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법(宗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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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내(堂內)나 문중과 같은 친족 조직 및 제사의 계승과 종족의 결합을 위한 친족 제도의 기본이 되는 법.

개설

종법(宗法)은 중국 고대에 형성되어 적장자(嫡長子) 중심 가족 질서 운영의 기본이 되었던 법으로 은대 말기에 출현하여 주나라 초기에 제도화된 것으로 보인다. 종법의 핵심 내용은 가계 계승과 제사이다. 적장자로 집안을 잇게 하고 또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이다. 종법에 의하면 주나라 왕의 적장자는 계속해서 왕이 되고 적장자가 아닌 아들들은 제후나 대부(大夫)가 된다.

그리고 제후나 대부의 맏아들들은 또 제후나 대부가 되고 그 외의 아들들은 각자 자신의 집안의 관리자가 된다. 주왕이나 제후 또는 대부가 되는 맏아들들을 종자(宗子)라고 불렀다. 종자들은 여타의 아들들에 대해 배타적인 특권을 가졌다. 특권은 곧 강력한 힘을 의미하는데, 고대 중국이 이렇게 강력한 힘을 필요로 했던 것은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고대의 종법은 진한 시기 봉건 제도의 해체와 함께 퇴조했다. 종법이 다시 강조되고 의미 부여된 것은 송대에 이르러서이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종법의 부활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계통을 알고 또 지친(至親) 간에 은의를 지키게 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성리학과 함께 송의 종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종법의 보급은 쉽지 않았다. 조선의 독특한 혼속(婚俗)이나 제사 관행 등이 종법의 원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 조선에서도 종법이 어느 정도 보편화되고 적장자 위주의 상속이 자리를 잡게 된다.

내용 및 특징

고대 종법의 구조는 『예기』 대전(大傳)의 “별자(別子)가 조(祖)가 되고, 별자를 계승하는 이가 종(宗)이 되며 아버지[禰]를 계승하는 이는 소종(小宗)이 된다. 따라서 백세(百世)토록 옮기지 않는 대종이 있고 5세(五世)가 되면 옮기는 소종이 있다.”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가계 계승과 제사 문제가 모두 언급되고 있다. 별자란 제후의 아들 중에 적장자를 제외한 아들을 말한다. 여기에서 ‘별자를 계승한 이가 종이 된다.’는 것은 별자와 그 적장자가 대종을 이루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버지만을 계승하는 이가 소종이 된다.’는 것은 별자의 중자(衆子) 즉 대종이 될 수 없는 이들이 소종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대종은 제후에서 갈라져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친족 집단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기 때문에 시조의 묘(廟)를 백세가 지나도록 옮기지 않는다. 그러나 소종은 별자의 중자로서 자기의 아버지를 시조로 하기 때문에 5세가 지나면 묘를 옮기게 된다. 정리하면 별자의 적장자는 별자를 계승하여 대종으로 되고, 별자의 중자들은 대종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 하나의 종, 즉 소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주의 천자는 주왕이면서 같은 성씨의 여러 제후들에게는 대종이 되고, 제후는 제후국의 군주이면서 동족의 경대부에 대해서는 대종이 된다. 조선시대로 말하면 대군(大君) 혹은 군(君)들이 대종이 되는 것이다.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것, 또는 5세가 되면 옮긴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기간 동안 제사를 지낸다는 점이다. 대종과 소종을 이어가는 종자가 그 제사를 담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종법의 핵심 내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분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대종과 소종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다. 오래전의 관습이고 그에 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종이든 소종이든 종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적장자가 가계를 계승하고 제사를 담당한다는 사실이다. 대종과 소종은 그 범위를 나누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종법이 이처럼 가계 계승과 제사를 중시하고 그 주체자로서 종자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예기』에서는 “어버이를 친히 하면 조상을 존중하게 되고, 조상을 존중하면 종을 공경하게 되며, 종을 공경하게 되면 친족을 거둘 수 있으니 친족이 거두어지면 종묘가 엄격해지고 종묘가 엄격해지면 사직이 중해지며 사직이 중하면 백성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이다. 백성을 사랑하게 되면 형벌이 균형 있게 되고, 형벌이 균형 있게 되면 백성이 편안해지며, 백성이 편안해지면 재용(財用)이 충족되고, 재용이 충족되면 백 가지 뜻이 이루어지고, 백 가지 뜻이 이루어지면 예속이 이루어지게 되며, 예속이 이루어지면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존조(尊祖)와 경종(敬宗)을 하는 이유는 집안과 국가, 천하가 예속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종법은 한 집안의 가족 질서이지만 가족 내의 위계질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바로 하는 기반이 되며, 아울러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종법이 발생할 당시 종법의 사회적 의미는 이와 같이 친족 간의 화목과 질서에 의한 사회, 국가의 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종법 관계 사료에서 거듭 강조되는 것은 서자(庶子)가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것과 존조·경종의 의리를 중시하는 것이다. “서자는 아버지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그 종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는 “지자(支子)는 제사를 지낼 수 없으며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종자에게 고하여야 한다.”는 『예기』의 기록들은 종자의 위치를 한껏 높여 준다. 강력한 장자 존중 의식이다. 종법은 곧 하나의 질서이며 그 핵심이 제사인데, 제사를 아무나 지낼 수 있게 한다면 종법 질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종자와 지자의 지위를 구별하고 종자에게는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하여 가족 질서 나아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종법은 부계적, 부권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계승은 아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 존조·경종은 바로 부계의 질서, 부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종법이 강력한 가부장적인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와 같이 강력한 부계적인 혈연관계와 그에 의한 가부장권이 일찍이 형성, 보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종법은 춘추 말기 봉건제의 해체에 따라 점차 그 의미를 잃어 갔다. 한대 이후에도 가계의 계승은 중요시되었으나 고대 종법제에서와 같이 사회 체제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송대에 이르러 종법은 다시 이론화되고 부활한다. 송대 유학의 발흥에 기여한 장횡거(張橫渠), 정이천(程伊川) 등은 종자법을 강조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종통(宗統)과 지친 간에 은의를 알게 하고자 했다.

