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질(柳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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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5년(선조 8)∼1637년(인조 16) =63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지냈고, 증직(贈職)은 이조 참판이다. 자(字)는 자상(子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광주(廣州)와 서울이다. 아버지는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유영성(柳永成)이고, 어머니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강섬(姜暹)의 딸이다.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의 7촌 조카이고, 전라도 관찰사유색(柳穡)의 6촌 동생이다. 전주 유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질은 시조 유습의 10대손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606년(선조 39)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급제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32세였다.[『방목』]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던 중에,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니,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 정인홍(鄭仁弘) 등이 정권을 잡고 소북(小北)의 유영경 등을 숙청하였다. 이때 그의 8촌 형제인 유영경의 아들 유열(柳悅) · 유업(柳澲) · 유제(柳悌)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리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대북의 정인홍 ·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지하려고 ‘정청(庭請)’을 전개하자, 그는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여, 1621년(광해군 13) 성균관 유생(儒生)들과 같이 상소(上疏)하여, 모후(母后) 곧 인목대비를 폐출시키자는 의논을 주장하는 자들을 참수(斬首)하라고 청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는 소두(疏頭) 이외에는 처벌하지 않으므로 유질은 무사하였는데, 당시 여론이 이를 옳다고 칭찬하였다.[『택당집(澤堂集)』 별집(別集) 권7 「증 이조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贈吏曹參判行鐵原府使 柳公墓碣銘)」]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西人)이 집권하고 대북이 숙청되자, 그해 특별히 실시된 알성 문과(謁聖文科)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9세였다.[『방목』] 성균관에 들어가서 박사(博士)가 되어 유생(儒生)을 가르쳤고, 봉상시(奉常寺)직장(直長) · 양현고(養賢庫) 직장을 거쳐, 1624년(인조 2)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얼마 안 되어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贈參判行鐵原府使柳公墓碣銘)」] 1625년(인조 3) 병조 좌랑(佐郞)을 거쳐서, 외방으로 나가서 전라도 도사(全羅道都司)가 되었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1626년(인조 4)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으며, 호조 정랑으로 옮겼는데, 그때 그는 종3품상 중직대부(中直大夫)로서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4년 4월 24일]

얼마 안 되어 외방으로 나가서 평양 서윤(平壤庶尹)이 되었는데, 1627년(인조 3)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후금(後金)의 베이러[貝勒]아민(阿敏)이 3만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의주(義州)와 안주(安州)를 점령한 다음에 평양을 공격하였다. 평양성이 무너지자, 서윤유질은 끝내 경내(境內)의 땅을 떠나지 않고 흩어진 군졸들을 규합하여 전열(戰列)을 정비하여 후금 군사와 싸우는 한편, 창고의 곡식을 수습하여 치벽도(峙碧島) 보산(甫山)으로 수송하였다. 그때 난리를 피해서 섬으로 도망쳐오는 평안도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는데, 그는 곡식으로 피난민을 구제하였으므로, 봉명 사신(奉命使臣)들이 유질의 난민(亂民)을 구제한 공적을 보고하자, 인조가 유질을 승품(陞品)하여 승진시키도록 명하였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1628년(인조 6)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고 평안도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승진되었는데[『승정원일기』인조 6년 2월 29일] 1631년(인조 9) 병으로 성천 부사를 사임하고 고향 광주(廣州)로 돌아왔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1632년(인조 10) 군기시(軍器寺)첨정(僉正)에 임명되어, 곧 군기시 정(正)으로 승진되었다. 1633년(인조 11)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과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 그해 가을 내섬시(內贍寺) 정을 거쳐서 봉상시(奉常寺) 정에 임명되었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1634년(인조 12) 인조가 생부인 원종(元宗)을 종묘(宗廟)부묘(祔廟)할 때 유질은 전사관(典祀官)으로서 의례를 도왔다고 하여, 인조가 아마(兒馬) 1필을 하사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2년 윤8월 21일]

1636년(인조 14)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되어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실권을 잡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 일파에 의하여 바로 교체되었다. 그해 겨울 철원부사에 임명되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태종(太宗)홍타지가 10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의주 · 평양을 피하여 바로 남하하여 3일만에 경기도에 접근하였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인조는 강화도(江華島)로 피난 가다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다. 인조 일행은 청 태종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45일 동안 싸우다가, 1637년(인조 15)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였다. 그 사이 청나라 군사들이 각도에서 임금을 구원하려고 오던 근왕병(勤王兵) 중에서 평안도 군사를 포위 공격하자, 평안도 군사들이 정예병을 투입하여 서북로를 통하여 탈출하려고 하였으므로, 서북로의 요충지 철원이 오랑캐 선봉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때 철원의 서리와 백성들이 철원 부사유질에게, 철원의 치소(治所) 안에 있는 보개산(寶蓋山)으로 도피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철원부사유질은 단호히 거절하고, 군민(軍民)을 독려하여 철원성을 지키다가, 1637년(인조 15) 1월 16일 성이 함락되어 청나라 군사의 칼날에 참살당하니, 향년이 63세였다.

