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尹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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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2년(광해군 14)∼1692년(숙종 18) = 71세]. 조선 후기 효종(孝宗)~숙종(肅宗) 때의 문신. 호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태승(泰昇)이고, 호는 하곡(霞谷)이며, 시호는 익정(翼正)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첨정(僉正)윤면지(尹勉之)이고, 어머니 청주 경씨(淸州慶氏)는 참판(參判)경섬(慶暹)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형조 판서윤휘(尹暉)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윤두수(尹斗壽)의 증손자이다. 영의정윤방(尹昉)의 종손자이기도 하다. 권격(權格)·신명규(申命圭)·김징(金澄)과 가까운 사이였다.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한 노론의 강경파였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방목(榜目)』] 그러나 대과(大科)에 거듭 실패하자 음직(蔭職)으로 사산감역(四山監役)·사옹원(司饔院)참봉(參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 25 「판서윤공신도비명(判書尹公神道碑銘)」 이하 「윤계신도비명」으로 약칭] 1662년(현종 3) 증광(增廣)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1세였다.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진출하였으나, 노론의 선봉장으로서 남인(南人)·소론(少論)과 격려하게 대립하였으므로, 비교적 빨리 출세하게 되었다. 급제한 직후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를 섭행(攝行)하고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정자(正字)에 보임되었는데, 그때 균전사(均田使)민정중(閔鼎重)이 그를 불러 균전청(均田廳) 낭관(郎官)으로 삼았다. 1664년(현종 5) 홍명하(洪命夏)가 훈련도감(訓鍊都監)도제조(都提調)가 되어, 그를 훈련도감 낭청(郎廳)으로 삼고, 크고 작은 계획을 일체 그에게 맡겼다. 1665년(현종 6) 대신 홍명하의 천거로 6품의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승진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예조 좌랑(左郞)에 임명되었다. 이 해 겨울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아버지가 한 달 이상 병을 앓고 누워 있다가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지자, 그가 급히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한 후 수일 동안 수명이 연장되었다.[「윤계신도비명」]

1668년(현종 9)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를 겸임하여 황해도 균전(均田)의 임무를 맡아보았다. 그는 현장의 토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함을 살펴 그 등급을 매겼는데, 오로지 백성들에게 유리하도록 토지를 평가하였다. 이듬해인 1669년(현종 10)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어, 세자 시절의 숙종을 가르쳤다.[「윤계신도비명」] 그리고 1670년(현종 11)에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어 충청도의 과거시험을 관장하였다.(『현종실록』 11년 3월 26일),(『현종실록』 11년 8월 7일) 조정으로 돌아온 후에는 병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으며, 1671년(현종 12)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는데, 그때 그는 장장 ‘1만여 언(言)’이나 되는 상소문을 지어 당시의 온갖 병폐를 지적하였다.(『현종실록』 12년 4월 8일),[「윤계신도비명」] 그 뒤에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현종실록』 12년 9월 27일) 이 무렵 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으므로, 임금이 미곡(米穀)을 맡은 아문(衙門)에 명하여 미곡 값을 내려 발매(發賣)해서 백성들의 급한 사정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주관하던 남인 허적(許積) 등이 부정을 저질렀으므로, 윤계는 그 부정 사실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을 계청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이 이 사건을 조사하도록 명하였으나, 형조 판서서필원(徐必遠)이 허적의 편을 들어서 그 탄핵이 사리에 부당하다고 논하며 그 명을 정지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윤계가 탑전(榻前)에서 판서서필원을 탄핵하자 현종이 판서서필원을 비호하였는데, 그가 임금에게 쟁론하자 현종이 노하여 이르기를, “내가 누구에게 사사로이 과실을 비호해주었다고 말하는가” 하고, 함경도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시켰다.[「윤계신도비명」]

