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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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11월 6일 (일) 17:51 판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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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대를 건너 이어지는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

1911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고 고향을 떠난 서일 총재가 두만강을 건너 처음 만난 사람이 봉오동을 무장독립군 기지로 건설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처음 만난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는 서로의 의기를 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무장투쟁을 결의하였다. 서일총재는 최운산 장군이 내어준 덕원리, 즉 서대파에 머물며 학교를 열었고, 서대파를 근거지로 대종교인들을 이끌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서대파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 깊은 인연의 조부들을 가슴에 간직한 채 서로의 존재를 모르던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와 서일 총재의 손자 서만섭이 한 대를 건너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어 만났다. 최운산 장군의 아들 최봉우는 1.4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와 자리 잡았고, 서일 총재의 아들 서윤제는 하얼빈에서 살았다. 중국과 수교 이후 하얼빈에 살던 서윤제의 아들 서만섭이 한국에 나와 정착했다. 얼마 전에야 서일의 손자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그가 살고 있는 인천으로 그를 찾아갔다.

서만섭 씨는 올해 94세다. 두 할아버지의 역사를 아는 그는 최운산의 손녀가 온다니 문밖에 나와 기다리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타깝게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필담으로만 대화했지만 아직은 기억력도 좋고 대화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노년의 그는 마음이 급했다. 북로군정서의 창설자 서일 총재의 역사가 부하인 김좌진 장군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할아버지 서일 총재와 북로군정서의 역사를 바로잡고 싶다고 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역사를 기억하고 제대로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동안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에 가려져 있는 선조들의 무장투쟁사를 찾아가고 있던 두 집안의 후손이 우연히 그 길에서 함께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그를 만나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의 관계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을 더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서일의 직계 후손인 그가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가 손잡고 북로군정서를 창설했다는 내용을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봉오동 신한촌을 건설하고 1912년 창설된 봉오동사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던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으로 모여든 애국청년들을 독립군으로 훈련하기 위해서 1915년 봉오동 숲의 나무를 벌목해 연병장을 건설한 뒤 잘라낸 나무로 대형 막사를 짓고 본부 둘레에 성채를 쌓아 군사기지를 건설하며 봉오동을 요새화 했다.

1919년 3.1독립만세시위 이후 수많은 청년들이 북간도로 넘어왔다. 1915년 대형 막사를 건설했으나 지원자들이 너무 많아 봉오동사관학교의 수용 인원이 넘어섰다. 본격적으로 일본군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최운산 장군은 자신을 버리고 독립군이 되고자 전국에서 모여온 귀한 청년들을 모두 정예독립군으로 키워내기로 결정하고 봉오동 가까운 곳에 새 부대를 창설했다. 대종교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서일과 최운산은 서대파를 또 하나의 독립군기지로 만들었다.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 서대파를 주둔지로 내어놓고 그곳으로 모여온 애국청년들에게 숙식과 군복을 제공하는 동시에 군자금을 마련해 무기를 구입했다. 당시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귀국길에 올랐던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톡에 주둔하고 있었다. 최운산 장군은 무기가 필요 없어진 체코군으로부터 대량의 신형 무기를 구입해 봉오동으로 가져왔다.

3.1혁명 후 대부분의 독립군 단체에 병사들이 늘어났지만 모두 군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최운산은 여러 단체에 주둔지와 무기, 군자금를 제공하고 통합을 제안하였고, 대한민국 독립군은 봉오동에서 "대한북로독군부"로 대통합을 이루게 된다. 서대파를 비롯해 봉오동 산을 따라 연결되는 대감자 등에 대한광복단, 신민단 등 여러 독립군부대가 각각 주둔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력을 갖춘 부대가 본부의 주력부대 대한군무도독부였고 또 하나 최운산 장군이 서일 총재와 함께 창설한 북로군정서였다. 통합과 동시에 훈련이 안 된 젊은이들을 모두 독립군으로 양성하기 위해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도 창설했다.

