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휘지(崔徽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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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최휘지 |
한글표제 | 최휘지 |
한자표제 | 崔徽之 |
분야 | 교육·언론인/유일,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현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자금(子琴) |
호 | 오주(鰲洲)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8년(선조 38) |
사망 | 1669년(현종 10) 12월 |
본관 | 삭녕(朔寧) |
주거지 | 전라도 남원(南原) |
묘소소재지 | 전라도 구례(求禮) 잔수진(潺水津) |
증조부 | 최영(崔穎) |
조부 | 최상중(崔尙重) |
부 | 최연(崔葕) |
모_외조 | 남원양씨(南原梁氏): 양준우(梁俊遇)의 딸 |
형제 | (동생)최유지(崔攸之) |
처_장인 | (첫째부인)전주이씨(全州李氏): 이유간(李惟侃)의 딸 →(자녀)3남 3녀 (둘째부인)남원양씨(南原梁氏): 양원(梁榞)의 딸 →(자녀)2남 1녀 |
자녀 | (1자)최정옹(崔靜翁) (2자)최서옹(崔瑞翁) (3자)최치옹(崔致翁) (4자)최시옹(崔是翁) (5자)최계옹(崔啓翁) (1녀)이문재(李文載)의 처 (2녀)노형명(盧亨命)의 처 (3녀)김석(金晳)의 처 |
저술문집 | 『오주집(鰲洲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최휘지(崔徽之) |
총론
[1598년(선조 38)∼1669년(현종 10) = 72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은일(隱逸). 노장(老莊)의 풍치를 즐긴 풍류 시인이다. 행직(行職)은 공조 좌랑(佐郞)이다.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洲)이다. 본관은 삭녕(朔寧)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남원(南原)이다. 증조부는 좌승지에 추증된 최영(崔穎)이고, 조부는 사간(司諫)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된 미능재(未能齋)최상중(崔尙重)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최연(崔葕)이고, 어머니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주부(主簿)양준우(梁俊遇)의 딸이다. 승지(承旨) 최온(崔蕴)의 조카이고, 사간원(司諫院) 사간최유지(崔攸之)의 형이다.
인조 시대 활동
14세 때 서당의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하고, 15세 때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남원 지방에서 날로 높아졌다. 그러나, 광해군 시대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과거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이듬해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사마방목』)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서 집에 들어앉아 성리학을 공부하고 몸을 수행(修行)하니, 남원부사(南原府使)민광훈(閔光勳)이 그 올바른 품행에 감복하여, 그를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리하여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한 지 얼마 아니되어 사임하고 돌아왔다. 또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었는데(『청음집(淸陰集)』권 34 참고) 물자를 절약하며 봉공(奉公)하니 역졸(驛卒)들이 그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그의 혜택을 칭송하였다.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계부(季父) 최온(崔蘊)과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군사를 이끌고 청주(淸州)와 과천(果川)으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청(淸)나라 군사와 싸워보기도 전에,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버티다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무릎을 꿇고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북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그는 오로지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 5월 효종은 즉위하자 청나라를 정벌할 북벌(北伐) 계획을 수립하고,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등으로 하여금 훌륭한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다. 1659년(효종 10) 대신과 유현(儒賢)이 서로 그를 추천하여, 마침내 6품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그는 한번 분수와 의리를 세상에 펴려고 용기를 내어서 부임하였으나, 직위에 있은 지 겨우 20일 만에 곧 병을 핑계하고 사임하였다. 그는 초자(超資)되어 갑자기 중책을 맡았는데, 일을 처리하는 경험이 부족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그 짧은 시간에도 공조의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였다. 공조에서 큰 공사를 시작하면, 여러 고을에 비용을 나누어 부담시키는데, 고을에서 수송한 장인(匠人)의 포전(布錢)을 계산할 때 장포(匠布)의 척도가 지나치게 긴 것을 보고, 공조 판서에게 바르게 척도를 정할 것을 건의하여, 한결같이 3척(尺)을 기준으로 삼고, 그 나머지 포목을 계산하여 돌려보내니, 지방의 여러 고을에서 경탄하며 전에 없던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그 뒤에 다시 활인서(活人署)별제(別提)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문곡집(文谷集)』 권 18 「익위 최공휘지 묘갈명(翊衛崔公徽之墓碣銘)」 참고. 이하 「묘갈명」약칭.) 그는 고향 남원으로 내려와서 자취를 감추고, 서울에 가지 않은 지 20여 년이었다. 그러나 1659년 5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서울로 달려가서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통곡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559년(현종 즉위) 11월 이조에서 송준길의 추천을 받아서, 전 좌랑최휘지와 전 교리이수인(李壽仁), 사업(司業)윤선거(尹宣擧), 전 좌랑신석번(申碩蕃) 등을 국장도감(國葬都監)에 직책을 맡겼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권37 참고.) 그 뒤에 고향 남원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1666년(현종 7) 세자(世子: 숙종)의 요속(僚屬)을 선발할 때, 최휘지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부솔(副率)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2년 뒤 1668년(현종 9) 현종이 시종(侍從)하는 근신(近臣)들의 나이 많은 부모들을 추은(推恩)하였는데 포함되었다. 그 아들 최치옹(崔致翁)이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라에서 남원에 있는 71세의 최휘지에게 미두(米豆)를 넉넉히 내려주었는데, 그는 나라의 특별한 대우에 감격하여 밥을 지어서 가묘(家廟)에 올리고, 또 이웃 사람들에 미곡을 나누어 주니, 모두 한때의 영광이라고 부러워하였다.(「묘갈명」 참고.)