1672년(현종 13)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종부시(宗簿寺)정(正)을 거쳐 제주도목사(濟州道牧使)로 승진하였다.(『현종실록』 13년 2월 18일) 이때 제주도에 기근이 거듭 들자, 진휼(賑恤) 정책을 잘 수행할 사람이라며 이조에서 그를 천거했다. 그러나 실상은 남인 허적이 그를 정권에서 소외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윤계신도비명」] 당시 제주도로 떠나기에 앞서 그는 입대(入對)를 청하여 임금에게 곡식 수천 곡(斛 : 휘)과 포목(布木) 수천 필을 얻어 제주도 백성들을 진휼한 덕분에 수많은 목숨을 살려냈다. 제주도에서 날뛰던 극악한 도적들 가운데 8명을 체포하여 자복을 받아내고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조에서 제멋대로 사람을 죽였다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그를 체포하여 국문(鞠問)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자 의금부에서 그를 잡아다가 하옥하고 심문한 후 마침내 고신(告身)을 박탈하였다.(『현종개수실록』 13년 8월 11일)

이후 1674년(현종 15)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이때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 경비가 허술하였다. 이에 그는 양식을 저축하고 무기를 수선하며, 요해처에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연안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였다.[「윤계신도비명」]

숙종 시대 활동

1674년(숙종 즉위년) 8월 숙종이 1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그때 윤계는 황해도관찰사로 있었다.(『숙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1675년(숙종 1) 윤계는 남인 출신 원접사(遠接使)오시수(吳始壽)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어 심문을 받았다.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오시수가 청나라 사신에게 선왕(先王) 현종(顯宗)은 약하고 신하 송시열(宋時烈)은 강하여 왕권이 신권의 견제를 받았다는 이른바 ‘왕약신강설(王弱臣强說)’을 사적으로 말하였다는 것이다. 남인 허적과 윤휴(尹鑴) 등이 윤계를 심문한 후 이것은 서인 윤계가 꾸며낸 말이라고 숙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허적은 윤계의 파직만을 주장하였으나, 윤휴는 윤계를 극변(極邊)으로 유배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숙종은 마침내 윤계를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시켰다가 7월 충청도 홍주(洪州)로 양이(量移)하였다.[「윤계신도비명」] 그리고 이듬해인 1676년(숙종 2) 5월 사면령(赦免令)을 내려서 윤계를 석방하였다.(『숙종실록』 2년 5월 22일)

1678년(숙종 4) 서인들의 추천을 받아 윤계는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었는데, 이듬해인 1679년(숙종 5) 병으로 진주목사를 그만두었다. 당시 남인들은 윤계가 중앙 정계로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왕에게 계청(啓請)하기도 하였다.[「윤계신도비명」] 1680년(숙종 6) 3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서 영의정허적(許積) 등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윤계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남(李枏)과 허견(許堅 : 허적의 서자)의 역모가 발각되자, 윤계는 형방(刑房) 승지(承旨)로서 국문에 참여하였는데, 서인의 영의정김수항(金壽恒)이 옥사를 심리하면서 일마다 반드시 윤계와 의논하였고, 입대했을 때에는 21세의 숙종도 그에게 많은 것을 자문하였다. 허견을 처형할 때에 숙종이 허적의 죽음은 면해주려고 하자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성하였으나, 승지윤계만이 허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바람에 허적·허견 부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허견의 옥사>가 끝나자 윤계는 승정원 도승지로 발탁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훈되었다.(『숙종실록』 6년 5월 14일) 그 뒤에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가서 6진(鎭)의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고 탐오한 장수들을 교체하였다.[「윤계신도비명」],(『숙종실록』 6년 5월 25일)

