제에게 바로 주청(奏請)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세종은 변계량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지을 적에 우리나라의 실정을 자세히 써서, 그것을 명나라에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조선 출신 환관 태감 윤봉이 선종 선덕제에게 조선의 어려운 형편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금은의 공납을 영구히 면제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세종 시대 외교 업적 중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 중 하나이다. 윤봉은 명나라 궁중에서 선덕제가 어렸을 적에 그를 업어서 키운 황제의 최측근으로, 환관의 우두머리인 태감(太監)이 되어서는 칙사(勅使)로 조선에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세종의 인격에 감화되었다.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규정된 조선의 공물(貢物)은 금은을 비롯하여 인삼 · 모시 · 삼베 · 화문석 · 조선종이 등 12종이었으나, 이때 금은이 면제되어 공물은 11종이 되었다. 이처럼 세종 초반기 세종의 훌륭한 업적이 모두 변계량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변계량은 세종 시대의 초석(礎石)을 마련해준 위대한 책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영특하고 날카로우며, 학식이 정밀하고 해박하였다. 마음가짐이 확고하여 남의 강포함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도량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4세 때에는 고시(古詩)의 대구(對句)를 외우고, 6세 때에는 처음으로 글귀를 연결시켜 글을 만들었다. 그는 일찍부터 남에게 배우기를 좋아하여, 중형 변중량과 함께 고려 말엽 성리학의 대가 목은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도은(陶隱)이숭인(李崇仁),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양촌권근을 개별적으로 사사하였다. 그리하여 여말선초에 이색과 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 문학가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서, 조선 시대 관학파를 형성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태종의 인정을 받아서, 태종 · 세종 시대 20여 년 동안 문형을 맡아보았다. 조선 초기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 문서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세종은 언제나 표사(表辭)가 정밀하고 간절한 그의 문장을 칭찬했다. 그동안 그는 다섯 번 회시(會試)를 주관하고 세 번 사마시(司馬試)를 주관하였으며, 두 번 친시(親試)의 독권관(讀券官)이 되었는데, 고려 말엽부터 만연한 과거의 부정을 일절 금지하고, 지극히 공정하게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였다. 이들이 바로 세종 시대 집현전 학사의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여, 세종 시대의 문화적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변계량은 과거시험의 청탁과 부정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대의 명문가 사대부로부터 말할 수 없는 비판과 조롱을 받았다.

1415년(태종15) 날씨가 크게 가물어서 태종이 매우 근심하니, 판부사변계량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유학자들은 비록 예(禮)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일이 이미 박절하니, 원단(圓壇)에 비를 빌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태종이 곧 변계량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유정현(柳廷顯)을 보내 원단에 기우제를 지내자, 과연 큰 비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은 이것을 “태종비[太宗雨]”라고 일컬었다. 원단은 환구단(圜丘壇)이라고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이다. 유학의 천명(天命) 사상에서는 중국의 천자(天子)만이 천단(天壇)에서 천제(天祭)를 지낼 수 있고 제후(諸侯)는 지낼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시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의 접반사(接伴使)에게 곧잘 “조선에도 천단이 있는가.”, “천제(天祭)를 지내는가.”라고 물었다. 1419년(세종1)에도 가뭄이 아주 심하였는데, 변계량이 원단에서 기우제를 지내자고 청하였으나, 세종이 “참람한 예를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이에 변계량이 주장하기를, “우리나라에서 2천년 동안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제 와서 폐지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우리나라는 땅의 넓이가 수천리가 되어, 옛날 중국의 1백리 땅을 다스리던 제후국과 비교할 수 없으니, 천제를 지낸들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하니, 세종이 그 의견을 받아들여 원단에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이를 보면, 변계량은 사대(事大)와 자주(自主)의 한계성을 알고 있었던 유학자였다. 그러나 당시 유학자들은 그를 비난하기를, “대제학으로서 귀신을 섬기고 부처를 받들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고, 심지어,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한 사람”이라고 조롱하였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은 아예 원단, 즉 천단을 없애버렸다가, 고종 때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성립되자, 환구단을 다시 복원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화산별곡(華山別曲)」 · 「낙천정기(樂天亭記)」 등이 남아 있고, 『청구영언(靑丘永言)』에 그가 지은 시조 2수가 있다. 태조(太祖)의 시책문(諡册文), 태종헌릉(獻陵)의 신도비문과 지문(誌文), 문묘(文廟)의 비문, 기자묘(箕子墓)의 비문 등을 찬술하였고,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에서는 그의 문장에 대해 뛰어나게 절묘하여 법도에 맞으면서도 청아(淸雅)하다고 하고, 또 그의 시(詩)는 맑으면서 난삽하지 아니하고 담담하면서 천박하지 않다고 하였다.

한편 변계량은 매우 인색하여서 비록 하찮은 물건 하나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대하여 『해동잡록』에서는 그가 겨울줄[冬苽]을 거둘 때마다 베는 양을 기록하여 남의 손을 타지 않도록 하였으며, 또 손님을 접대하다가 귀한 술이 남으면 종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술병을 봉하여 장 속에 감춰두었다가 다시 꺼내 썼다고 했다. 물건을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유학자의 훌륭한 덕목인데, 당시 유학자들이 그의 인색함을 지나치게 과장한 감이 없지 않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임강(臨江) 구화리(仇和里)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형의 무덤 아래에 있으며, 그의 제자 정암(整菴)정척(鄭陟)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 경상도 거창(居昌)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고, 경상도 밀양(密陽)에 ‘삼현(三賢) 비각(碑閣)’이 세워졌는데, 아버지 변옥란과 중형 변중량과 함께 그의 업적을 기리었다. 첫째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철원부사(鐵原府使)권총(權總)의 딸로, 1녀를 낳았는데, 호군(護軍)조승(趙乘)에게 출가했다. 둘째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병마사(兵馬使)박언충(朴彦忠)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1남이 변영수(卞英壽)인데, 세종은 그의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서 특별히 사정(司正) 벼슬을 제수하여 그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춘정집(春亭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고봉집(高峯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문선(東文選)』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필원잡기(筆苑雜記)』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눌재집(訥齋集)』
  • 『도은집(陶隱集)』
  • 『삼봉집(三峯集)』
  • 『양촌집(陽村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