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종(成夏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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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3년(선조6)∼1645년(인조23) = 73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무신. 자는 이술(而述)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성택선(成擇善)이고,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충의위(忠義衛)이광균(李光均)의 딸이다. 예조 참판성수익(成壽益)의 손자이고, 관찰사성호선(成好善)의 조카이다.

선조 · 광해군 시대 활동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피난 중에 아버지가 회양(淮陽)에서 돌아가고,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거듭 실패하자, 이에 붓을 내던지고 활을 잡고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1603년(선조36) 급제하였다. 1605년(선조38) 조정에서 북방 여진족의 침입을 우려하여 무재(武才)가 있는 인재를 선발할 때 성하종은 구인후(具仁垕) · 윤숙(尹璛) 등과 함께 뽑혔다. 1608년(광해군즉위)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의 추천으로 장관(將官)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부인 이씨(李氏)가 죽었다. 복제를 끝마치고, 다시 장관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가 점차 혼란해지고 뇌물이 성행하자, 성하종은 6년 동안 등용되지 못하였다.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서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하고, 그 부인 노씨(盧氏)가 경내(境內)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아무도 돌보는 자가 없자, 그가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물자를 공급하였다. 1616년(광해군8) 비로소 대정현감(大靜縣監)에 임명되었는데, 대정현은 본래 ‘보장(寶藏)의 굴(窟)’이라 일컬을 만큼 여자가 많았으나 그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므로, 섬사람들이 그의 신의에 감복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양덕현감(陽德縣監)에 임명되었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 때 조정의 원훈(元勳)을 호위하는 장교(將校)로 있었다. 이듬해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군기시 첨정(僉正) · 훈련원 부정(副正)을 거쳐 갑산부사(甲山府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찼으나 그대로 1년을 더 있었다. 1627년(인조5)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어 남도우후(南道虞候)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옮겼다가, 남도병사(南道兵使)가 되었다. 그때 인조가 함경도관찰사에서 돌아온 서목(徐穆)에게 북도의 수령(守令)으로서 등용할 만한 인재를 물었는데, 그가 성하종 등 9명의 이름을 거론하였으므로, 1630년(인조6) 남병사(南兵使)에서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체임되었는데, 인조가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1633년(인조11) 임기가 차 강계부사에서 갈리게 되자, 부민(府民)들이 그가 청렴하고 검소하다고 하며 쌀 2백 석을 댓가로 바치고 1년을 더 유임시켜 줄 것을 간청하니, 인조가 유임을 허락하였다. 1636년(인조14) 청백리(淸白吏)로서 김상헌(金尙憲) · 이안눌(李安訥) · 김덕함(金德諴) · 김시양(金時讓) · 성하종 등 5인을 뽑아서 각각 가자(加資)하였는데, 정하종은 무인(武人)으로서 뽑혔기 때문에 특별히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고 창흥군(昌興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에 제수되었는데, 어명을 받고 전라도수군(水軍)을 이끌고 강화도(江華島)로 갔으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된 뒤였으므로, 피난민들을 구원하였다. 강화도 함락 뒤에 도착한 것은 그가 고의로 출동을 늦추었기 때문이었다는 탄핵을 받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북방의 방어에 공헌하였다. 1645년(인조23) 2월 7일 경성(鏡城)에서 병으로 객사하니, 향년이 73세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 구원

1636년(인조14) 12월 청(淸)나라 기병(騎兵)이 도성(都城)을 포위 공격하자, 인조가 황급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다. 그보다 하루 앞서 성하종은 전라도수사(全羅道水使)에 임명되었는데, 정신없이 하직(下直)을 고하고 떠났으나, 도중에 행재소(行在所)의 어명을 받기를, “수졸(水卒)을 정돈시켜 육로(陸路)를 통하여 올라와서 남한산성을 호위하라.” 하였다가, 또 명령을 바꾸어 “주사(舟師)를 이끌고 강화도로 가서 왕비를 보호하라.” 하였다. 그는 밤새도록 본진(本鎭)으로 달려가서 수졸을 거느리고 배에 올라서 해로(海路)를 따라 북상(北上)하였는데, 여러 번 큰바람이 일어서 배가 파도에 뒤집힐 뻔하였다. 강화도에 간신히 도착하니, 강화성은 이미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었다. 이때 백성들은 추위에도 불구하고 섬에서 도망치다가 얼어 죽거나 굶주려 죽는 자가 줄을 이었다. 그가 싣고 간 식량을 나누어주고, 부모 없는 어린 아이들을 거두어 배 안에 태워서 목숨을 건진 자가 많았다. 본진으로 돌아오자, 큰 난리를 치른 뒤라 인심이 크게 동요하였는데, 그가 더욱 인정(仁政)과 은혜를 베풀어 전라도 백성들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가 강화도에 늦게 도착하였다고 한 자급(資級)을 강등시키고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시켰다.

성품과 일화

성하종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어질고 후덕하였으며, 가정에서나 관직에서 항상 정성과 신의를 다하였다. 대개 무인(武人)은 활 쏘고 말 타기에 전념하므로 호탕(豪宕)하고 법도(法度)를 따르지 않는데, 그는 문과를 공부하다가 여러 번 실패하고 무과로 바꾸어 무인이 되었기 때문에 문신(文臣)처럼 단정하고 정직하였으므로, 무인으로서 청백리(淸白吏)로 선임되었던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고 남에게 부드러우면서 공손하였다. 관원(官員)이 되어서 깨끗하고 지조(志操)가 있었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은 그의 비문에서 평하기를, “단정한 사람이었고, 올바른 무장이었으며, 겸손한 군자(君子)였다.”라고 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할 때 그가 조정의 원훈(元勳)들을 호위하는 장교(將校)로 있었는데, 원훈들이 이괄의 병사 중에 도망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죽이려고 하니, 그가 강력히 항의하기를, “위협에 못 이겨서 따른 자들을 처벌하지 않는다[脅從罔治]는 고훈(古訓)이 있는데, 지금 수괴(首魁)는 이미 처형되었으니, 어찌 나머지 사람들을 함부로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원훈들이 깨닫고 살육을 중지시켰다. 그가 병이 나기 전에 북방 경성(鏡城)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는데, 그가 죽자 제사를 지냈고, 그 사당(祠堂)을 ‘청덕사(淸德祠)’라고 하였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충청도 문의(文義) 서쪽 금포(黔浦)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그의 친척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명이 남아 있다. 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는 병마평사(兵馬評事)이상철(李尙哲)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성초만(成楚晩)이고, 손자는 성일동(成一童)이다. 인조 때 병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함경북도 경성의 청덕사(淸德祠)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계집(桐溪集)』
  • 『백사집(白沙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북저집(北渚集)』
  • 『학곡집(鶴谷集)』
  • 『동명집(東溟集)』
  • 『백헌집(白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