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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4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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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강희안 |
한글표제 | 강희안 |
한자표제 | 姜希顔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예술·체육인/화가, 예술·체육인/서예가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경우(景愚) |
호 | 인재(仁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18년(태종18)『방목』, 「비문」 |
사망 | 1465년(세조11) |
본관 | 진주(晉州)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강시(姜蓍) |
조부 | 강회백(姜淮伯) |
부 | 강석덕(姜碩德) |
모_외조 |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 |
형제 | (동생)강희맹(姜希孟) |
처_장인 | (첫째부인)고성이씨(固城李氏): 이곡(李谷)의 딸 (첫째부인)언양김씨(彦陽金氏): 김중행(金仲行)의 딸→(자녀)4녀 |
자녀 | (1녀)조중휘(趙仲輝)의 처 (2녀)송윤종(宋胤宗)의 처 (3녀)김맹강(金孟鋼)의 처 (4녀)어맹렴(魚孟濂)의 처 |
작품 |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강희안(姜希顔) |
목차
총론
[1418년(태종18)~1465년(세조11) = 48세]. 조선세종(世宗)~세조(世祖) 때에 활동한 문신, 서화가.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고, 강희맹(姜希孟)의 형이다. 어머니 심씨(沈氏)가 세종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므로, 강희안·강희맹 형제는 문종·세조와 이종 4촌간이다.
세종~문종 시대의 문화 활동
1441년(세종23)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시(司贍寺)주부(主簿)를 지냈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세종은 그가 전서(篆書)를 잘 쓰는 것을 보고, 일이 번잡한 예조에서 한가한 돈령부(敦寧府)주부로 옮겨서 오로지 서화(書畵)를 연마하는 데에만 열중하도록 배려하였다. 강희안은 한자의 여러 서체(書體)를 깊이 연구하여 새로운 독창적 서법(書法)을 창안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세종에게 그 재능을 인정을 받아 집현전(集賢殿)학사들과 함께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447년(세종29) 이조정랑이 되어,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세종32) 다시 돈령부에 돌아가서 부지사(副知事)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젊었을 때 의정부(議政府)검상(檢詳)에 결원이 생겨서 의정부에서 그를 첫째 후보자로 천거하였으나, 그는 청요직(淸要職)을 굳이 사양하니, 여러 재상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출세가 보장된 자리보다는 사람이 적은 한직에 머무는 것이 서화의 연마와 서체 연구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문종(文宗) 때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과 사간원(司諫院)지사(知事) 등을 역임하였다.
단종~세조 시대의 저항과 좌절
1454년(단종2) 집현전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병조지사를 거쳐서 이조·호조·병조의 참의(參議)를 지냈다.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1455년(세조1) 그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나, 세조가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1456년(세조2)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7월 성삼문(成三問) 등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음모(陰謀)가 발각되어,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이 하옥(下獄)되어 국문(鞠問)을 받을 때 그도 연루되어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대간(臺諫)에서 “이개의 ‘인심(人心)이 흉흉하다.’는 불평을 듣고서도 못들은 체하고 즉시 아뢰지 않았습니다.” 하니, 세조가, “강희안은 그 마음이 본래 미열(迷劣)한데도 이개의 말을 듣고 자리를 피하였다니, 진실로 현명한 일이다.”라고 비호하여 강희안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야사(野史)에서는 강희안이 옥사에 연좌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승복하지 아니하자, 세조가 성삼문에게, “강희안도 이 일에 참여하였느냐?” 물으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는 실상을 알지 못합니다. 나으리가 이름 있는 선비를 모조리 죽였으니, 이 사람은 살려 두고 쓰시지요. 그는 실지로 어진 선비입니다.” 하였으므로, 강희안이 죄를 면하였다고 한다. 강희안은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참여하여 서로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그 음모에 깊이 가담했을 가능성이 많았으나, 세조가 강희안과 이종 사촌이어서 이모를 위하여 살려 주었던 것 같다.
그 뒤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소환되어 다시 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458년(세조4) 호조참의로서 황해도관찰사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관로(官路)가 침체되어 다시 이조참의를 거쳐 고작 인순부(仁順府) 윤(尹)을 역임하는 데에 그쳤다. 1462년(세조8) 사은사(謝恩使)로서 표(表)·전(箋)을 받들고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이듬해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상호군(上護軍)이 되었고, 중추원부사(副使)에 임명되었다. 1464년(세조4) 다시 인수부 윤에 임명되었으나, 1465년(세조11) 겨울에 등 뒤에 종기가 나서 죽었는데, 나이가 48세였다.
저서로는 『양화록(養花錄)』이 있다.