1681년(숙종 7)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청나라 연경 갔는데, 예부(禮部) 관원이 우리나라에서 보낸 국서(國書)의 문장이 불손하다며 우리 사신에게 그 허물을 조선 국왕에게 돌리도록 강제(强制)한 일이 있었다.(『숙종실록』 7년 4월 5일) 어느 날 청나라 예부 관원들이 조선 사신들이 머무는 회동관(會同館)의 옥하관(玉河館)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상사(上使)는 나간 곳을 알 수 없었고 서장관(書狀官)은 병을 칭탁하여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가 홀로 나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기를, “군신은 부자와 같은 것인데, 그 자식으로 하여금 제 아비에게 허물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 어찌 예의겠는가. 비록 책망을 만 번 받더라도 내가 감당할 것이다. 나에게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이에 청나라 예부 관원들이 돌아갔고, 그날 밤 사람을 보내 그 대가로 은전(銀錢) 5천 냥을 요구하였다. 그가 글을 써서 통역을 통해 보내기를, “아무리 훌륭한 아낙네라도 쌀 없는 밥을 짓지 못한다” 하자, 청나라 예부 관원들도 뇌물을 포기하였다.[「윤계신도비명」]

1682년(숙종 8) 1월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그해 2월 호조 판서에 임명되어 나라의 재정을 확충하였으므로 흉년이 들어 나라의 부세가 줄어들더라도 국가의 비용이 결핍되지 않도록 만들었다.[「윤계신도비명」],(『숙종실록』 8년 1월 24일),(『숙종실록』 8년 2월 15일) 5월에는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임하였고, 12월에는 진휼청(賑恤廳)제조(提調)가 되었다.(『숙종실록』 8년 12월 10일)

1683년(숙종 9) 서인과 남인의 당파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남인들이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자, 호조 판서윤계가 그들을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이에 사간원 정언박태유(朴泰維)가 윤계를 무함하기를, “윤계가 우암송시열을 위해서 군사를 옮겨 남인을 공격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를 듣고 깜짝 놀라 심지어 ‘가소롭다’, ‘해괴하다’라고까지 하였다.(『숙종실록』 9년 6월 2일),[「윤계신도비명」]이때 윤계는 강교(江郊)의 집으로 나가 상소하고 관직을 파면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영의정김수항(金壽恒), 우의정김석주(金錫冑)가 경연(經筵)에서 호조 판서윤계의 억울함을 변호하기를, “호조에서 관장하는 1년 동안의 비용이 10만 곡인데, 금년에 세입은 3만 곡뿐이지만, 호조 판서윤계가 재정 관리를 잘하고 있습니다”라며 그의 활동을 자세히 설명하고, 윤계가 무함을 당한 정상을 자세하게 말하였다. 이런 가운데 윤계는 박태유의 상소에 대한 책임으로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고, 이어 비변사 대신들이 그를 체직시킬 것을 청하자 숙종도 그대로 따랐다.(『숙종실록』 9년 6월 10일)

그 뒤 윤계는 시호도감(諡號都監)을 맡아서 수고한 공을 인정 받아 정1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었다. 이해 겨울 현종의 왕후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승하하자, 그는 혼전도감(魂殿都監) 제조에 임명되어 장례를 치렀다.[「윤계신도비명」] 1684년(숙종 10) 장례를 무사히 치렀다고 하여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고, 이어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10년 1월 12일) 한재(旱災)로 인해서 인심이 흉흉하였으므로, 형옥(刑獄)을 삼가도록 왕에게 건의하니, 숙종이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윤계신도비명」]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가, 곧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어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고자 의주(義州)를 왕래하다가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10년 6월 23일) 이때 윤계가 진강(鎭江)의 목장(牧場)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백성들이 이곳을 경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사헌부 지평최규서(崔奎瑞)가 “강화유수윤계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가렴주구(苛斂誅求)하여 사리사욕을 취합니다”라고 탄핵하였으므로, 숙종이 노하여 말하기를, “원망을 무릅쓰고 일을 추진하는 자는 반드시 비방을 듣게 마련이다” 하고 그를 두둔하였다. 그러나 대간에서 거듭 탄핵하는 바람에 그는 마침내 체직되어 서반(西班)의 한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에 윤계는 강교의 정자로 물러가서 지냈다.[「윤계신도비명」] 그해 7월 승정원 승지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윤계가 강화도에서 지난 가을에 거두어들인 곡식이 거의 2만 석(石)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대간의 탄핵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명목과 실상을 자세히 조사하고 그를 임용하도록 하소서” 하니, 숙종이 사실을 조사하여 윤계에게 벼슬을 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숙종실록』 11년 7월 12일)

