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계선(成啓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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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6년(명종21)∼1608년(선조41) = 43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칙생(則生)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서울의 남산(南山) 밑에 살았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성수익(成壽益)이고, 어머니는 수원최씨(水原崔氏)이다. 대사헌성몽정(成夢井)의 증손이고, 대사성이충작(李忠綽)의 사위다.

선조 시대의 활동

1594년(선조27) 중형 성진선(成晋善)과 함께 정시(庭試)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제등제(兄弟登第)’로 유명하였다. 형과 함께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로 보임되었는데, 동과 급제한 허균(許筠)도 승문원에 배속되자 두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뒤에 호조 · 예조 · 형조의 좌랑(佐郞)을 거쳐서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냈다. 1601년(선조34) 병조에 들어가서 좌랑 ·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고 연이어 무장현감(茂長縣監)으로 나가서 치적이 우수하여 포상을 받았다. 1604년(선조37) 서천군수(舒川郡守)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엄정한 정치를 행하여 표창을 받았다. 1605년(선조38)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가, 내직으로 오위도총부 부사직(副司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이 과거를 볼 때 남몰래 도감(都監) 관하의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과장(科場)에 함부로 들여보내 아들의 주초(朱草)를 옮겨 써서 바치게 하였다가, 발각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06년(선조39)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중병으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향리(鄕吏)에게 위임하였다가 민원(民怨)이 발생하자, 1607년(선조40)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다시 파직되어, 서울 남산 밑의 자택으로 돌아와서 정양하다가, 1608년(선조41)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43세였다. 허균과 매우 친하였기 때문에, 그가 광해군 시대까지 10년만 오래 살았다면, 1618년(광해군10) 허균이 <서궁(西宮) 투서(投書) 사건>으로 죽음을 당할 때 성계선도 같은 당류로 몰려서 화를 당할 뻔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계선(成啓善)은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사람들과 간격을 두지 않았다.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는 우애로웠으며, 친구 간에는 성실과 신의로써 대하였다. 고을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서 부임하는 고을마다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일을 없애는 것을 자기소임으로 삼았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의 동쪽 모산(某山)에 있는데, 친구 허균(許均)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전주이씨는 대사성이충작(李忠綽)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두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