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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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중국 관계에서 절일(節日)과 황제문서에 대한 답변으로 황제에게 전달된 외교문서.

개설

조선시대 조공 체제의 국제 질서에서 중국 황제는 책봉국의 대표로서 조공국에 대한 모든 봉전(封典)을 주관하였다. 황제의 통치와 봉전은 황제문서였던 조서·칙서 등으로 조선에 전달되었으며, 조선은 이에 대하여 하표·사은표와 같은 표문을 전달할 의무가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초기까지 표문은 구체적인 외교 사안을 포함하여 실질적인 외교문서로 활용되다가 점차 의례적인 외교문서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내용 및 특징

표문은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 중 황제를 대상으로 전달된 문서로 가장 높은 등급의 외교문서였다. 조공 체제에서 조선 왕은 절일이 되면 황제에게 하표를 전달하고, 각종 황제의 명령과 알림에 대해 답변하는 표문을 전달하게 되어 있었다. 조선의 대중국 외교문서 중 자문(咨文) 다음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였다.

『전율통보』 별편(別編)의 ‘사대문자식(事大文字式)’에 기재된 종류와 형식을 살펴보면, 표문은 하표(賀表)·방물표(方物表)·사은표(謝恩表)·진하표(進賀表)·진위표(陳慰表)·기거표(起居表)·고부표(告訃表) 등의 종류가 있다. 정조·동지·성절 등 절일(節日)에 보내는 표문의 장단구(長短句)는 정본(定本)이 있지만, 나머지는 일에 따라서 별도로 찬술하였다.

표문은 엄격히 정해진 형식을 준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글자 행렬의 경우, ‘조선국왕(朝鮮國王)’은 평행으로, ‘표(表)’·‘하(賀)’ 등은 2행으로, ‘천(天)’·‘황(皇)’·‘성(聖)’ 등은 3행으로 적었다. ‘정단(正旦)’은 정조사가 전달하는 경우에 적었으며, 동지사는 ‘동지(冬至)’로, 성절사는 ‘만수성절(萬壽聖節)’를 적었다. 황제를 지칭하는 ‘황(皇)’은 황첨(黃籤)하였다. 연호 이하의 글자 크기는 본문과 다르게 작게 적었다. 연호의 연도 위에 ‘사대지보(事大之寶)’라는 인장을 찍었다. 방물표는 방물을 전달할 때, 필수적으로 함께 전달된 표문으로 본문에서 물목의 경우는 평행으로 적되 글자의 크기가 다소 작게 적었다.

표문은 중국에서 조선에 전달된 표전식(表箋式)에 입각하여 작성되어야 했다. 조선초기 표전문사건, 조선후기 외교문서의 위식(違式) 문제 등 상징하는 글자의 오류 등으로 외교문서 자체가 외교 문제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았다.

표문은 1393년(홍무 26)에 처음으로 진상 규칙이 정해졌다. 천수·성절에는 재외(在外) 5품 이상 관청은 표문 1통을 올리고, 정단·동지에는 황제에게 표문을, 황후와 황태자에게 전문(箋文)을 각 1통씩 올렸다. 중앙관청에서는 표문과 전문을 예부에 제출하며, 지방관청에서는 주(州)에서 부(府)로, 부에서 포정사로, 포정사에서 예부에 제출하였다. 진하표문(進賀表文)의 문사(文詞)는 모두 단아하고 가는 해서(楷書)로 적어야 하며, 개인적인 이름과 인장을 사용하는 것은 허가되지 않았다.

명대 표문의 전달에 있어 중요한 관청은 내각·예부·사례감·육과·통정사 등인데, 한 기관에 의하여 생산·전달 단계가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생산되었다. 이는 명대 공문 생산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산 과정에서 한 기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배제시키고, 상호 견제 관계에서 보다 효율적인 국가통치를 수행하도록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청대의 표문도 명대 표문제도와 유사하게 운영되었다. 단, 전달 과정에서 사례감의 기능이 없어지고, 군기처(軍機處)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표문과 같이 다소 의례적인 성격의 문서는 예부에서 취합하여 전달하는 것이 상례였다.

참고문헌

  • 『전률통보(典律通補)』
  • 『동문휘고(同文彙考)』
  • 김경록, 「조선후기 사대문서의 종류와 성격」, 『한국문화』 35, 2005.
  • 김경록, 「명대 공문제도와 행이체계」, 『명청사연구』 26, 2006.
  • 김경록,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의 접수·보존체계」, 『한국사연구』 13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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