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언(求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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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주로 재이를 계기로 왕이 신민에게 당시 정치의 잘못된 점을 묻는 정치 행위.

개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국가에서 재이(災異)는 하늘이 왕에게 보내는 경고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재이가 발생하면 왕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면서 어떤 정치적 잘못이 재이를 초래하였는지 신민(臣民)에게 묻는 구언(求言) 교지(敎旨)를 내렸다. 그러면 신민은 자신이 생각하는 당시의 가장 잘못된 정치가 무엇인지를 적어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올렸다. 당시 사람들은 응지상소에서 지적한 내용을 왕이 받아들이는 것을 성군의 자질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구언은 민생을 안정시키고 언로를 확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구언이 행해졌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고, 조선이 민본(民本) 이념을 표방하면서 건국된 이후에야 비로소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내용 및 특징

유교 정치사상에서는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합치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정치를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고 이를 추구하였다. 양자는 모두 ‘덕(德)’이라고 하는 하나의 도덕 원리에 의해 운행되었다는 점에서 합일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천인합일의 정치는 하늘의 권위를 빌어 왕의 덕치를 보장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인식에서 재이는 천도와 인도가 불일치하여 생겨난 결과였고, 그것은 하늘이 왕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재이가 발생하면 왕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면서 신민에게 어떤 정치의 잘못이 재이를 초래했는지를 물었다. 이 구언 교지에는 대체로 네 가지 사항이 담겨 있다. 구언을 하게 된 동기, 왕의 자책, 구언의 대상, 진언할 내용의 범위 등이다(『세종실록』 5년 4월 25일).

구언에서 그 대상은 특별히 범위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종대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제한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상소를 올릴 수 있었다. 또한 진언할 내용의 범위도 왕의 개인적 허물에서부터 구체적인 정책의 잘못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았다. 혹 잘못된 발언이라 하더라도 죄를 묻지 않겠다는 점을 구언 교지에 명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만 상소자가 자신의 개인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응지상소의 처리 방식은 왕대별로 조금씩 달랐다. 왕이 직접 읽고 시행할 만한 조항을 의정부에 내리면 여기서 육조(六曹)와 함께 의논하여 사목(事目)을 만들어 이를 가지고 왕이 가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반대로 먼저 의정부·육조·승정원 등에서 상소의 내용을 정리하여 사목을 만들어 왕에게 보고하여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초기에는 모두 75차례의 구언이 행해졌다. 약 1년 4개월에 한 번 꼴로 구언을 한 셈이다. 75회의 구언 가운데 재이로 인한 구언이 약 80%에 이르고, 나머지는 왕의 즉위라든가 언로(言路)를 열기 위한 구언이었다. 재이 중에서는 가뭄이나 홍수처럼 농사에 영향을 미치는 재이가 대부분이었고, 성변(星變)으로 인한 구언은 6회에 불과하였다. 주로 왕의 안위와 관련된 성변보다 민생과 직결된 재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은 이 시기의 구언이 민본 정치를 위한 것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구언에 의해 상소가 올라오는 숫자는 천차만별이었다. 한 건도 올라오지 않아 다시 구언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200여 통의 상소가 한꺼번에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태종실록』 15년 6월 22일).

조선초기에 상소의 주체를 알 수 있는 경우는 모두 260건이다. 이 가운데 상소의 주체가 개인인 경우는 196건이고, 나머지 64건은 관서 명의의 상소였다. 역시 상소는 개인 명의의 상소가 훨씬 많았다. 먼저 개인이 주체인 경우를 보면, 196건 가운데 184건이 품계를 지닌 현직과 전직 관인들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양반 지배층이었던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경관(京官) 6품 이상의 현직 참상관(參上官)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결국 이들이 당시의 언로를 독점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음으로 관서 명의의 상소를 보면, 대부분이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三司)의 상소였다. 주목되는 것은 유독 성종대에 언론 삼사의 상소가 개인 상소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1484년(성종 16) 이후에 이 같은 경향이 더욱 심해지는데, 이 시기에 개인 상소는 4건에 불과한 반면 삼사의 상소는 19건에 이른다. 언론 삼사가 언로를 독점하면서 현직 고위 관리에 의한 언론 활동은 크게 위축된 셈이다. 이는 초기 사림(士林)이 언론 삼사를 통해 등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응지상소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상소에서 제기된 문제는 모두 702건에 달한다. 이를 개인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수성(修省)’과 구체적인 제도상의 문제를 제기한 ‘제도’로 분류하면, 제도와 관련된 상소가 487건으로 전체의 70%에 육박한다. 조선초기에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들기 위해 제도가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도와 관련된 내용을 다시 정치·경제·사회 등으로 분류하면, 정치에서는 인사 규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경제에서는 공물에 대한 내용이 전세(田稅)요역(徭役)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회에서는 역시 민을 구휼하는 휼정(恤政)이 가장 많았다.

왕대별로는 성종대에 이르러 제도와 관련된 상소가 크게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수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는 성종대에 『경국대전』의 반포로 국가의 통치 체제가 완성되면서 종래 훈구대신들이 주도했던 정치를 극복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고, 이를 위해 유교적 도덕의 실천을 강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또한 성종대에는 제도의 측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경제 관련 상소가 급감하는 상황에서도 공물에 대한 상소는 오히려 증가하였고, 휼정에서도 장리(長利)의 폐단이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성종대에는 의창(義倉)의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고 사창제(社倉制)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국가의 진휼 정책이 마비되었다. 이는 백성의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대신 사가(私家)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장리의 폐단이 집중적으로 제기된 것은 이 같은 백성의 처지가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변천

제도보다는 왕의 수성을 강조하고 국가가 민생을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구언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한 연산군을 대신해 즉위한 중종은 언로를 회복하기 위해 재위 전반기에 자주 구언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을 경험한 신료들은 왕의 도덕적 실천만이 하늘의 경고에 응답하는 실질(實質)이라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응지상소에서도 제도의 개혁을 통한 민생의 안정보다는 끊임없이 왕의 수성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수성 또는 수성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제시된 ‘정심(正心)’은 모두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구체성이 결여된 상소는 왕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 결과 구언은 허례로 인식되어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16세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왕의 수성이 강조되고 구언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왕의 수성을 통해 이루어야 할 현실 정치에서의 실질적 공효인 ‘휼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민생과 직결되었다는 점에서 구언의 동기로 가장 중시되던 가뭄이 더 이상 심각한 재이로 인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변이나 일변(日變)과 같은 왕의 안위와 관련된 재이가 중시되었다. 건국 초의 민본 이념이 이 시기에 이르러 변질된 것이다. 노비가 급증하고 도적이 횡행하면서 극심한 사회 혼란이 계속된 것은 그 결과였다.

17세기 이후에도 구언은 계속되었지만 이 시기의 구언이 어떤 정치적 기능을 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충분하지 않아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8세기 탕평 정치기에는 응지상소에서의 정치적 발언이 자주 제재를 받으면서 구언이 형식적인 정치 행위에 불과하였고, 그 결과 19세기 세도 정치기의 구언 역시 형식에 그치면서 그 대상도 대신과 삼사에 국한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김인걸, 「19세기 ‘세도정치기’의 구언교(求言敎)와 응지소(應旨疏): ‘탕평정치기’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문화』5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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