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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의 훈구파 비판'''== | =='''사림파의 훈구파 비판'''== | ||
− | 1482년(성종 13) 2월 이조 참판이 되었다가, 3월 이조 판서로 바로 승진되었다. 그때 그가 차서가 아니라고 재삼 사양하였으나, 성종이 굳이 임명하고, 영의정정창손을 불러서, 아들은 이조 판서가 되고 아버지는 영의정이 된 것을 축하하였다. 그때 성종은 자성대비가 세상을 떠나고 26세의 나이로 친정(親政)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이조 판서를 교체하였는데, 젊었던 성종이 정창손을 신임한 나머지 그의 아들 정괄을 이조 판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부자에게 전형(銓衡 : 인사 행정)을 맡기는 것은 무리수였다. 이후 3년 동안 인사 행정을 담당하면서 이들 부자는 국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김종직( | + | 1482년(성종 13) 2월 이조 참판이 되었다가, 3월 이조 판서로 바로 승진되었다. 그때 그가 차서가 아니라고 재삼 사양하였으나, 성종이 굳이 임명하고, 영의정정창손을 불러서, 아들은 이조 판서가 되고 아버지는 영의정이 된 것을 축하하였다. 그때 성종은 자성대비가 세상을 떠나고 26세의 나이로 친정(親政)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이조 판서를 교체하였는데, 젊었던 성종이 정창손을 신임한 나머지 그의 아들 정괄을 이조 판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부자에게 전형(銓衡 : 인사 행정)을 맡기는 것은 무리수였다. 이후 3년 동안 인사 행정을 담당하면서 이들 부자는 국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김종직(金宗直)]] 등의 신진 사류는 권력이 공신에게 너무 집중되었음을 비판하였다.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싸움에 첫 단초가 된 것이다. |
− | 성종은 친정 이후 김종직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하였는데, 김종직은 고려 말의 이색( | + | 성종은 친정 이후 김종직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하였는데, 김종직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길재(吉再)의 [[도학(道學)]] 사상을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를 통하여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김종직이 젊은 성종의 신임을 받아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이조 참판이 되자, 그 제자들 또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사헌부, 사간원의 3사(三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조 판서정괄과 영의정정창손의 훈구파 위주의 인사 행정을 공격하였다. 성종도 훈구파 위주의 인사 행정이 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이조 참판김종직이 사림파를 발탁하는 데에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과 성종 후반기에는 사림파들이 [[대간(臺諫)]]에 자리 잡고 훈구파를 공격하였는데, 처음에는 정괄과 정창손 부자의 권력 독점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학을 중시하던 김종직과 문학을 중시하던 유자광(柳子光)이 함안군[[현판(懸板)]] 사건으로 서로 대립하면서 성종 말엽에는 사림파와 훈구파는 감정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
=='''성품과 일화'''== | =='''성품과 일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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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장이 8척(尺)이나 되고 가슴은 몸보다 더 길었는데,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대범하면서도 정직하였다. 그 외면을 바라보면 그 높음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고 그 내면을 살펴보면 그 가진 것을 모조리 짐작할 수가 없었다.[「정괄신도비명」] 기상이 엄준(嚴峻)하여 대신의 기풍이 있으니, 바라보기에도 늠름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하기를 견고하고 확실하게 하니 누구도 동요시킬 수 없으며 또 권도(權度)가 있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1년 10월 8일] | 정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장이 8척(尺)이나 되고 가슴은 몸보다 더 길었는데,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대범하면서도 정직하였다. 그 외면을 바라보면 그 높음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고 그 내면을 살펴보면 그 가진 것을 모조리 짐작할 수가 없었다.[「정괄신도비명」] 기상이 엄준(嚴峻)하여 대신의 기풍이 있으니, 바라보기에도 늠름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하기를 견고하고 확실하게 하니 누구도 동요시킬 수 없으며 또 권도(權度)가 있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1년 10월 8일] | ||
