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당대시(春塘臺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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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창경궁의 춘당대에서 실시한 비정기의 문과와 무과 시험.

개설

춘당대시는 조선시대 창경궁(昌慶宮)의 춘당대(春塘臺)에서 시행하였던 비정기의 문과와 무과 시험으로 16세기 후반에 들어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춘당대문과는 일명 춘당대정시(春塘臺庭試)라고도 불리었는데 일반 정시처럼 한 번의 시험만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였으므로 선발 인원은 수 명 이내로 많지 않았다. 춘당대무과는 관무재의 형태로 치러졌는데 무신들의 활쏘기 시험에서 확대되어 초시와 복시로 이루어졌다. 10여 종의 다양한 무예 중에서 왕의 낙점을 받아 수종의 무예를 시험하였고, 선발 인원도 수십 명에 달하였다. 조선후기 주요 무과의 하나가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춘당대시는 원래 왕이 각 군문의 무사들을 춘당대에 모아 무재(武才)를 시험하던 특별 시험이었다. 조선초기 춘당대에서는 활쏘기 등 각종 무예와 시(詩) 등을 시험 보거나 각종 행사가 치러졌다. 중종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종종 왕이 춘당대에 나아가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거나(『중종실록』 33년 4월 16일), 활쏘기 시험을 치러서 우등한 자에게 물품을 하사하는 등 시상하였다(『중종실록』 22년 9월 16일). 그러나 이때까지는 춘당대에서 문무과가 모두 치러진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중반인 명종대에 들어서면서 왕이 춘당대에 나아가 문신과 무신에게 시험을 보게 하기 시작하였고(『명종실록』 8년 9월 12일), 1572년(선조 5)에 춘당대시가 공식적으로 시행되어 문과에서 심충겸(沈忠謙) 등 15명을 선발하였다(『선조수정실록』 5년 3월 1일). 이를 계기로 춘당대시는 문과와 무과만 시행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내용

춘당대시의 문과는 전정(殿庭)에서 치러졌으므로 ‘춘당대정시’라고 불리었고, 춘당대시 무과는 관무재 형태로 치러졌으므로 ‘춘당대관무재(春塘臺觀武才)’로 불리었다(『효종실록』 4년 4월 7일). 춘당대시 문과는 알성시(謁聖試)와 동일하게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가 아닌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였고, 합격자도 시험 당일 발표하였다. 춘당대시는 과거를 시행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시일이 부족하여 책문(策文)을 시험하기 어려울 정도였다(『숙종실록』 16년 4월 3일). 선발 인원은 때마다 달랐는데, 춘당대문과를 처음 실시한 1572년(선조 5)에는 15명을 뽑았고, 1700년(숙종 26)에는 3명으로 가장 적었다. 조선시대 춘당대문과는 총 34회 설행되었고 선발된 인원은 207명으로 다른 문과 시험에 비하여 상당히 적었다. 시험 과목은 증광 전시의 경우와 같았다.

춘당대무과는 초시와 복시가 치러졌는데, 초시인 관무재 초시는 두 곳으로 나누어 각각 2품 이상의 문관과 무관 각 1명을 시관(試官)으로 임명하여 시험을 보았다. 11가지 무예 과목 중에서 왕의 허락을 받아 4가지 무예 과목을 낙점받아 결정하였다. 5군문과 호위청의 군관 및 유청군(有廳軍), 전현직의 조관(朝官), 무과 출신과 한량 등은 2가지 무예로 뽑고, 5군문과 호위청의 부료군관(付料軍官), 군기시의 별파진 등은 1가지 무예로 뽑았다. 금군은 병조 판서가 시험 보아 선발하되 편추(鞭芻)와 기창교전(騎槍交戰)을 추가하여 모두 6가지 무예로 각 무예를 시험하여 뽑았고 각 군문의 군병은 각각 그 군문에서 조총 및 각 무예로 선발하였다.

춘당대무과 복시인 관무재 복시는 임금이 직접 임석하여 활쏘기를 시험하며 참시관(參試官)은 2품 이상의 문관 1명과 무관 2명을 임명하여 4가지 무예를 시험 보아 뽑았다. 가선대부 이상인 무관, 금군(禁軍) 별장(別將), 호위별장(扈衛別將), 금군장(禁軍將), 오위장(五衛將), 병조의 당상군관, 5군문의 중군(中軍) 이하 여러 장교, 선전관,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 등에게는 모두 초시를 면제하고 복시 응시를 허용하였으며, 4가지 무예를 갖추어 시험하였다. 한량인 합격자는 전시에 곧바로 응시하도록 하고 문과 및 무과 방목인 용호방(龍虎榜)이 갖추어지면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였으며 그다음 성적인 자에 대해서는 논의하여 상을 주었다. 무과 출신 이상이면 유엽전(柳葉箭) 3발을 맞춘 경우에는 4점을 주어 수령이나 변장(邊將)에 임명하고 합격자 중 성적이 우등인 자는 품계를 올려 주고[加資], 그다음 자는 상을 주었다.

변천

춘당대시는 당일로 급제자를 발표하고 상피제(相避制)도 없었기 때문에 시관들의 협잡이 적지 않게 있었고 심지어 부자가 동시에 응시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아울러 급박하게 시험을 치러 시험 관리가 다소 어려워 정해진 시각이 끝나도 시험 응시자들이 어지러이 시험 답안인 시권(試券)을 내던지는 등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숙종실록』 25년 1월 7일). 이에 1744년(영조 20)부터는 부자가 동시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춘당대시무과의 경우에도 응시자가 많아 춘당대와 함께 모화관(慕華館)에 시관을 보내어 시험 보게 하였다(『영조실록』 10년 10월 7일). 응시 인원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합격자도 10명 이내인 문과에 비하여 매우 많은 수십 명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러 폐단이 나타날 가능성이 컸으므로 정조대에 편찬한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는 참시관(參試官) 2명을 더 임명하고 감찰(監察)이 시험을 감독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무과총요(武科總要)』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심승구, 「조선초기 무과제도」, 『북악사론』 1, 1989.
  • 정해은, 「조선후기 무과급제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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