손녀인 나는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의 증언과 기록으로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이 거대한 재산을 북로군정서 창설에 투여한 사실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과 북로군정서의 관계를 설명하는 사료가 부족해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재조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언제 어디서 사료가 나와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가 재정립 될지 모르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서일 총재의 후손을 만나게 되면 북로군정서 창설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만을 품고 있었는데 정말 그랬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1911년 서일 총재가 무장투쟁을 꿈꾸며 친구 현천묵의 가족과 함께 북간도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최운산 장군 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두만강을 건너 얼마 지났을 때 웬 장정들이 나타나 일행을 어디론가 데려갔다고 한다. 강도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덩치도 크고 위압감을 느낄 만큼 힘센 무인처럼 보이는 이들이었다.

밀정들이 암약하고 있으니 봉오동 주변에서는 외지인에 대한 검색이 철저했다. 가져간 짐을 모두 살펴본 그들은 잠시 후 서일을 최진동 최운산 형제 앞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서 고향 친구 안무를 만났다.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자신보다 먼저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건너갔던 안무가 최운산 형제와 함께 무언가를 논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 안무의 보증으로 서일에 대한 의심을 풀고 그들의 역량과 인품을 알아본 최운산 장군이 즉시 서대파에 서일과 현천묵 가족의 거주지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을 그 후손들도 가족사를 통해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일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을 확인한 최운산 장군은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그를 붙들었고, 그 자리에서 편지를 하나 써주며 덕원리로 보내주었다. 그곳이 바로 서대파다. 자신의 소유지 덕원리의 관리인에게 서일의 가족을 보내니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보살피라는 내용이었다. 서대파는 훗날 최운산과 서일이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한 지역이다. 서일 총재가 1911년부터 대종교인들을 이끌며 었던 곳이라 무장독립군부대 북로군정서의 주둔지로 서대파를 선택했고 서대파에서 가까운 십리평이 사관연성소 자리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최운산 장군의 집에서 친구 안무를 만난 서일과 현천묵이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최진동 최운산 형제와 대화를 하던 때 마침 최 장군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인 상인처럼 보이는 그들은 최운산 장군이 무기를 구입하러 러시아로 보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최 장군에게 무기구입 상황에 대한 보고를 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던 것이다. 나중에 최운산 장군이 서일에게 봉오동에서 무장군인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봉오동사관학교 창설을 위해 무기 구입하고 있음을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평생 동지로 다져졌고 후일 북로군정서를 창설할 때 최운산 장군이 막대한 재산을 처분해 군자금으로 내어놓을 만큼 서일 총재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서일 총재의 후손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110년의 세월을 건너온 깊은 인연의 열쇠로 역사의 매듭 한 가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운산 장군의 손녀와 서일 총재의 손자가 110년 전의 선조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북간도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로 알리라고 후손들을 불러내신 두 분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후손인 우리가 가족사를 통해 알고 있는 것을 함께 모아서 정리해 나가기로 다짐도 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북간도 무장독립전쟁의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애쓰는 서일 총재의 손자 서만섭 씨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야겠다.

넘어야 할 산도 많고 건너야 할 강도 여럿이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이다. 잊지 않고 있으면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스스로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서일(徐一) 총재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대한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 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계

부인 : 채씨

장녀 : 서모(徐模, 1902~?)

차녀 : 서죽청(徐竹淸, 1906~?)

사위 : 최관(1900~?)

아들 : 서윤제(1908~1969) 독립운동가

자부 : 권씨(1907~1931)

손자 : 서경섭(徐敬燮, 1925~2008)

손자 : 서만섭(徐萬燮, 1930)

가족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회삼경(會三經)

백포 서일(徐一) 종사 저서(白圃宗師著)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위치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먼우금로 251번길 27, 201호

법인은 일제하 이국 만리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순국선열유족과 더불어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대를 건너 이어지는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

1911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고 고향을 떠난 서일 총재가 두만강을 건너 처음 만난 사람이 봉오동을 무장독립군 기지로 건설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처음 만난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는 서로의 의기를 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무장투쟁을 결의하였다. 서일총재는 최운산 장군이 내어준 덕원리, 즉 서대파에 머물며 학교를 열었고, 서대파를 근거지로 대종교인들을 이끌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서대파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 서영승씨 “독립지사 후손답게 고국 위해 봉사”

“선조의 항일·희생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서영승씨(인천시 연수구)는 2대째 독립지사 가문의 후손이다. 서영승씨의 아버지인 서희우씨부터 서만섭, 서일 총재까지 이어지는 가계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평탄치 않은 가정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