두 차례 호란과 철원부사 유질의 순절

1627년(인조 3)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유질은 평양 서윤으로 있었다. 후금의 베이러아민이 3만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서 대거 침략해 들어와서 의주를 점령하고 안주를 공격한 다음에 평양성[箕城]을 압박하였다. 평양성의 군민들이 싸우지도 않고 흩어졌으며, 평안도 병사(兵使)도 달아났으므로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평양 서윤유질은 끝내 경내(境內)의 땅을 떠나지 않고 흩어진 군졸들을 규합하여 간혹 낙오된 적병(賊兵)들을 사로잡는 한편, 또 창고의 곡식을 수습하여 치벽도 보산으로 수송한 다음에 관가의 비장(裨將) 중에 용감하고도 믿을 수 있는 자를 선택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난리를 피해서 평안도 백성들이 섬으로 도망하였다가, 먹을 것을 찾아서 남녀들이 잇따라 이곳으로 폭주해 와서 구제하여 주기를 바랐으므로, 유질이 대부분의 난민들을 모두 진휼하였다. 그는 빨리 달리는 소선(小船) 몇 척에다 곡식을 싣고 섬 가운데로 들어가서 미죽(糜粥)을 만들어 굶주리는 피난민들을 구제하여, 그가 살려낸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므로, 평안도 지방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기를, “유질이 아니었더라면 서북 지방 백성들의 종자(種子)가 없어졌을 것이다.” 하였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10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의주성 · 평양성을 공격하지 않고 바로 남하하여 3일만에 경기도에 접근하였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그때 유질은 철원 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가려고 서울을 떠나는 날, 유질이 하직 인사를 드리고 임지로 갔다. 철원은 서북로의 요충지에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군사의 선봉대가 먼저 철원을 공격하여 왔다. 철원의 이민(吏民)들이 다투어 와서 철원 부사유질에게 말하기를, “보개산이 철원의 치소 안에 있는데, 매우 험악하여 도피할 만합니다.” 하였으나, 유질은 말하기를, “내가 봉강(封疆)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어찌 감히 도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철원은 워낙 작은 고을이어서 성을 방어할 만한 병력이 없었으나, 유질은 관아를 떠나지 않고 군민들을 단속하면서 기계(器械)를 마련하고 양향(糧餉)과 비축하여, 청나라의 대군(大軍)을 맞이하여 싸우려고 마음먹었다. 청나라 군사가 철원성으로 육박해 들어오자, 그는 관아 동쪽 10리 지점으로 나가보았는데, 청나라 기병이 온 지역에 가득 깔려 있는 것을 보고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질은 관아로 돌아와서 관인(官印)과 부절(符節)을 작은 주머니 속에 넣어서 자신의 몸에 차고, 주위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고 타이르기를, “나는 여기에서 죽을 것이니, 그대들은 각자 흩어져 오랑캐를 피해서 친족들을 따라가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뒤에 바로 성이 함락되어 유질은 청나라 군사에게 붙잡히고 말았는데,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떨쳐 일어나서 오랑캐를 꾸짖고 욕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청나라 군사들이 물러가자, 가인(家人)들이 그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그의 몸에 인장들이 매달려 있었으며, 관(官)의 비장 1인과 관노(官奴) 1인과 가동(家僮) 1인도 그 곁에서 함께 죽어 있었다. 그해 9월 경기도 광주 고을 초월리(草月里) 동북쪽 산기슭에 귀장(歸葬)하여 부인과 같은 묘역에 안장(安葬)되었다. 그 뒤에 사건이 보고되자, 인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서, 특별히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이조 참판 겸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에 증직하였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예조 판서이식(李植)은 「유질의 묘갈명」에서 “나라에서 두 번이나 호란(胡亂)을 겪는 동안에, 강역(疆域)을 지키는 관리들은 거의 대부분 먼저 싸움에서 빠져나가 자기 목숨을 건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므로 오랑캐들이 가능하면 우리의 관리들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하다가 관리를 잡기라도 하면 반드시 목숨을 살려 주어 항복을 받아 내려고 하였다. 그런 관계로 오랑캐의 화를 일부러 돋우어 칼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해를 당한 적이 없었다. 간혹 관리 중에서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유질이 죽음을 결행(決行)한 이 한 가지 일이야말로 더욱 역사적으로 밝게 빛나야 마땅할 쾌거(快擧)가 아니겠는가?” 하였다.(『택당집』 별집 권7 「증 이조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참고.) 형조 판서조경(趙絅)도 「유질의 묘갈명」에서 “<병자호란> 때 나라의 큰 주(州) · 군(郡)의 관직을 오랫동안 맡았던 수령관들이 오랑캐 군사를 보고는 두려워서 몸을 피하여 곧 가족을 데리고 수풀 속에 몰래 숨어서 자기 한 몸의 목숨을 유지하고, 처자를 보존하였는데, 오로지 철원 부사유질만은 자기가 다스리는 치소(治所)를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고, 끝내 오랑캐 군사들을 꾸짖다가 굴복하지 않고 죽었으니, 어찌 열렬(烈烈)한 남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성품과 일화