− | 1492년(성종 23) 4월 중추부 지사였을 당시 파릉군(坡陵君)윤보(尹甫)와 함께 북경에 가서 황태자 책봉을 하례(賀禮)하게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3년 4월 22일] 이때 중국의 예부(禮部) 낭중(郎中)이운( | + | 1492년(성종 23) 4월 중추부 지사였을 당시 파릉군(坡陵君)윤보(尹甫)와 함께 북경에 가서 황태자 책봉을 하례(賀禮)하게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3년 4월 22일] 이때 중국의 예부(禮部) 낭중(郎中)이운(李雲)이 그의 늠름한 의용(儀容)을 보고서 [[서반(序班)]]인 이상(李常)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선의 사신들을 많이 보았지만, 정 재상(鄭宰相) 만큼 뛰어난 인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행인(行人)을 볼 때마다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정괄신도비명」] |
그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그의 아버지인 영의정정창손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하였다. 정괄은 그의 관위(官位)가 이미 1품(品)이었지만 몹시 추운 날이나 무더운 날에도 매일 아침마다 찾아가 뵈었고, 잠자리에 들 때에도 문안을 여쭈어 아무 일이 없다고 한 뒤라야 물러 나왔다. 아버지 정창손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정괄은 이조 판서로 재임하였는데, 어느 날 조반(朝班)의 행렬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땅에 쓰러지자 그는 즉시 부친을 등에 업고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눈짓으로 배웅하면서 부러운 눈으로 찬상(贊賞)하였다고 전해진다.[「정괄신도비명」] | 그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그의 아버지인 영의정정창손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하였다. 정괄은 그의 관위(官位)가 이미 1품(品)이었지만 몹시 추운 날이나 무더운 날에도 매일 아침마다 찾아가 뵈었고, 잠자리에 들 때에도 문안을 여쭈어 아무 일이 없다고 한 뒤라야 물러 나왔다. 아버지 정창손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정괄은 이조 판서로 재임하였는데, 어느 날 조반(朝班)의 행렬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땅에 쓰러지자 그는 즉시 부친을 등에 업고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눈짓으로 배웅하면서 부러운 눈으로 찬상(贊賞)하였다고 전해진다.[「정괄신도비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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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에 있고,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정괄신도비명」] |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에 있고,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정괄신도비명」] | ||
− | 부인 양성 이씨( | + | 부인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긴(李緊)의 딸이다. 외아들은 정종보이다.[「정괄신도비명」]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5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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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괄 |
한글표제 | 정괄 |
한자표제 | 鄭佸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연산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경회(慶會) |
시호 | 공숙(恭肅)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35년(세종 17) |
사망 | 1495년(연산군 1) 10월 8일 |
본관 | 동래(東萊)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
증조부 | 정부(鄭符) |
조부 | 정흠지(鄭欽之) |
부 | 정창손(鄭昌孫) |
모_외조 | 청주 정씨(淸州鄭氏) |
처_장인 | 양성 이씨(陽城李氏) : 이긴(李緊)의 딸 →(자녀)1남 |
자녀 | (1자)정종보(鄭宗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괄(鄭佸) |
총론
[1435년(세종 17)∼1495년(연산군 1) = 61세]. 조선 초기 세조(世祖)~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판서(判書)와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군회(君會) 혹은 경회(景會)이며,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정창손(鄭昌孫)이고, 어머니 청주 정씨(淸州鄭氏)는 승녕부(承寧府) 소윤(少尹)을 지낸 정지(鄭持)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정흠지(鄭欽之)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부(鄭符)이다.