훈민정음 창제와 편찬 사업
강희안이 돈령부주부로 있을 때에,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이루어졌고 또 이것을 가지고 『운회(韻會)』를 번역하였으며 『동국정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을 편찬하면서 문자로서의 기능을 시험하였다. 그때 집현전이 중심이 되어 학사 출신의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신숙주(申叔舟)·성삼문·이개·이선로(李善老: 李賢老) 등이 연구를 전담하였는데, 오로지 강희안만은 집현전의 직함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강희안이 훈민정음 창제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예가 강희안의 역할이 서체의 연구, 즉 글자꼴의 개발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훈민정음의 글자꼴이 한자의 전서(篆書) 모양과 닮았기 때문이다. 1443년(세종25) 정인지 등과 함께 새로 만든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다. 이리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마침내 1446년(세종28) 9월에 반포되었다.
또 1444년(세종26) 집현전의 최항·박팽년·신숙주·이선로·이개 등과 함께 세종의 명령을 받고 언문(諺文)으로 『운회』를 번역하였고, 1445년(세종27) 최항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였다. 그는 이조정랑으로 있으면서 집현전의 응교(應敎)신숙주와 직제학최항·성삼문·박팽년, 교리(校理)이개 등과 함께 왕명을 받들고 『동국정운』을 편찬하였는데, 1447년(세종29) 9월 그 책이 완성되었다.
[지도 제작과 활자 사업] 1454년(단종2) ‘조선 8도’와 ‘서울의 지도’를 만들 때, 그는 집현전직제학으로서 예조참판정척(鄭陟), 집현전 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지도를 제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화공 안귀생(安貴生)을 데리고 직접 산천을 답사하면서 지도의 밑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이 세조 때 완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 지도인「동국지도(東國地圖)」이다. 그 원본이 일본의 용곡대학(龍谷大學)에 소장되어 있고, 그 모사본이 세종대왕 기념관에 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활자 ‘임신자(壬申字)’를 녹여서 강희안에게 ‘을해자(乙亥字)’를 쓰게 하였다. 을해자는 동활자로서, 대·중·소 3종이 있는데,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등을 찍어냈다. 1436년(세종18)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쓴 병진자(丙辰字)와 1450년(세종32)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경오자(庚午字)와 함께 자체(字體)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나, 활자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글· 글씨· 그림의 삼절
강희안은 나이 겨우 두세 살 때 담장이나 벽에 손가는 대로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도, 서법(書法)과 화법(畵法)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시(詩)와 글씨 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삼절(三絶)’이라고 불렀다. 글씨는 전서를 비롯하여 예서(隸書)·해서(楷書)와 초서(草書)·팔푼(八分)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통하고, 특히 묵죽(墨竹)을 좋아하였는데, 중국의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를 능가하였다. 그림은 묵화(墨畵)로 풍경화를 즐겨 그렸으며, 영모화(翎毛畵)·산수화·인물화에도 모두 뛰어나서, 한 시대에 독보적이었으나, 그는 작품들을 감추고 세상에 내어놓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그림으로는「여인도(麗人圖)」가 가장 유명하였고, 「청학동(靑鶴洞)」, 「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가 모두 기보(奇寶)라 할 수 있을 만큼 유명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작품으로는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의 그림이 있고, 「강석덕 묘표(姜碩德墓表)」, 「윤형 묘비(尹炯墓碑)」 등의 글씨가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성이 침착하고 아담하며, 너그럽고 온화하였다. 무슨 일을 당하면 감히 남보다 앞장서지 않았다. 말이 적고 청렴하고 소박하여 문아(문아: 풍류의 도)가 한때에 드높았다. 또 물리(物理)에 통달(通達)하여 일의 단서를 접하면 문득 그 내용을 알아내더라도 그 일을 남에게 자랑스럽게 먼저 말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저술하여 꽃을 키우면서 경륜(經綸)의 뜻을 여기에 함께 적었다. 성격이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영달(榮達)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제 중에 글씨와 그림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서화(書畵)는 천한 재주이다. 후세에 남기게 되면, 다만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다.” 하고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작품은 세상에 거의 전하지 않는다. 1462년(세조8) 사은사(謝恩使)로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그의 글씨와 그림을 보고 중국인들이 크게 감탄하여 이를 구하려고 모여들었으나, 그는 모두 겸손하게 사양하고 글씨나 그림을 한 점도 주지 않았으므로, 해외에도 유품이 없다.
강희안은 아들이 없고, 딸만 넷이 있었는데, 그 중에 김맹강(金孟鋼)에게 시집간 셋째 딸 김필(金珌)의 어머니가 중종 때 글씨를 잘 쓴다고 소문이 높이 났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양화록(養花錄)』
- 『사숙재집(私叔齋集)』
- 『진산세고(晉山世稿)』
- 『동문선(東文選)』
- 『사가집(四佳集)』
- 『저헌집(樗軒集)』
-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용재총화(慵齋叢話)』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청파집(靑坡集)』
- 『추강집(秋江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