1669년(현종 10) 12월 노병(老兵)으로 남원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2세였다. 죽음에 임해서 붓을 찾아서, 운어(韻語)를 손수 쓰기를, “일음(一陰)·일양(一陽)은 하나의 낮과 밤, 왕래하면서 사라졌다가 생기고 찼다가는 이지러진다. 부생(浮生)은 본래 돌아갈 곳이 있는 법, 일흔이 넘은 나이인데, 어찌 슬퍼할 것인가?” 하였는데, 점이나 획 하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묘갈명」 참고.) 그의 시문은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고 풍류적이라고 칭송하지만,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기교(技巧)에 넘친다고 비판한다.
문집으로 『오주집(鰲洲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최휘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묘갈명」 참고.) 그는 사람됨이 겉은 따뜻하고 공손하였으나, 안은 지조를 굳게 지키고 가식(假飾)이 없어서 자연스레 허물이 적었다. 자기 몸을 신칙(申飭)하고 집안을 다스리고 자제를 가르치고 노비를 부리는 데에 있어서, 모두 법도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화평(和平)하여 모난 언행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의(義)와 이(利), 선(善)과 악(惡)을 구별할 때에는 너무나 의연하여 아무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의 숙부 승지최온은 냉철하여 남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일찍이 그 조카를 칭찬하기를, “내 조카는 실로 나의 스승이다.” 하였다. 천성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길 때 온화한 몸가짐으로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부모가 병이 났을 때 약이나 미음을 손수 끓이고 남에게 시키지 않았다. 부모의 상사(喪事)에는 모두 여묘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 자기 집 중문(中門)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숙부 최온을 아버지처럼 섬기고, 여러 고모를 어머니처럼 섬겼으며, 친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곤궁한 8촌 이내의 친척을 데리고 한 집에 살았던 적도 있었다.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 때에는 삼가고 반드시 정성을 기울였다. 그 장인과 장모의 상을 당하여 기년(朞年)을 끝마칠 때까지 밖에서 거처하고 내실(內室)에 들어가지 않아서, 부인으로 하여금 슬픔을 다할 수 있게 하였는데, 예를 아는 자들도 이렇게까지 하기는 어렵다고 탄복하였다.
그는 분잡하거나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성색(聲色) 따위에는 일체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일찍이 구례(求禮)의 오산(鰲山)에 대나무를 얽어서 집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자라가 사는 땅’이라고 하여 ‘오주(鰲洲)’라고 호를 지었다. 또 막내아우 사간최유지와 함께 남원 지역의 사우(士友)들과 ‘구로회(九老會)’를 조직하고, 중국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세속(世俗)을 도피한 노장(老莊)의 풍치(風致)를 본 따서, 시문(詩文)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그는 비록 산 속에서 은둔하여 살았으나, 항상 이야기가 세상의 혼란한 정치에 미치면 분연히 눈물을 흘렸으며, 현종의 원자(元子: 숙종)가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시(詩)를 읊기도 하였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도연명처럼 정말 세상의 일을 아주 잊고 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구례 잔수진(潺水津)의 언덕에 있는데, 첫째부인 이씨(李氏)와 합장하였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문곡집(文谷集)』 권 18 「익위 최공휘지 묘갈명(翊衛崔公徽之墓碣銘)」) 전라도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과 노봉서원(露峯書院)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4 참고.)
첫째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이유간(李惟侃)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최정옹(崔靜翁)은 봉직랑(奉直郞)이고, 3남 최치옹(崔致翁)은 문과 출신으로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둘째부인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좌랑양원(梁榞)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4남 최시옹(崔是翁)은 통덕랑(通德郞)이고, 5남 최계옹(崔啓翁)은 문과 출신으로 목사(牧使)를 지냈다.
참고문헌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오주집(鰲洲集)』
- 『문곡집(文谷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백헌집(白軒集)』
- 『백주집(白洲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명재유고(明齋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