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원(成悌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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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6년(연산군12)∼1559년(명종14) = 54세]. 조선 전기 명종 때 활동한 유일(遺逸). 자는 자경(子敬)이고 호는 동주(東洲)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공주(公州)이다. 아버지는 장흥부사(長興府使)성몽선(成夢宣)이고, 어머니는 평양조씨(平壤趙氏)이다. 생육신 성담수(成聃壽)의 동생 교리(校理)성담년(成聃年)의 손자이고, 하산군(夏山君)성몽정(成夢井)의 조카이다.

명종 시대 활동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서봉(西峰)유우(柳藕)가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의 성리학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그 문하(門下)에서 부지런히 주자학을 공부하여 마침내 오묘(奧妙)한 이치를 깨달아 학업에 잠심(潛心)하고 도학(道學)을 실천하였다. 아울러 당세에 유명한 유학자들을 두루 방문하여 더욱 견문을 넓혔다. 또 산경(山經) · 지지(地誌) · 의학(醫學) · 복술(卜術)에도 뜻을 기울여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평소 과거 공부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옛날 도학의 연구에 오로지 마음을 쏟았다. 그는 도학을 자세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근본 이치를 깊이 깨닫는 데에 힘을 썼으나, 그 말단 구절에 얽매이지 않았다. 1552년(명종7) 명종이 각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자 경기도에서 성수침(成守琛)과 조욱(趙昱)을, 청홍도(淸洪道: 충청도)에서 성제원을, 경상도에서 조식(曺植)과 이희안(李希顔)을 천거하였다. 처음에 군기감(軍器監) · 돈녕부(敦寧府)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1553년(명종8)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는데, 그는 은둔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높은 체하는 벼슬아치들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소명(召命)에 응해서 현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는 듯했으나, 안으로는 관무(官務)를 잘 다스려, 혜택이 백성에게 두루 미쳤다. 6년의 임기가 끝나자 선영(先塋)이 있는 공주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재취(再娶)는 송세량(宋世良)의 딸로 송귀수(宋龜壽) · 송인수(宋仁壽)의 누이동생이다. 송귀수는 송시열(宋時烈)의 증조부이고, 규암(圭菴)송인수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죽은 사림파(士林派)의 유학자이다. 『청음집(淸陰集)』에 따르면, 성제원은 처남 송귀수 · 송인수와 서로 뜻이 맞아서 회덕(懷德)의 처갓집 별실에서 자주 도(道)를 강론하였는데, 그곳을 ‘삼현려(三賢閭)’라 한다고 하였다. 성제원은 뜻이 크고 지략도 있고 경술(經術)에 밝았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 시와 술로 방랑하면서 자기 몸을 단속하지 않다가, 1559년(명종14) 5월 18일 갑자기 죽으니, 향년이 54세였다.

성제원이 남긴 글들은 그 후손 성기운(成璣運)이 1906년에 『동주일고(東洲逸稿)』로 간행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제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자품이 준수하고 영오(穎悟)하였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의기(意氣)가 뛰어나고 지상(志尙)이 굳세었다. 젊어서는 그가 엄숙하고 굳세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려하였으나, 나이 들어서는 온화하고 너그러워져서 농담도 잘하여 스스로 호를 ‘동주소선(東洲笑仙)’이라고 하였다. 친구들을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대하였으며 다른 사람도 현인이거나 어리석은 자이거나 상관없이 적절히 잘 대하였으므로, 모두가 좋아하였다. 그러나 여론의 시비를 가르는 일을 만나면 한결같이 옛 도리를 따르고 나머지 의논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행실이 맑고 재주와 지략이 웅대하였다. 이와 동시에 경학(經學)에도 통달하고 밝았는데, 벼슬살이에 욕심이 없어서 과거 공부는 아예 하지 않았지만, 날마다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렸으며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 세상을 하찮게 보는 면이 있었으므로, 평생 술과 시에 취하고 노래하는 것을 흥취로 삼았으며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나 유일로서 보은현감에 임명되었을 때, 정치에는 청렴 간결함을 숭상하고 교화(敎化)를 급선무로 삼았으므로, 교활한 아전은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간사한 백성은 은덕에 감복하여 치적이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비문과 제향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묘소는 충청도 공주의 선영에 있는데, 처4촌 도승지송기수(宋麒壽)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추파집(秋坡集)』 권2 「동주 성공 묘갈명(東洲成公墓碣銘)」) 둘째 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송시열의 고조부 참봉 송세량(宋世良)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충청도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추파집(秋坡集)』
  • 『규암집(圭菴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각잡기(東閣雜記)』
  • 『면암집(勉菴集)』
  • 『모재집(慕齋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