유질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용모는 단정하고 온화하며, 성품이 강직하고 민첩하였다. 몸가짐이 침착하고 우아하여 번잡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어릴 때부터 글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짓기를 아주 잘 하자, 외조부 도승지(都承旨)강섬이 그를 기특하게 여기고 끔찍하게 아끼면서, “이 아이는 우리 집의 외손자[宅相]다.”라고 자랑하였다. 자라면서 학업에 전심하여 여러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에도 혼자 공부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겼다. 유질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화복(禍福)이나 자기의 이해 관계 때문에 결심한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후일에 큰 충절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택당집』 별집 권7 「증 이조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유질은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여묘살이하면서 건강을 해칠 정도로 슬퍼하였고, 일찍 죽은 형들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기르면서 한결같이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그러므로, 친구들과 친족들이 모두 그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하였다. 그는 가난해도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조용히 자기 생활에 만족하면서 화려한 관직을 얻기 위해 남에게 청탁하는 일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예조 판서이식(李植)은 「유질의 묘갈명」에서 그를 평하기를, “이처럼 행동거지나 처신하는 것이 모두 그 자신의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므로,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자신의 절조(節操)를 바꾸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개 그가 평소 유교의 정도(正道)로써 자신의 몸을 닦아왔기 때문이라 할 것이니, 유질이야 말로 열장부(烈丈夫)라 하겠다.” 하였다.(『택당집』 별집 권7 「증 이조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참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원 사간(司諫)조경이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당시 실권을 잡은 주화파 최명길 일파에 의하여 철원부사로 좌천되었는데, 조경은 부임하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하향(下鄕)하였다. 이리하여 유질이 대신 철원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유질은 아무런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철원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형조 판서조경은 「유질의 묘갈명」에서 그를 평하기를, “유질이 처음에 철원 부사에 임명되었을 때에 오랑캐들이 이미 우리나라의 절반을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철원은 적과 싸우는 요충지에 해당하였으므로, 유질은 본래 문신(文臣)인데다가 나이도 60여 세가 넘었기 때문에 그가 진실로 벼슬을 사양하였더라면 관직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털끝만큼도 난색의 기미(幾微)를 보이지 않고 마치 즐거운 땅에 달려가는 것처럼 위험한 지역에 부임하여 갔으니, 나라를 위해 한번 죽기를 각오한 것이 본래 그 마음에 정해진 자가 아니었다면 능히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초월리(草月里)에 있는데, 택당(澤堂)이식(李植)이 지은 묘갈명과 용주(龍洲)조경(趙絅)이 지은 묘갈명이 그들의 문집에 각각 남아 있다.[『택당집(澤堂集)』 별집(別集) 권7 「증 이조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贈吏曹參判行鐵原府使 柳公墓碣銘)」, 『용주유고(龍洲遺稿)』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贈參判行鐵原府使柳公墓碣銘)」] 두 묘갈명을 비교하면, 유질의 조상과 가족, 관력은 행장(行狀)을 보고 썼으므로 서로 비슷하나, 지은이와 고인(故人)과의 관계, 고인에 대한 평가와 내용은 다르다.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참의(參議)한수민(韓壽民)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유덕창(柳德昌)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예를 지냈고, 차남 유준창(柳俊昌)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고, 딸은 기송(奇松)에게 출가하였다.[『용주유고』 권17 「증 참판 행 철원부사 유공 묘갈명」] 여러 명의 손자 중에서 유면(柳冕)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고, 유경(柳炅)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고, 유만(柳曼)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다.[『전주 유씨 족보(全州柳氏族譜)』]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택당집(澤堂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속잡록(續雜錄)』
  • 『전주 유씨 족보(全州柳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