세조 시대 활동
1456년(세조 2)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허백정집(虛白亭集)』 권3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춘추관사정공비명(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春秋館事鄭公碑銘)」 이하 「정괄신도비명」으로 약칭] 처음에 음직(蔭職)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공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가, 1458년(세조 4) 사재감(司宰監)주부(主簿)가 되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연산군 1년 10월 8일, 「정괄신도비명」] 12월 세조가 풍양(豐壤)에 사냥하러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환궁하였는데, 사재감에서 길가에 횃불[炬火]을 설치하지 않았다고 하여, 정괄(鄭佸)을 장(杖) 30대에 처하고 파직하였으나, 곧 공신의 아들이라며 용서하였다.[『세조실록(世祖實錄』세조 4년 12월 22일, 세조 4년 12월 26일]
1464년(세조 10) 8월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이 되었고, 1465년(세조 11) 춘당대시(春塘臺試)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를 거쳐 5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다.[『세조실록』세조 11년 5월 28일]
성종 시대 활동
1473년(성종 4) 6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4년 6월 28일] 성종에게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의 폐단을 시정하고, 과거 제도의 정원을 증가하며, 관리를 임용하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는 등의 국가 정책 개혁안을 건의하였다.[『성종실록』성종 5년 윤6월 18일, 성종 6년 5월 10일] 1476년(성종 7) 2월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으며, 이어 1477년(성종 8) 7월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실록』성종 7년 2월 13일, 성종 8년 7월 17일] 1479년(성종 10) 윤10월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가, 1480년(성종 11) 4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실록』성종 10년 윤10월 22일, 성종 11년 4월 1일] 이때 그가 관리들의 기풍을 크게 진작시키자, 조정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정괄신도비명」] 1482년(성종 13) 2월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고, 3월 이조 판서로 승진하였다.[『성종실록』성종 13년 2월 8일, 성종 13년 3월 2일] 당시 정괄은 자신이 차서(次序)가 아니라고 재삼 사양하였으나, 성종이 굳이 임명하고, 영의정정창손을 불러서, “경의 아들을 판서로 삼았다. 그래서 경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하니, 정창손이 절하고 사례하였다.[『성종실록』성종 13년 3월 2일]
1483년(성종 14) 4월 자성대비(慈聖大妃 :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조 판서로서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를 겸하였다.[『성종실록』성종 14년 4월 1일] 1484년(성종 15) 3월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로 전임되었고, 10월에는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陞品)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15년 3월 11일, 성종 15년 10월 4일, 성종 15년 10월 5일, 성종 15년 10월 26일] 1485년(성종 16) 윤4월 병조 판서가 되었고, 7월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된 후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사(貳師)를 겸임하였다.[『성종실록』성종 16년 윤4월 27일, 성종 16년 7월 7일, 『연산군일기』연산군 1년 10월 8일]
1487년(성종 18) 1월 전탄제(箭灘堤) 공사를 심사하는 황해도순찰사(黃海道巡察使)에 임명되어, 황해도 재령군(載寧郡)에 가서 전탄제 축조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다시 조사한 후 그 공사가 타당하지 않다고 보고하였다.[『성종실록』성종 18년 1월 21일, 성종 18년 2월 1일] 1489년(성종 20) 3월 중추부 지사가 되었다가, 8월 형조 판서를 거쳐, 12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0년 3월 8일, 성종 20년 8월 24일, 성종 20년 12월 23일] 형조 판서로 있을 때 모든 옥사를 공평하게 처결하였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을 때는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하였으므로, 책상에 적체된 서류가 하나도 없었다.[「정괄신도비명」]
1490년(성종 21) 4월 경상도관찰사로서 중추부 지사를 겸임하였다. 나라의 제도상 관찰사가 겸함(兼銜)을 가질 수가 없었으나, 이때부터 관찰사가 겸직을 하는 것이 시작되었다.[『성종실록』성종 21년 4월 29일, 「정괄신도비명」] 1491년(성종 22) 7월 전라도순변사(全羅道巡邊使)가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2년 7월 17일] 1492년(성종 23) 4월 중추부 지사가 되었는데, 진하사(進賀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황태자(皇太子: 무종(武宗))의 책봉을 축하하였다. [『성종실록』성종 23년 4월 22일] 1493년(성종 24) 11월 병조 판서가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4년 11월 6일] 1494년(성종 25) 5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임명하였다.[『성종실록』성종 25년 5월 6일] 당시 평안도 지역은 중국 사신들이 왕래하는 지역이어서 각 고을이 그 접대로 인하여 피폐한데다가, 흉년이 들어서 민심이 흉흉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그를 관찰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정괄이 병을 핑계대고 사임하였으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다.[『성종실록』성종 25년 5월 6일]
연산군 시대 활동
1494년(연산군 즉위년) 12월 연산군 즉위 후, 명나라의 고명(誥命)을 받아야 하였다. 그런데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는 반드시 1품의 정승이 맡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1품의 정승은 영의정과 좌의정, 그리고 우의정을 가리키는데, 당시 삼공(三公)이 모두 연로하고 병이 들어서 명나라 북경까지 갔다 올 수가 없었다. 이에 1495년(연산군 1) 3월 연산군은 정괄을 우의정에 임명한 후 고명사은사로 삼았으며, 그해 6월 정괄은 고명을 하사한 것을 사례하는 고명사은사가 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북경에 갔다.[『연산군일기』연산군 1년 3월 19일, 연산군 1년 3월 20일, 성종 1년 6월 20일]
그리고 그해 10월 그가 아직 북경에서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1년 10월 4일] 그러나 미처 본국에 돌아오기 전에 추운 바람에 몸이 어는 바람에 병에 걸려서 10월 8일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1세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년 10월 8일] 그의 외아들 정종보(鄭宗輔)가 그 사행(使行)을 따라갔다가 아버지 정괄의 영구(靈柩)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서 장사를 지냈다.[「정괄신도비명」]
사림파의 훈구파 비판
1482년(성종 13) 2월 이조 참판이 되었다가, 3월 이조 판서로 바로 승진되었다. 그때 그가 차서가 아니라고 재삼 사양하였으나, 성종이 굳이 임명하고, 영의정정창손을 불러서, 아들은 이조 판서가 되고 아버지는 영의정이 된 것을 축하하였다. 그때 성종은 자성대비가 세상을 떠나고 26세의 나이로 친정(親政)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이조 판서를 교체하였는데, 젊었던 성종이 정창손을 신임한 나머지 그의 아들 정괄을 이조 판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부자에게 전형(銓衡 : 인사 행정)을 맡기는 것은 무리수였다. 이후 3년 동안 인사 행정을 담당하면서 이들 부자는 국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김종직(金宗直) 등의 신진 사류는 권력이 공신에게 너무 집중되었음을 비판하였다.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싸움에 첫 단초가 된 것이다.