1685년(숙종 11) 10월 의주부윤(義州府尹)이증(李增)이 국경을 넘은 범인을 조사하기 위하여 청나라에서 두 사람의 칙사(勅使)를 파견하였다고 치계(馳啓)하니, 비변사에서 이들을 맞이할 원접사로 윤계를 보내도록 청하였다.(『숙종실록』 11년 10월 22일) 이에 윤계가 원접사에 임명되고,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를 겸임하였다.(『숙종실록』 11년 11월 25일) 윤계는 청나라 칙사와 함께 국경을 넘은 범인을 조사하고자 해당 지역을 왕래하던 도중 1686년(숙종 12) 1월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12년 1월 10일) 그러나 대간에서 강화유수 때 그가 백성들을 가렴(苛斂)하였다고 탄핵하였으므로 윤계는 개성유수의 관직을 세 번이나 사양한 후에 체직되었는데, 이때 겸직하고 있던 태상시(太常寺) 제조와 내자시(內資寺) 제조까지 체직되었다. 얼마 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의 자리가 결원되자 조정에서 윤계를 그 자리에 천거하였으므로, 그해 9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12년 9월 2일),[「윤계신도비명」] 그런데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조상우(趙相愚)가 연석(筵席)에서 갑자기 윤계의 강화유수 때 가렴한 일을 거론하면서 매우 모욕적인 말을 하였다. 이에 그가 두 번이나 상소하여 자신을 형관(刑官)에 내려 실상을 조사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계는 끝내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지 않았다.[「윤계신도비명」]

1687년(숙종 13) 1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2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는 바람에 체직되었다.(『숙종실록』 13년 1월 16일),(『숙종실록』 13년 1월 19일),(『숙종실록』 13년 2월 2일),[「윤계신도비명」] 그해 8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다가, 9월에는 의금부 판사(判事)가 되었다.(『숙종실록』 13년 8월 2일),(『숙종실록』 13년 9월 14일) 이듬해인 1688년(숙종 14)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壯烈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에 임명되고, 공조 판서가 되었다.(『숙종실록』 14년 9월 26일) 인산(因山)이 끝난 후에는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고, 이어 광주유수(廣州留守)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윤계신도비명」]

한편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이 쫓겨났는데,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고 경종(景宗)을 낳은 장희빈(張禧嬪)을 왕비로 삼았다. 인현왕후는 노론 민정중의 조카딸이었으므로, 서인은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였으나, 남인은 장희빈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때 윤계는 송시열의 앞잡이로 몰려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고, 강진의 바닷가에 조용히 앉아 자연을 즐기며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이때 송시열이 유배지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의금부 도사(都事)가 강진으로 오자, 온 집안사람들이 놀라 두려워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담소하고 잠자리에 들어 밤새도록 코를 골며 편안하게 잠을 잤다.[「윤계신도비명」] 1692년(숙종 18) 12월 20일 하찮은 병에 걸려서 전라도 강진의 유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1세였다.(『숙종실록』 18년 12월 20일)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숙종은 장희빈을 왕비에서 폐비하고, 그 오빠 장희재(張希載)를 처형하였다. 그리고 남인들을 몰아낸 후 서인을 다시 불러 소론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때 인현왕후가 복위하였으며, 노론의 송시열·민정중·김수흥(金壽興) 등이 복관되었는데, 임금의 특명으로 윤계도 복관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윤계신도비명」]

그는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시문과 장소(章疏)를 모아서 『하곡집(霞谷集)』5책을 간행하였다. 또 역사에 관한 저술 『동사(東史)』 3책과 제사 의례에 관한 저술 『제의(祭儀)』 1책 등도 남아 있다.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한 현종 시대

