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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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과 대비된 주체, 즉 지방이나 재야의 집단이나 인물이 편찬한 역사.

개설

야사란 관청이나 조정(朝廷)이 아닌 개인이나 서원·가문 등의 집단이 편찬한 역사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관료-학자가 조정에서 편찬 사업을 주도하면서 관찬 사서가 편찬되었다. 이들 역사서는 기전체(紀傳體)나 편년체(編年體) 통감형, 사략형의 체재를 갖추고 있었다.

원래 야사는 개인이나 집단이 편찬한 역사서를 의미하였으나, 지방관이 편찬한 지방의 역사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이는 야사라는 용어가 조(朝)-야(野)로 대비되는 삶의 무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상용어임을 보여 준다. 야사가 국사(國史)에 대비되는 용례로 쓰인 것도 이 때문이다(『정조실록』 7년 3월 25일).

이들 야사는 다양한 서술 체재와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찬 역사서를 모두 야사라고 하지도 않는다. 야사는 현대 서지학의 분류에 따르면 편년류, 사략류, 수록류, 소설류, 전기류, 잡가류, 잡사류, 잡편류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을 포함하지만 다루고 있는 시기의 차이 때문에 역사성의 가치에서 역사서로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연구자에 따라 어떤 책은 야사로 분류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 일이 생긴다.

대개 편년의 형식을 취하면서 국가나 사회의 이면사를 다룸으로써 역사서의 관점과 체재를 갖추고 있는 저술을 야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편년 역사서라도 통감이나 강목형의 사서, 또는 기전체 체재를 갖춘 경우는 야사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하는 논의도 제기되고 있다. 조선이 아닌 중국처럼 다른 나라나 지역을 다룰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지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야사는 체재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편찬 주체의 문제로 한정하여 개념을 규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체재와 대상은 야사의 하위 범주로 분류할 수 있을 뿐 야사 자체의 개념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내용 및 특징

야사에는 편년체로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경우가 많다. 조선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주요 사실을 기록한 『진승총(震乘總)』, 영조 때까지 역대 왕에 대한 내력과 치적을 기록한 『진사기략(震史記略)』, 1564년(명종 19)부터 1759년(영조 35)까지 조정의 주요 사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대사기(大事記)』 등은 조선 시대 정치사를 통사(通史)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서문중(徐文重)의 『조야기문(朝野記聞)』, 『소화귀감(小華龜鑑)』, 『국조편년(國朝編年)』, 『대사편년(大事編年)』도 이러한 부류이다.

특히 안정복(安鼎福)의 『열조통기(列朝通紀)』는 조선초기 강목체 논의를 거쳐 정착된 『조선왕조실록』의 「시정기찬수범례」와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편찬되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이 주요 참고 문헌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열조통기』가 간접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편년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사찬 역사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사(記事)의 범주가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졸기(卒記)나 제배(除拜)의 형식은 『조선왕조실록』과 거의 똑같고 외교, 등과(登科) 현황, 상소 등도 내용만 줄였을 뿐 『조선왕조실록』과 매우 비슷하다.

이는 정사와 야사가 질적 수준에서 접근하는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는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도 마찬가지이다. 기존 야사의 부족한 점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지식층의 역사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차 야사의 질적 제고를 가져왔던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의 역사부터 조선시대까지를 다룬 야사도 적지 않다. 고려 말에서 조선 숙종 연간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 『청야만집(靑野謾輯)』, 단군조선에서 숙종대까지 다룬 『대동유사(大東遺事)』가 그것이다.

조선후기는 무엇보다도 총서형 야사가 대규모로 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려(金鑢)의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와 『창가루외사(倉可樓外史)』를 비롯하여 『패림(稗林)』, 『대동야승(大東野乘)』 등 질이 높은 전집류 야사가 나타났다.

이런 양상은 점차 역사를 포함한 지식 정보를 향유하는 계층이 늘어나면서 조정 중심의 역사 편찬이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또한 명(明), 청(淸)에서 일어난 총서 편집 경향이 조선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동시에 조선 지식층 나름의 문화적 자각과 정리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도 이런 현상을 가속화하였다.

변천

조선전기 야사로는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와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등이 있다. 이는 국가적인 전고(典故)를 다루기도 했지만 주로 개인적인 견문이나 수록류의 형식을 띠었다. 따라서 신변잡사나 인물 소개가 중심이었고, 조정의 일이라도 단편적인 사건 경위를 설명하는 수준이었다.

선조 이후 허봉(許篈)의 『해동야언(海東野言)』은 통사 형식의 첫 야사로 꼽을만하다. 인물 중심의 서술 방식과 전거 제기 등 서술 방법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 효종·현종 연간에는 정도응(鄭道應)의 『소대수언(昭代粹言)』이 등장하였는데, 조선후기 총서 형식 야사의 출발이었다.

영조와 정조 연간에는 많은 사찬 야사가 편찬되었다. 형식도 다양해져서 통사 형식의 야사와 총서 형식의 야사가 줄기를 이루었다. 아울러 당론(黨論)을 대변하는 역사서도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 『필원잡기(筆苑雜記)』
  • 『용재총화(慵齋叢話)』
  • 『해동야언(海東野言)』
  • 『소대수언(昭代粹言)』
  • 『열조통기(列朝通紀)』
  • 『창가루외사(倉可樓外史)』
  •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
  • 『패림(稗林)』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대동야승(大東野乘)』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7.
  • 유지기 저·오항녕 역, 『사통(史通)』, 역사비평사, 2012.
  • 전목 저·이윤화 옮김, 『(전목 선생의)사학(史學) 명저 강의』, 신서원, 2006.
  • 정구복, 『한국 중세사학사 Ⅰ』, 집문당, 1999.
  • 정구복, 『한국 중세사학사 Ⅱ-조선 전기편』, 경인문화사, 2002.
  • 김경수, 「조선 전기 야사 편찬의 사학사적 고찰」, 『실학사상연구』19·20, 2001.
  • 박인호, 「장서각 야사류의 소장 경위와 특징」, 『조선사연구』1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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