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자신(尹自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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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9년(중종 24)∼1601년(선조 34) = 73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호조 판서(判書)이고, 봉작(封爵)은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자는 경수(敬修)이다. 증조부는 판관(判官)윤은(尹訔)이고, 양조부는 전적(典籍)윤시호(尹時豪)이며, 생조부는 목사(牧使)윤시영(尹時英)이다. 아버지는 사인(士人)윤식(尹湜)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신은령(新恩令)이사종(李嗣宗)의 딸이다.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의 스승이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였고, 1562년(명종 1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방목』) 성균관(成均館) 권지학론(權知學論)에 보임되었다가, 태상시(太常寺) 주부(主簿)로 승진하였고, 전중시(殿中寺) 호부랑(戶部郞)을 거쳐서,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나갔다. 조정으로 들어와서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호조 정랑(正郞)을 거쳐서, 성균관 사예(司藝)로 승진하였다. 그 뒤에 사재감(司宰監)·예빈시(禮賓寺)·제용감(濟用監)에서 첨정(僉正)·부정(副正)·정(正)을 지내고, 회양군수(淮陽郡守)로 나갔다. 그때 강원도에 흉년이 들자 백성들을 잘 구제하였고, 고을에 서당(書堂)을 지어 젊은 사람들을 가르쳐서 학문을 일으키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580년(선조 13)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고,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로 옮겼다가, 1581년(선조 14) 호조 참판(參判)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에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585년(선조 18) 다시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586년(선조 20)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었는데, 사신 일행이 40여 일 동안 회동관(會同館)의 옥하관(玉河館: 조선 사신관)에 머물다가 실화(失火)하여 조선식으로 지은 건물을 불태워버렸으므로, 엄중하게 국문(鞠問)을 당하였다. 1589년(선조 22)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는데,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자, 역적 정즙(鄭緝)을 체포하여 호송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날 때 그는 중추부 첨지사로 있다가, 피난 가는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선조 일행이 보산역(寶山驛)에 이르러, 선조가 그를 종묘서(宗廟署)제조(提調)에 임명하여, 임시로 송도(松都)에 안치한 종묘의 신주(神主)행재소(行在所)로 운송하여 오도록 명하였다. 왜냐하면, 왜적들이 급박하게 추격하여 와서 개성의 신주가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윤자신은 종묘서의 관원 몇 사람을 거느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개성으로 가서 종묘의 신주를 수거하여 왜적들의 눈을 피해서, 선조 일행이 머물고 있는 행재소로 운반하여 왔다. 이리하여 종묘의 신주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그 공로로 윤자신은 품계가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에서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고, 관직은 중추부 지사로 승진하였다. 1594년(선조 27) 돈녕부(敦寧府) 지사가 되었다가, 1597년(선조 30)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공조 판서를 거쳐 1599년(선조 32)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600년(선조 33)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승하하자,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에 임명되어, 국장(國葬)을 맡아서 치렀는데, 병든 몸으로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일을 무리하게 처리하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수레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와서, 1601년(선조 34) 2월 20일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윤자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모습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행동이 간략하고 깨끗하였다. 일을 처리할 때 과단성이 있었고, 평소 말과 웃음이 적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가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차차 자라면서 시문(詩文)을 짓는 재능이 날마다 진취하였다.

성품이 곧고 강직하여, 관직에 있을 때 도량형(度量衡)에 한 치의 어김도 없었으므로, 서리들이 그 사이에 농간을 부리지 못하였다. 호조에 있을 때 오로지 장부를 간략하고 분명하게 기록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서, 어느 누구도 조그마한 이익이라도 챙기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그의 행낭 속에 지푸라기 하나라도 부정한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부사(副使)가 당나라 이태백(李太白)과 두보(杜甫)의 시집을 구해서 주니, 그가 받기를 거절하면서, “내가 눈이 어두운데, 지금 이것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하였다. 관리로 있을 때 일체 모든 일을 법대로 처리하고 터럭만큼도 스스로를 용납하지 아니하였고, 또 다른 사람도 절대로 용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심장이 철석(鐵石) 같다.”고 비난하고 감히 사사로이 청탁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권귀(權貴)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고, 오직 국사(國事)를 잘 처리하려고 몸과 마음을 다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서 집에 있을 때에는 책을 읽고 화초를 가꾸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집안이 쓸쓸하기가 마치 벼슬하지 않는 선비 집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문장(文章)이 화려해서 그의 시(詩)가 세상에 많이 알려졌는데,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아는 것을 싫어하여 유고(遺稿)도 불태우고 남기지 않았다.

윤자신은 이정귀와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어린 이정귀가 남쪽 언덕에 있던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아침저녁으로 글을 읽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정귀는 어릴 때부터 백수가 되도록 항상 윤자신의 집에 출입하였는데, 윤자신은 젊은 이정귀를 제자로 대하지 않고 사돈집 자제의 예로 대하였다. 윤자신이 호조 판서가 되었을 때 이정귀를 호조 참판으로 추천하여 두 사람이 같이 호조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金浦) 신동(薪洞)의 선영(先塋)에 있다. 월사이정귀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월사집(月沙集)』 권42 「호조판서 증영의정 윤공자신 신도비명(戶曹判書贈領義政尹公自新神道碑銘)」) 1604년(선조 37) 6월 공신을 대대적으로 책봉할 때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책훈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용원 부원군(龍原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장원(掌苑)윤속(尹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5녀를 두었다. 장남은 통정대부(通政大夫)윤기헌(尹耆獻)이다. 장녀는 참봉(參奉)임전(任錪)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무인(武人) 조영렬(趙英烈)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종실(宗室) 순창군(順昌君)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지평(持平)강수준(姜秀峻)의 처가 되었으며, 5녀는 현감이목(李莯)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월사집(月沙集)』
  • 『간이집(簡易集)』
  • 『기재사초(寄齋史草)』
  • 『난중잡록(亂中雜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성호사설(星湖僿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우계집(牛溪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학봉전집(鶴峯全集)』
  • 『미암집(眉巖集)』
  • 『약포집(藥圃集)』
  • 『송강집(松江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중봉집(重峰集)』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태천집(苔泉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용주유고(龍洲遺稿)』
  • 『고산유고(孤山遺稿)』
  • 『동춘당집(同春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