<제 1차 예송(禮訟) 논쟁>과 <제 2차 예송 논쟁>은 현종 시대 왕권을 약화시키고 신권을 강화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제 1차 예송 논쟁은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효종을 위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로 일어났다. 서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은 기년복(朞年服 : 1년 상복)을 주장하였고,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 등은 삼년복(三年服 : 3년 상복)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은 송시열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여 기년복을 채택하고, 남인 윤선도를 삼수(三水)로 귀양 보냈다. 그 결과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은 축출되었다. 이것은 기해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고도 한다. 이때부터 송시열은 조정의 강력한 실세가 되었으므로, 나라 안팎에서 신권이 왕권을 제압한다는 비난을 하였던 것이다.

제 2차 예송 논쟁은 1674년(현종 15) 2월 현종보다 6개월 앞서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세상을 떠났을 때 며느리를 위한 자의대비의 복제와 관련하여 일어났다. 서인 송시열·김수항 등은 대공복(大功服 : 8개월 상복)을 주장하였고, 남인 허적·윤휴 등은 기년복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병든 현종은 서인의 김석주 등의 도움을 받아 남인의 기년복을 채택하고, 서인 김수항 등을 귀양 보냈다. 그 결과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은 축출되었다. 이것은 갑인년(에 일어났으므로,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고도 부른다.

예송은 종법(宗法)의 적용 범위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간에 벌어진 논쟁이었다. 종법은 성리학의 기본사상이고 왕위계승의 원칙이었는데, 주자의 예법을 적용하는 데에 왕권을 인정하여 예외로 하느냐, 아니면 신하와 동등하게 보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송시열·송준길 등 정통 주자학파는 주자학의 근간을 이루는 종법을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하면서 예절의 불변성을 강조한 반면에, 윤선도·윤휴 등 주자학 비판론자들은 천명(天命)을 받은 국왕의 왕권은 예외로 인정하여 예절의 가변성(可變性)을 주장하였다. 서인과 남인의 사상적 배경을 본질적으로 논한다면, 서인은 신하들의 신권(臣權)을 주장하였으나, 남인은 국왕의 왕권(王權)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1674년(숙종 즉위년) 8월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즉위하였는데,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이 상소하기를, “기해예송에서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인용하여, 효종과 현종의 적통(嫡統)을 그르쳤다” 하였다. 젊은 숙종은 이를 문제 삼아 송시열을 덕원(德源)으로 귀양 보냈다. 이때 청나라에서 세상을 떠난 현종을 위하여 조문사(弔問使)를 보내고 새로 임금이 된 15세의 숙종을 위하여 책봉사(冊封使)를 보냈다. 그런데 당시 정권을 잡은 남인 출신의 승정원 도승지오시수가 원접사로서 청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면서 의주까지 먼 길을 오가다가, 청나라 사신들에게 “선왕 현종은 약하고 신하 송시열은 강하여 신권이 왕권을 제압하였다”는 이른바 ‘왕약신강설’을 사적으로 말하였다. 이보다 앞서 현종 말기에 이남이 청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 청나라에서 조선은 신하가 임금보다 강하다는 말을 듣고 현종에게 계달(啓達)하였는데, 그 강신(强臣)은 송시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현종은 몸 상태도 좋지 않고 서인들과 싸우는 것도 힘겨워 그대로 넘어갔다.

이남은 외사촌형 오시수에게 이를 말하였으므로, 오시수는 왕약신강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오시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왕께서 강신에게 압제받은 것을 청나라 황제가 애처롭게 여겨서 두 번이나 치제(致祭)를 하였다” 하고, 이어 “명(明)나라 통역관 장효례(張孝禮)가 윤계를 만났을 때에도 이런 말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였을 때 윤계는 황해도관찰사로 있었는데, 오시수의 ‘왕약신강설’을 듣고 대단히 분노하였다. 윤계는 거듭 상소하여 오시수가 전혀 없는 말을 날조하였다며 “전후로 봉사(奉使)하는 신하와 접반(接伴)하는 신하 두 사람이 아무도 듣지 못한 이상한 말을 하는데, 다만 이남이 이 말을 앞에서 제창하고 오시수가 뒤에서 화답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의혹스러워 합니다. 오시수가 장효례와 같은 엉뚱한 사람을 끌어들여 증거를 대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힐난하였다.

