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익(成壽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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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8년(중종23)∼1598년(선조31) = 71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덕구(德久), 호는 칠봉(七峯)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장흥고(長興庫)영(令)성예원(成禮元)이고, 어머니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진사(進士)이수량(李守諒)의 딸이다. 하산군(夏山君)성몽정(成夢井)의 손자이고, 창흥군(昌興君)성하종(成夏宗)의 조부이다.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다.

명종 시대 활동

1552년(명종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음보로 경릉(敬陵)참봉(參奉)과 돈녕부 봉사(奉事)를 지냈다. 1559년(명종14) 정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32세였다. 관례대로 승문원 권지(權知)정자(正字)로 배속되었다가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1562년(명종17)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檢閱) · 대교(待敎) · 봉교(奉敎)의 차례로 승진하였다. 1563년(명종18)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고, 형조 좌랑을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로 옮겼고, 이듬해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다. 1565년(명종20)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정랑으로 옮겼다. 1566년(명종21)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으로 나갔다가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옮겼고 다시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원년) 개성부 경력(經歷)으로 나갔다가 정몽주(鄭夢周)의 옛 집터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1570년(선조3) 성균관에 들어가서 직강(直講) · 사예(司藝)로 승진되었고, 1571년(선조4)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자원하여 부평부사(富平府使)로 나갔는데,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3년 상례를 끝마치고, 1574년(선조7) 사옹원(司饔院)정(正)에 임명되었다가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1578년(선조11) 성균관 사예에 임명되었다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나갔다. 1580년(선조13)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고, 군자감(軍資監) · 상의원(尙衣院)의 정을 거쳐 회양부사(淮陽府使)로 나갔다. 1583년(선조16) 회양부사로서 치적(治績)이 뛰어나다고 하여 특별히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에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었다가 1586년(선조19)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태조의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였는데, 후일 이 일로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훈되었다. 이때 북경에서 성절사(聖節使)윤자신(尹自新) 일행과 함께 회동관(會同館)에 머물다가 실화하여 조선 사신이 머무는 관사 옥하관(玉河館)을 불태워버렸으므로 조선 사신들이 모두 잡혀가서 국문을 받았다. 선조가 급히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또 동지사(冬至使)의 진헌 방물(進獻方物) 가운데 나전함(螺鈿凾) 안의 소합(小合) 네 개를 도둑맞았기 때문에 정사성수익과 서장관(書狀官)유영순(柳永詢)은 귀국하자마자 국문을 당하고 경기도에 유배되었다.

1590년(선조23)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을 때, 하산군(夏山君)성몽정(成夢井)의 적장자(嫡長子)로서 광국(光國)과 평난(平亂) 두 공신(功臣)의 훈맹(勳盟)에 참석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되고 창산군(昌山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591년(선조24)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선조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할 때 호종(扈從)하였는데, 일행이 영유(永柔)에 이르렀을 때 형조 참판에 임명되고 오위도총부 부총관(副總管)을 겸임하였다. 왜적이 물러나자 왕비를 해주(海州)로 호종하였다. 1593년(선조26)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1595년(선조28) 개성부유수(留守)로 나갔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서 왕비를 수안(遂安)으로 호종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1598년(선조31) 3월 16일 해주에서 객사하니, 향년이 71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수익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단아하고 행실은 순수하였는데, 평소에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질이 고요하고 삼갔으므로, 남과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공무(公務) 이외의 여가에는 문을 닫고 홀로 있었으며 남들과 문장을 겨루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였는데, 사람들이 혹 남의 단점을 말하면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손들이 만일 귀담아 들었다가 알려주면 “서생(書生)은 마땅히 책이나 읽고 옛 것을 배울 따름이지, 조정의 일을 너희가 알아서 어찌 하겠는가.” 하며, 반드시 꾸짖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계부(季父)인 동주(東洲)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학문이 남보다 숙성(夙成)하여, 학도 수백 명 중에서 모두 그를 으뜸으로 꼽았다. 그는 책을 유난히 좋아하여 날마다 읽고 스스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제자백가의 서책까지도 두루 통달하였는데, 만년에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거의 침식(寢食)을 잊다시피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신혈리(神穴里) 덕파(德坡) 언덕의 선영(先塋)에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월정(月汀)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월정집(月汀集)』 권6 「예조 참판 성공 익수 묘비명(禮曹參判成公壽益墓碑銘)」) 부인 수원최씨(水原崔氏)는 빙고(氷庫)별좌(別坐)최세신(崔世臣)의 딸인데, 부부의 금슬이 좋아서 첩실을 두지 않았고, 자녀는 7남 2녀를 두었다. 아들 넷이 문과에 급제하여, 장남 성택선(成擇善)은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3남 성호선(成好善)은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4남 성진선(成晉善)은 이조 좌랑, 6남 성계선(成啓善)은 병조 좌랑을 지냈다. 장손 성하종(成夏宗)은 무과에 급제하여 북병사(北兵使)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재사초(寄齋史草)』
  • 『난중잡록(亂中雜錄)』
  • 『월정집(月汀集)』
  • 『서애집(西厓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음유고(梧陰遺稿)』
  • 『잠곡유고(潛谷遺稿)』
  • 『화담집(花潭集)』
  • 『미암집(眉巖集)』
  • 『동원집(東園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백곡집(柏谷集)』
  • 『성재유고(醒齋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