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보(朴泰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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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4년(효종 5)~1689년(숙종 15) = 36세]. 조선 중기 숙종 때에 활동한 문신·학자. 행직(行職)은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이다.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정재(定齋)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박세당(朴世堂)이고,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금성현령(金城縣令)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아버지의 숙형(叔兄)인 당숙(堂叔) 박세후(朴世垕)의 양자가 되었다. 양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윤선거(尹宣擧)의 딸이다. 어려서 글을 형 박태유(朴泰維)에게서 배웠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 원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24세 때인 1677년(숙종 3) 3월에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그러나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南人)들의 탄핵을 받아 이 해 10월 말경 선천(宣川)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1678년(숙종 4) 5월 초순에 석방되었다.

1680년(숙종 6)에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1681년(숙종 7) 2월에 수찬이 되었으며, 그 뒤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이 해 11월 중순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 그 뒤 며칠 안 되어 다시 부수찬이 되고, 이 해 12월 초순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이 해 12월 중순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이때 문묘(文廟)승출(陞黜)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 판서(判書)인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상소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후 서인(西人)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박태보의 환수를 청함에 따라 1682년(숙종 8) 5월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치고 나서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가 5년 동안이나 외방에 있었다. 1686년(숙종 12) 10월에 들어와 다시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이 해 12월에 교리가 되었다. 1687년(숙종 13) 1월에 또 다시 부수찬이 되고, 이 해 2월 초에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이 해 2월 25일 부수찬이 되었으며 2월 30일 다시 이조 좌랑이 되었다. 이 해 5월 1일에는 호남의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암행어사로서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하였고,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었다. 그는 윤선거의 외손자인데도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그 옳고 그름을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하여 나갔다. 1687년(숙종 13) 8월 초순에 홍문관 수찬이 되고, 8월 중순에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이 해 9월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응교로 승진하였다. 1688년(숙종 14) 부모 봉양을 청원하여 파주목사(坡州牧使)로 나갔다. 이때 조정에서는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는데, 그가 부임한 파주에서는 그대로 이들의 위패를 존속시켜 나갔다 하여 면직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그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오두인(吳斗寅)·이세화(李世華) 등과 함께 올렸다. 이 일로 그는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珎島)로 귀양 가는 길에 노량진(露梁津)의 육신사(六臣祠) 옆길에서 졸(卒)하니, 이때 나이가 36세이다.

저서로 『정재집(定齋集)』 14권과, 편서로 『주서국편(周書國編)』이 있으며,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태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보다 총명하였고 매우 박식하였다. 책을 보면 반드시 그 참뜻을 궁구하였는데, 비록 완곡한 표현에 깊은 뜻을 담은 글이라도 한 번만 보면 분석해서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문장을 지을 때는 이치가 승(勝)한 것에 주안점을 두어 한 글자도 군색하지 않았으며, 차분하고 노성해서 스스로 일가(一家)의 법도가 있었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崔錫鼎)·조지겸(趙持謙)·임영(林泳)·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이다.

그는 사람됨이 맑고 고결하였으며, 굳세고 곧은 지기(志氣)를 가졌는데, 일찍이 괴과(魁科)에 발탁되어 문학(文學)으로도 이름이 있었지만, 정사에도 큰 재능을 보였다. 그가 여러 차례 올린 상소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시비를 가리는 데에 공정한 의리에 기준을 두고 조리정연하게 논조를 전개하였으며,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고 의(義)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였다. 송시열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소식(素食)을 하였고, 이어 자손에게 박태보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고 한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5년 5월 4일(기해)조 「박태보 졸기」 참고)

시호와 제향

1723년(경종 3) 10월에 나라에서 문열(文烈)이란 시호를 내렸다. 숙종 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하고 정려(旌閭)하였다. 윤증(尹拯)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경기도 파주(波州)의 풍계사(豐溪祠), 경기도 과천(果川)의 노강서원(鷺江書院), 강원도 이천(伊川)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평북(平北) 선천(宣川)의 정재사(定齋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후원(李厚源)의 딸인데, 후사가 없어서 박필모(朴弼謨)를 양자로 삼았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명재유고(明齋遺稿)』
  • 『서계집(西溪集)』
  • 『약천집(藥泉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