이에 남인 정권의 실력자 허적과 윤휴가 황해도관찰사윤계를 잡아다가 국문하도록 계청하면서 윤계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윤계는 오히려 화평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천도(天道)는 밝은 것이니, 내 말이 장차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하고, 체포되어 하옥당한 후 공사(供辭)할 때에도 조금도 비굴한 기색이 없었다. 남인 허적과 윤휴 등은 윤계를 심문하고 나서, 윤계가 꾸며낸 거짓말이라고 숙종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허적은 윤계의 파직만을 주장하였으나, 윤휴는 윤계를 극변(極邊)으로 유배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숙종은 마침내 윤계를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시켰다.[「윤계신도비명」]

그런 가운데 1680년(숙종 6) 사은사로 청나라 연경에 갔던 우리나라 사신이 청나라 통역관 장효례를 만나 ‘조선은 신하가 왕보다 강하다’는 말의 근거를 물었더니, 장효례가 손을 내흔들면서, “본래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경신환국 때 관직에서 쫓겨난 후 유배당하였던 우의정오시수는 이렇듯 장효례가 부정하는 바람에, 원래 없는 말을 날조하였다고 하여 1681(숙종 7)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윤계신도비명」]

한편 현종 시대 나라 안팎에서 송시열의 권위가 현종의 왕권을 제압하였다는 비판에 분개한 숙종은 왕권을 주장하는 남인과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장희빈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정권 다툼을 벌일 때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 귀양 보냈으나, 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심문하고자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에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하였다. 역사상 숙종 때가 가장 당쟁이 심하였고, 그 결과 서인·남인, 노론·소론의 인사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성품과 일화

그는 가슴이 떡 벌어지고 몸체가 우람하여, 남들이 범할 수 없는 위엄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성품이 과단성이 있고 용감하여 서인을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직언을 잘하였으므로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였던 것이다.

1636년(인조 14) 15세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자, 아버지 윤면지가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있다가 고을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올라가고, 백성들은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그가 홀로 현(縣)의 관아(官衙)에 머무르면서 백성들을 타일러 안심시키고, 공사(公私)의 비용을 일일이 적어두며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것을 보고 온 경내의 아전과 백성들이 그를 칭찬하고 그 용기에 감탄하였다. 1641년(인조 19) 19세 때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의 제술(製述)에도 장원하였는데, 시관(試官)들이 그의 「백록동부(白鹿洞賦)」를 보고 말하기를, “이 글은 속유(俗儒)의 솜씨로 지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윤계신도비명」]

젊어서 조모부와 부모를 받들 적에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효성을 다하였는데,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항상 과거급제를 늦게 하여 논봉을 받아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가슴 아프게 여겼다. 형제들이 일찍 죽었으므로 그 조카들을 데려다가 자기 자식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길렀다. 친족들에게도 인자하여 계(稧)를 조직하여 화목을 도모하고, 보첩(譜牒)을 편찬하여 친척끼리의 정의를 다졌다. 시골에 사는 외사촌 형이 매우 가난하여 전장(田庄)을 팔려 하면서 그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그를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고, 즉시 문권(文券)을 작성하여 주고, 그가 달라는 대로 돈을 쳐서 주었다.[「윤계신도비명」]

