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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택(徐潤澤) 육군소장 공병감. 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강호문중 | 서윤택(徐潤澤) 육군소장 공병감. 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강호문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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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 정'가문의 병역 스토리는 병역 1대의 故 '서 윤택' 장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병역 1대의 故 '서 윤택' 장군은 48년 서울대 문리대 졸업 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육사 7기 후반으로 수료 후 육군 중위로 임관하였습니다. 1949년 1월 공병학교 군수처장으로 근무하셨으며, 1950년 1월부터 육군 보병 제2사단 공병대대장으로 근무 중 6,25를 맞았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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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병역 1대의 故 '서 윤택' 장군은 6,25동란중 전시에 시급한 공병간부 및 장교의 육성을 위하여 50년 9월 경상북도 경산군 고산면에 위치한 고산초등학교(현, 대구고산초등학교)에서 301 공병교육대를 창설하셨습니다. 교육대장으로서 51년 3월까지 전시에 화급한 전투공병의 양성에 힘쓰셨으며 인근주민과의 유대강화에 남다른 노력을 하시어 고산초등학교 산등성이에 아직도 그 기념 공덕비가 남아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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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년 3월부터는 경남김해로 이전하여 재편된 공병학교의 제 3대 교장(중령)으로 취임하시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이 요구되던 전시 전투 및 건설공병인력의 양성과 충원에 힘쓰셨습니다. 6,25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52년 3월부터 53년 4월까지 최전방 동부전선 속초의 1101야전공병 단장(중령)으로 전시공병을 지휘하셨으며 이후 미국의 육군공병학교에서 고등군사반을 수료하셨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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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3년 12월부터 57년 8월까지 5년간 제5대 공병학교장을 역임하시면서 전후 대한민국 공병의 초석을 다지며 교육장병들과 신병훈련병들의 급식과 주거의 해결, 다양한 실습교육과 교재의 제작등 오늘날 육군공병의 기반을 다진 정예공병과 인재육성의 공덕자로 군문의 후배들이 모두 인정을 하였습니다. 또한 공사가 분명하며 간결한 언행으로 모든 것을 직접 몸소 행하시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시는 강직한 성품으로 말보다는 직접 실천하고 행하는 지휘관의 전형이라 하실 만한 모습으로 부하들의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셨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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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히 전후 부족한 국고의 한계로 인해 국고의 지원 없이 김해 공병학교의 자체 인력과 기술력만으로 공병학교 장병 6천명이 수용 가능한 부대숙소를 자체 건설하였으며, 약 120만평 광활한 부지에 경비행장, 교육장 및 각 전투병과를 목적별로 지원할 수 있는 교육장 등을 구축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육군공병학교의 교재를 참고로 하여 한국 현실에 맞는 전투공병 교재를 완비하여 군 전력강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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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전후 공병학교의 역할은 미 군사민간지원에 의한 사업들도 활발히 수행하여 김해보건후생병원의 건립, 김해여자고등학교 건립 및 각 면 단위의 초등학교를 신, 개축 해 줌으로서 군의 지역사회 지원과 봉사에 앞장 섬으로서 지역사회와 주민들로부터 많은 찬사와 감사가 따랐습니다. 58년 2월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60년 5월까지 육군공병차감으로 근무하셨으며, 60년 10월부터 63년 10월까지 3년간 육군공병감으로 재직하시며 건설분야중 특히 건축, 토목분야의 인재양성과 기술향상을 위해 집중투자를 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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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공정하고 엄정한 인사를 통해 공병병과의 전력증강에 기여하였으며 공병병과의 우수인력확충을 위해 보병, 포병, 기갑등의 타 전투병과와의 인력조정에 앞장서 공병병과가 기술병과에서 전투병과로 전환되는 문제의 기본을 만들어 병과발전의 기초를 닦는 공헌을 이루셨습니다. 62년 4월 육군소장으로 진급후 63년 10월 육군소장으로 퇴임하셨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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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님은 3남1녀의 가장으로서 원칙주의자이시며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되며 선행을 해도 자랑하지 말 것을 늘 당부하셨습니다. 원칙에 어긋나는 특혜나 특권을 기대하지도 말고 원칙대로 세상을 살도록 늘 말씀하셨기에 자식들에게 원칙주의이자 때로는 고지식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평소 부친이 가지고 계셨던 자식들에 대한 군복무에 대한 생각과 부친의 성품과 소신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예외 없이 군복무를 알아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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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병역 2대에 걸친 3형제(서기,서립,서정)모두 대학 재학중 또는 졸업후 군복무에 있어서는 사소한 혜택이나 편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당연히 군복무는 자기가 알아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장남인 큰형(서기)이 현역병으로 5사단에 입영하여 당시 많은 고생을 하여 동생들에게는 기왕 군대 생할을 한다면 조직에서 리더쉽도 키울 수 있고 인내심과 보다 큰 책임감을 느끼고 성장할수 있는 장교로 가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조언에 따라 