성종은 친정 이후 김종직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하였는데, 김종직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길재(吉再)의 도학(道學) 사상을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를 통하여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김종직이 젊은 성종의 신임을 받아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이조 참판이 되자, 그 제자들 또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사헌부, 사간원의 3사(三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조 판서정괄과 영의정정창손의 훈구파 위주의 인사 행정을 공격하였다. 성종도 훈구파 위주의 인사 행정이 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이조 참판김종직이 사림파를 발탁하는 데에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과 성종 후반기에는 사림파들이 대간(臺諫)에 자리 잡고 훈구파를 공격하였는데, 처음에는 정괄과 정창손 부자의 권력 독점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학을 중시하던 김종직과 문학을 중시하던 유자광(柳子光)이 함안군현판(懸板) 사건으로 서로 대립하면서 성종 말엽에는 사림파와 훈구파는 감정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성품과 일화
정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장이 8척(尺)이나 되고 가슴은 몸보다 더 길었는데,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대범하면서도 정직하였다. 그 외면을 바라보면 그 높음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고 그 내면을 살펴보면 그 가진 것을 모조리 짐작할 수가 없었다.[「정괄신도비명」] 기상이 엄준(嚴峻)하여 대신의 기풍이 있으니, 바라보기에도 늠름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하기를 견고하고 확실하게 하니 누구도 동요시킬 수 없으며 또 권도(權度)가 있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1년 10월 8일]
1492년(성종 23) 4월 중추부 지사였을 당시 파릉군(坡陵君)윤보(尹甫)와 함께 북경에 가서 황태자 책봉을 하례(賀禮)하게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3년 4월 22일] 이때 중국의 예부(禮部) 낭중(郎中)이운(李雲)이 그의 늠름한 의용(儀容)을 보고서 서반(序班)인 이상(李常)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선의 사신들을 많이 보았지만, 정 재상(鄭宰相) 만큼 뛰어난 인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행인(行人)을 볼 때마다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정괄신도비명」]
그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그의 아버지인 영의정정창손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하였다. 정괄은 그의 관위(官位)가 이미 1품(品)이었지만 몹시 추운 날이나 무더운 날에도 매일 아침마다 찾아가 뵈었고, 잠자리에 들 때에도 문안을 여쭈어 아무 일이 없다고 한 뒤라야 물러 나왔다. 아버지 정창손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정괄은 이조 판서로 재임하였는데, 어느 날 조반(朝班)의 행렬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땅에 쓰러지자 그는 즉시 부친을 등에 업고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눈짓으로 배웅하면서 부러운 눈으로 찬상(贊賞)하였다고 전해진다.[「정괄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에 있고,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정괄신도비명」]
부인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긴(李緊)의 딸이다. 외아들은 정종보이다.[「정괄신도비명」]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대동야승(大東野乘)』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용재총화(慵齋叢話)』
- 『점필재집(佔畢齋集)』
- 『목계일고(木溪逸稿)』
- 『인재집(忍齋集)』
- 『도곡집(陶谷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잡록(海東雜錄)』
- 『허백정집(虛白亭集)』
- 『환재집(瓛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