평상시에는 음식을 소박하게 들고 의복을 검소하게 입었으며,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었다. 문장을 지을 때 문맥이 광대하게 펼쳐졌지만, 한 번 붓을 들면 곧장 글을 막힘이 없이 줄줄 써 내려 갔다. 그는 사부(詞賦)에 더욱 뛰어나서, 중국 초(楚)나라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남방 성운(聲韻)을 깊이 터득하였다. 제가(諸家)의 방략과 기술에 대한 잡설(雜說)을 빠짐없이 섭렵하여 운명론에 뛰어났으나, 한편으로 그는 운명론에 빠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윤계신도비명」] 그러므로 오늘날 그의 문집 『하곡집』이 학계에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공직을 수행할 적에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름을 모르고 오직 한 마음으로 일을 하였다. 대각(臺閣 : 대간)에 있을 때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고, 권귀(權貴)라고 하여 용서하지 않았으며, 비록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하더라도 일찍이 좌절하는 법이 없었다. 중추부를 맡았을 때에는 온갖 일을 계획하고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민첩하고 주도면밀하였으므로, 늙은 아전들이 놀라 혀를 내두르면서 일찍이 만나보지 못한 훌륭한 분이라고 칭찬하였다. 각 지방에 나가서 목사와 관찰사를 지낼 적에는 호령이 명백하고 엄숙하니, 지방의 세력 있고 교활한 토호(土豪)들이 힘을 쓰지 못하였고 가난한 백성들은 편안히 살 수 있었다. 국가의 큰 계책을 실행할 때에는 마치 강물이 터져 내려가는 듯이 세차게 결행하였고, 사세가 지극히 어려운 때에는 마치 칼로써 소 뼈마디에서 살점을 발라내듯이 치밀하게 추진하였다.[「윤계신도비명」]

처음 벼슬길에 나갔을 적에 홍명하(洪命夏)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대가집 출신의 이름난 선비이므로 앞으로 저절로 청현직(凊顯職)을 두루 역임할 것이지만, 그러나 친구들로부터 추천을 받는 협조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윤계가 대답하기를, “궁달(窮達)은 본래부터 정해진 것인데, 어찌 권력 있는 자들의 힘을 빌리겠습니까” 하니, 홍명하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를 칭찬하였다. 공조 판서김만중(金萬重)은 그를 평하기를 “윤계가 을묘년(1675년)에 올린 상소문과 공사(供辭)를 보면, 말이 준엄하고 의리가 정당하여 남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서 끝내 그 음모를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영구히 전할 훌륭한 일이다” 하였다.[「윤계신도비명」]

1671년(현종 12)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재이(災異)로 인하여 구언(求言)하자, 귀척(貴戚)이 횡행하고 환관이 교만한 것과 재상은 중히 여기고 대간은 가벼이 여기는 것과 군제(軍制)가 타당성을 잃어 낭비가 많은 것과 궁장토가 너무 많아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는 것 등을 극력 진언(進言)하였다. 그때 그는 장장 ‘1만여 언’이나 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말들이 당시의 병폐를 절실히 지적하였으므로, 현종이 이를 비변사에 내려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남인 허적이 이정(李楨)·이남과 결탁하여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의 말이 자기들을 비난한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허적은 이정 등과 함께 상소하여 정언윤계를 공격하였다. 윤계도 이에 대항하여 상소하다가 인피(引避)하고 스스로 면직을 요청하였으나, 현종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윤계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익정이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부(長湍府) 오목리(梧木里)의 선영에 있는데,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계신도비명」]

첫째 부인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증 영의정홍영(洪霙)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윤세강(尹世綱)은 첨정이고 차남 윤세기(尹世紀)는 판서이며, 딸은 도정(都正)조태래(趙泰來)와 군수(郡守)이관수(李觀壽)에게 각각 시집갔다. 둘째 부인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통덕랑(通德郞)박휘길(朴暉吉)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낳았다. 3남 윤세수(尹世綏)는 관찰사(觀察使)이고, 4남 윤세위(尹世緯)는 부사(府使)이며, 5남 윤세경(尹世經)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딸은 현감(縣監)이형보(李衡輔)와 사인(士人) 송상유(宋相維)에게 시집갔다.[「윤계신도비명」]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선고(淸選考)』
  • 『농암집(農巖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택당집(澤堂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