형(서립)과 저(서정)은 대학 재학중 ROTC를 지원하여 각기 논산훈련소 신병훈련소 훈육관으로 또 1사단 15연대 전방소대장과 연락장교로 군복무를 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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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역3대의 서원 군은 육군항공병과에 지원하여 항공작전 사령부 예하 11항공단 근무중 아프가니스탄 해외파병을 자원하여 12년 5월부터 12년 12월까지 오시노부대에 파견되어 아프가니스탄 현지 바그람기지에 육군 항공관제병으로로 근무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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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 정'님은 부모로서 아들이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지원하였을 때 젊어서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아들의 얘기에 잠시 걱정도 들었지만 본인이 희망한다면 가지 말라고 막을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님으로부터 배운 아들 키우는 방식이기도 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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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병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했을 때 아들로 부터 들은 이야기인즉슨 파병출국 전날 부대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머리카락과 솝톱을 잘라 비닐봉지에 담아 제출할 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제 남자로서 겪어보기 어려운 곳에 간다는 실감과 더불어 남자로서 군인으로서 남다른 감정과 느낌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세상 젊은이에 비해 어린 아들이지만 바른 생각과 정신으로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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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역 2대 '서 정': 최근 많은 매체에서 힘있고 돈있고 권력 가진 사람은 마치 군대를 안가는 것처럼 얘기하기도 하지만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고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발휘할 때 사회계층간 대립도 최소화 될 것이고, 사회 지도층일수록 국민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더욱 철저해야 일반 시민들의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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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이 6,25전쟁에서 전사했던 사실이나 모택동의 아들이 전사했지만 시신수습을 포기했던 일화를 떠올려보면 우리나라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작은 병역의 의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부와 힘을 이용하여 본인, 자식들이나 친인척의 병역의무를 면탈하는 것은 사회적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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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 수호를 위해 이바지하신 병역 1대 故 서 윤택 장군님, 병역 2대 서 기, 서 립, 서 정, 병역 3대 서 원 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
2024년 9월 11일 (수) 13:44 기준 최신판
서윤택(徐潤澤) 육군소장 공병감. 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강호문중
서 정'가문의 병역 스토리는 병역 1대의 故 '서 윤택' 장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병역 1대의 故 '서 윤택' 장군은 48년 서울대 문리대 졸업 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육사 7기 후반으로 수료 후 육군 중위로 임관하였습니다. 1949년 1월 공병학교 군수처장으로 근무하셨으며, 1950년 1월부터 육군 보병 제2사단 공병대대장으로 근무 중 6,25를 맞았습니다.
또한 병역 1대의 故 '서 윤택' 장군은 6,25동란중 전시에 시급한 공병간부 및 장교의 육성을 위하여 50년 9월 경상북도 경산군 고산면에 위치한 고산초등학교(현, 대구고산초등학교)에서 301 공병교육대를 창설하셨습니다. 교육대장으로서 51년 3월까지 전시에 화급한 전투공병의 양성에 힘쓰셨으며 인근주민과의 유대강화에 남다른 노력을 하시어 고산초등학교 산등성이에 아직도 그 기념 공덕비가 남아있습니다.
51년 3월부터는 경남김해로 이전하여 재편된 공병학교의 제 3대 교장(중령)으로 취임하시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이 요구되던 전시 전투 및 건설공병인력의 양성과 충원에 힘쓰셨습니다. 6,25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52년 3월부터 53년 4월까지 최전방 동부전선 속초의 1101야전공병 단장(중령)으로 전시공병을 지휘하셨으며 이후 미국의 육군공병학교에서 고등군사반을 수료하셨습니다.
53년 12월부터 57년 8월까지 5년간 제5대 공병학교장을 역임하시면서 전후 대한민국 공병의 초석을 다지며 교육장병들과 신병훈련병들의 급식과 주거의 해결, 다양한 실습교육과 교재의 제작등 오늘날 육군공병의 기반을 다진 정예공병과 인재육성의 공덕자로 군문의 후배들이 모두 인정을 하였습니다. 또한 공사가 분명하며 간결한 언행으로 모든 것을 직접 몸소 행하시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시는 강직한 성품으로 말보다는 직접 실천하고 행하는 지휘관의 전형이라 하실 만한 모습으로 부하들의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전후 부족한 국고의 한계로 인해 국고의 지원 없이 김해 공병학교의 자체 인력과 기술력만으로 공병학교 장병 6천명이 수용 가능한 부대숙소를 자체 건설하였으며, 약 120만평 광활한 부지에 경비행장, 교육장 및 각 전투병과를 목적별로 지원할 수 있는 교육장 등을 구축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육군공병학교의 교재를 참고로 하여 한국 현실에 맞는 전투공병 교재를 완비하여 군 전력강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또한 전후 공병학교의 역할은 미 군사민간지원에 의한 사업들도 활발히 수행하여 김해보건후생병원의 건립, 김해여자고등학교 건립 및 각 면 단위의 초등학교를 신, 개축 해 줌으로서 군의 지역사회 지원과 봉사에 앞장 섬으로서 지역사회와 주민들로부터 많은 찬사와 감사가 따랐습니다. 58년 2월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60년 5월까지 육군공병차감으로 근무하셨으며, 60년 10월부터 63년 10월까지 3년간 육군공병감으로 재직하시며 건설분야중 특히 건축, 토목분야의 인재양성과 기술향상을 위해 집중투자를 하였습니다.
