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론(少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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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서인에서 분파된 붕당의 하나.

개설

소론은 조선후기 숙종 초반 서인(西人) 내에서 분파된 붕당의 하나이다. 숙종대 후반 노론과 격심한 당쟁을 치르고 경종 연간에 정국을 주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득세하는 대신 소론은 퇴조하였으나, 노론의 보복 정치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영조는 정미환국을 통해 소론 세력을 다시 정치에 기용하였다. 이후 소론 세력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수시로 출사(出仕)와 퇴출이 반복되었다.

1755년(영조 30) 을해역옥(乙亥逆獄)이 소론 세력에 의한 것으로 드러난 뒤 왕에게 소론들 상당수가 스스로를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고 해명하면서 소론의 붕당으로서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그렇지만 소론은 조선말까지 존재하면서 정치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붕당은 선조대 초반에 형성된 동인과 서인으로 시작된다. 이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듯 분화를 거듭하였지만, 서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노서(老西)·소서(少西) 혹은 청서(淸西)·공서(功西) 등의 계파를 형성하거나, 인조 말년경에는 산당(山黨)·한당(漢黨)·낙당(洛黨)·원당(原黨) 등의 계파를 형성하면서 분열 조짐을 보였다. 이런 조짐은 노론과 소론이 분화하는 전조였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직접적인 계기는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부터 1682년 임술고변(壬戌告變)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이었다. 당시 정치적 사건들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훈척 계열인 김석주와 김익훈 등 일부 인물의 탈법 행위가 문제가 되었고, 특히 남인들의 역모 사건을 고변한 임술고변은 김익훈의 무고(誣告)로 판정되었다. 이후 이들의 처벌을 둘러싸고 논란이 발생하였는데, 결정적으로 송시열은 자신의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로 김익훈을 옹호하였다(『숙종실록』 9년 1월 19일). 그러자 일부 서인들이 이에 반대하고 김익훈 등의 처벌을 주장하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었다(『숙종보궐정오실록』 9년 2월 2일). 여기에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논란인 회니시비가 발생하면서 분당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조직 및 역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될 때 소론 계열에는 조지겸(趙持謙)·최석정(崔錫鼎)·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박태보(朴泰輔)·박태유(朴泰維)·임영(林泳)·서종태(徐宗泰)·심수량(沈壽亮)·신완(申琓)·유득일(兪得一)과 박세채(朴世采)·이상진(李尙眞)·남구만(南九萬) 등이 포함되었다.

이 시기 서인의 분당은 정치적인 이유에 그치지 않고, 학문 방법과 내용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소론들은 철저하게 주자학을 신봉하던 노론 계열과는 달리 주자학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이견을 제시하거나 자유로운 학문 연구를 추구하면서 탈주자주의(脫朱子主義) 학풍을 견지하기도 하였다. 박세당의 『사변록(思辯錄)』은 이를 대변한다. 또한 정제두와 같이 일부에서는 당시에 금기시되던 양명학을 수용하면서, 이후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변천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이후에도 초기에는 상호 갈등이 크지 않았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되기 전에는 남인과의 정권 경쟁이 가열(苛烈)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숙종이 탕평책을 추진하면서 노론과 소론은 공존하였다. 물론 중간에 희빈장씨의 처리 문제를 두고 대립이 있었지만 공존을 깨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숙종대 후반 『가례원류(家禮源流)』 시비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거치면서 노론 세력의 정치적·학문적 우위가 결정되었고 소론 세력은 위축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정유독대(丁酉獨對)와 세자 대리청정이 추진되며 숙종의 후계자 문제가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격심해졌다. 회니시비와 같이 종전에는 주로 사문(斯文) 시비 논쟁이던 것이 충역 논쟁으로 변질되면서 살육이 자행되었다.

경종이 즉위한 뒤 노론 측은 왕세제 책봉과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하였으나, 대리청정 시도는 소론에 의해 좌절되었다. 1722년(경종 2) 노론 측이 삼급수(三急手)를 이용해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임인옥사가 발생했다. 임인옥사의 처리 과정에서 노론 사대신인 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를 비롯해 많은 노론 계열 인사들이 참변을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 세력의 처벌과 남인 계열 인사의 등용을 둘러싸고 소론 세력이 급소(急少)·준소(峻少)·완소(緩少) 등으로 분화되었다. 즉 노론에 대해 강경한 처벌 입장을 취하던 세력인 김일경(金一鏡)·이진유(李眞儒) 등이 급소로, 노론의 처벌 대상을 주모자로 한정하자는 주장과 함께 급소의 맹주인 김일경(金一鏡)에 대해 비판적인 서명균(徐命均)·윤순(尹淳) 등이 완소로 분류된다(『경종수정실록』 2년 5월 3일). 그리고 이들 대결 구도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던 조태구(趙泰耈)·최석항(崔錫恒) 등이 준소로 분류되었다.

영조 즉위 후 노론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위축되었던 소론 세력은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소론 세력 내부에서 분화된 완소 계열인 조문명과 송인명·조현명 등이 탕평파로 변신하면서 왕의 탕평책에 협조하였다.

영조는 탕평파의 지지 속에서 순차적으로 자신과 자신을 지지했던 노론에게 주어진 경종의 죽음과 관련된 혐의에서 벗어나는 조치를 취했다. 결국 1741년 경신처분(庚申處分)을 통해 혐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소론 세력의 입장에서는 정치 명분에서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여기에 1755년에 발생한 을해역옥(乙亥逆獄)이 소론이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자 조재호의 주도하에 소론들은 연명(聯名)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상소를 올려 당습(黨習)에 물들었던 것을 자책하였다. 이를 받은 영조는 만족스러워하여 천지가 밝아지고 인심이 바른 곳으로 이르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영조실록』 31년 3월 5일]. 이로써 소론은 붕당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런 와중에 소론 내 세력의 분화가 이루어져, 탕평 세력으로 참여했던 소론 세력들이 정휘량 계열과 조재호 계열로 나뉘었다. 이전부터 준론 계열이던 이종성 중심의 소론은 준론으로 분류되었다. 이 중에서 조재호 계열은 1762년 엄홍복 사건을 계기로 조재호가 화를 당하면서 약화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참변을 당한 임오화변이 발생하고, 이어 후일 정조에 즉위하는 세손이 동궁의 지위에 오르면서 차세대 주자인 동궁이나 중궁전·혜경궁 홍씨 등을 둘러싸고 각 정파의 갈등과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소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재호 계열은 사도세자의 추숭(追崇) 의리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조재호의 신원을 추진하였고, 정휘량 계열은 노론 측 김상로 등과 연계하여 반세손(反世孫) 세력의 선봉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준론 계열로 불리던 이종성 계열은 소론 당색을 유지하는 가운데 일부는 노론화되어 갔다.

정조 즉위 직후인 1776년(정조 즉위년) 9월 왕은 김상철·이경호 등 소론을 불러 놓고 윤음을 내려 편당(偏黨)을 버리고 분쟁을 금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9월 22일]. 이후 소론 세력은 동당(東黨)·남당(南黨)으로 분화되었다. 동당은 김상철이 주도하고 이복원이 후원하는 계열이며, 남당은 서명선이 주도하고 정민시가 후원하는 계열이었다. 동당은 1786년 구선복 옥사에 연루되어 약화되었고, 이후에는 대체로 남당의 서명선 계열이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전에 비해 소론이 붕당으로서의 정치적 성격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따라서 명백한 당론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특정한 정치적 사안에 따라 입장을 표명하는 수준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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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난고(頤齋亂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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