종자법이 폐해져서 골육 간에 서로 원수가 되어 재산 분쟁을 일으키게 되니 종자법을 세운다면 이러한 분쟁이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종법을 부활하고자 하는 의도는 종법의 사회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는 데에도 있었다. 종자법이 없으므로 조정에 세신(世臣)이 없게 되었으니 만약 종자법을 세운다면 사람들이 조상을 존중하고 근본을 중하게 여길 것이요, 사람이 근본을 중히 여기게 되면 조정의 위세가 저절로 높아질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종자법은 조정의 위세가 갖추어지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보았다. 송대에 가족 간의 화목을 통해 국가의 위엄을 높이고자 한 이유는 송의 국가적인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면이 적지 않다. 금나라와 대치되어 있는 남송의 정치적인 상황이 보다 강한 정신적인 결합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친족 질서의 확립, 나아가 사회 질서 또는 정치 질서의 확립을 가져올 수 있는 종법의 재건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은 성리학과 함께 송의 종법을 수용했다.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종법적 질서를 사회 운영의 기본 틀로 보고 있었다. 따라서 성리학과 종법은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성리학과 종법은 조선의 성리학자나 위정자들에게 선진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초기 조선은 가묘의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가묘는 가계 계승과 제사의 상징이자 그를 위한 공간이다. 가묘 보급은 곧 종법적 질서의 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종법의 일반화는 쉽지 않았다. 조선에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속, 그에 따른 균분 상속, 제사 윤회(輪廻) 등이 있어 종법이 토착화되기 힘든 면이 있었다. 종법적인 가계 계승과 제사 의식은 사대부 계층에게조차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에서 종법은 16세기 말, 17세기 초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성숙한 이후에야 비로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혼속에서 남자 쪽 거주가 일반화되었고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였으며, 4대봉사가 일반화되었다. 또한 가문 또는 종중(宗中)이 발달했고 족보 간행이 활발해졌다. 이른바 종법적 또는 부계적 가족 질서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종법은 조선후기 사회를 이끌어 가는 가장 중요한 제도가 되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수많은 문중 또는 종중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가문을 드러내기 위한 족보 편찬도 빈번해졌다. 사람들은 개인으로서보다는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조선후기 사회는 모든 것이 종법적 가족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의

종법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조선의 가족 제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제사와 가부장성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가족 제도의 많은 문제점은 부계적 가족 제도에서 평등적 가족 제도로의 전환에서 오는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종법에 대한 이해는 현재의 가족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참고문헌

  • 『예기(禮記)』
  • 『주자가례(朱子家禮)』
  • 『소학(小學)』
  • 서양걸 지음, 윤재석 옮김, 『중국가족제도사』, 아카넷, 2000.
  • 박연호, 「조선 전기 사대부례의 변화양상」, 『청계사학』7, 1990.
  • 이순구, 「조선 초기 종법의 수용과 여성 지위의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5.
  • 이종서, 「퇴계 이황(李滉)의 종법(宗法) 이해와 그 특징」, 『역사문화논총』2, 2006.
  • 이춘식, 「서주 종법봉건제도의 기원문제」, 『동양사학연구』26,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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