또한 공정하고 엄정한 인사를 통해 공병병과의 전력증강에 기여하였으며 공병병과의 우수인력확충을 위해 보병, 포병, 기갑등의 타 전투병과와의 인력조정에 앞장서 공병병과가 기술병과에서 전투병과로 전환되는 문제의 기본을 만들어 병과발전의 기초를 닦는 공헌을 이루셨습니다. 62년 4월 육군소장으로 진급후 63년 10월 육군소장으로 퇴임하셨습니다.
아버님은 3남1녀의 가장으로서 원칙주의자이시며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되며 선행을 해도 자랑하지 말 것을 늘 당부하셨습니다. 원칙에 어긋나는 특혜나 특권을 기대하지도 말고 원칙대로 세상을 살도록 늘 말씀하셨기에 자식들에게 원칙주의이자 때로는 고지식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평소 부친이 가지고 계셨던 자식들에 대한 군복무에 대한 생각과 부친의 성품과 소신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예외 없이 군복무를 알아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역 2대에 걸친 3형제(서기,서립,서정)모두 대학 재학중 또는 졸업후 군복무에 있어서는 사소한 혜택이나 편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당연히 군복무는 자기가 알아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장남인 큰형(서기)이 현역병으로 5사단에 입영하여 당시 많은 고생을 하여 동생들에게는 기왕 군대 생할을 한다면 조직에서 리더쉽도 키울 수 있고 인내심과 보다 큰 책임감을 느끼고 성장할수 있는 장교로 가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조언에 따라 형(서립)과 저(서정)은 대학 재학중 ROTC를 지원하여 각기 논산훈련소 신병훈련소 훈육관으로 또 1사단 15연대 전방소대장과 연락장교로 군복무를 하였습니다.
병역3대의 서원 군은 육군항공병과에 지원하여 항공작전 사령부 예하 11항공단 근무중 아프가니스탄 해외파병을 자원하여 12년 5월부터 12년 12월까지 오시노부대에 파견되어 아프가니스탄 현지 바그람기지에 육군 항공관제병으로로 근무하였습니다.
'서 정'님은 부모로서 아들이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지원하였을 때 젊어서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아들의 얘기에 잠시 걱정도 들었지만 본인이 희망한다면 가지 말라고 막을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님으로부터 배운 아들 키우는 방식이기도 하였습니다.
파병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했을 때 아들로 부터 들은 이야기인즉슨 파병출국 전날 부대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머리카락과 솝톱을 잘라 비닐봉지에 담아 제출할 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제 남자로서 겪어보기 어려운 곳에 간다는 실감과 더불어 남자로서 군인으로서 남다른 감정과 느낌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세상 젊은이에 비해 어린 아들이지만 바른 생각과 정신으로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역 2대 '서 정': 최근 많은 매체에서 힘있고 돈있고 권력 가진 사람은 마치 군대를 안가는 것처럼 얘기하기도 하지만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고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발휘할 때 사회계층간 대립도 최소화 될 것이고, 사회 지도층일수록 국민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더욱 철저해야 일반 시민들의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이 6,25전쟁에서 전사했던 사실이나 모택동의 아들이 전사했지만 시신수습을 포기했던 일화를 떠올려보면 우리나라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작은 병역의 의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부와 힘을 이용하여 본인, 자식들이나 친인척의 병역의무를 면탈하는 것은 사회적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나라 수호를 위해 이바지하신 병역 1대 故 서 윤택 장군님, 병역 2대 서 기, 서 립, 서 정, 병역 3대 서 원 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5세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
6세 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7세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
8세 실전
9세 실전
10세 실전
11세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
12세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15세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16세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17세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18세 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
서옥(徐沃 무안현감(縣監). 군수.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
19세 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
20세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
서경인(徐景仁 진사(進士))
서경개 (徐景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부이사관)
21세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
서윤조(徐胤祖 생원(生員))
22세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
서국보(徐國寶 선략장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종3품.차관보)
서국빈(徐國賓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3품.차관)
서국평(徐國枰 공조참판(工曹參判).정3품.차관)
서국주(徐國柱 봉훈랑(奉訓郞) 도사(都事).부이사관)
서국로(徐國老 조선 문신)
가족
-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
-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
-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
- 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
-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
- 실 전
- 실 전
- 실 전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 고고조할아버지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
- 큰고조할아버지 :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
- 고조할아버지 :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작은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
- 실 전
- 실 전
- 실 전
-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
- 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
-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