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복(朴應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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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0년(중종 25)~1598년(선조 31) = 69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경중(慶仲)이고, 호는 졸헌(拙軒)이다. 행직은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박소(朴紹)이고,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사섬시(司贍寺)정(正)홍사부(洪士俯)의 딸이다. 증조부는 상주목사(尙州牧使)박임종(朴林宗)이고, 조부는 이조 정랑박조년(朴兆年)이다. 박응천(朴應川), 박응순(朴應順), 박응남(朴應男)의 동생이고, 박응인(朴應寅)의 형이다.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숙부(叔父)이다. 유조순(柳祖詢)·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다.

명종 · 선조 시대의 활동

1549년(명종 4)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1564년(명종 19)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저작(著作)이 되었다. 이어 추천을 받아 사관(史館)으로 들어가 봉교(奉敎)가 되었으며, 전적(典籍),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육조(六曹)에서는 예조 좌랑(佐郞), 병조 좌랑과 형조 정랑(正郞), 예조 정랑, 병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대간(臺諫)에서는 정언(正言), 지평(持平), 헌납(獻納), 장령(掌令), 사간(司諫),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서는 사예(司藝), 사성(司成)을 역임하였다. 제사(諸司)에서는 내섬시(內贍寺)첨정(僉正), 종부시(宗簿寺) 첨정, 봉상시(奉常寺) 첨정, 사복시(司僕寺)정(正), 예빈시(禮賓寺) 정, 상의원(尙衣院) 정을 역임하였다. 성랑(省郞)은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동서 분당이 되어 붕당 정치가 시작되자, 그는 한때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힐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1577년(선조 10) 10월에 집의(執義)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78년(선조 11)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나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어 상복(喪服)을 입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독실히 추모하면서 3년간 시묘 살이를 하는 등 스스로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상복을 벗자 다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가 1580년(선조 13) 12월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고, 공조 참의(參議), 호조 참의, 형조 참의, 병조 참지(參知), 병조 참의을 역임하였다.

그가 병조 참의로 있을 때, 당시 병조 판서(判書)였던 이이(李珥)를 배척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지고 이이를 지지하는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사직하였다. 1589년(선조 22) 12월에 특별히 병조 참판(參判)에 제수되었다. 그 뒤 대사헌, 호조 참판 겸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거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예조 참판 겸 부총관(副摠管)으로 선조 임금을 호종하였고, 평안도 의주(義州)행재소(行在所)에서 대사간공조 참판을 지냈다. 1593년(선조 26)에 공조 참판으로 임금을 호종하고 환도하던 중 황해도 해주(海州)에 이르러 병이나자 대사간으로 교체되어 해주에 머물면서 중전(中殿:의인 왕후)을 호위하였다. 1595년(선조 28)에 중전을 호종하여 환도하였고 환도 후에는 형조 참판이 되었으며 1596년(선조 29) 12월에 다시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중추부(中樞府) 동지사로 수안(遂安)에서 중전을 호위하였다. 1568년(선조 31) 7월에 병환이 나 향년 69세로 수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응복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에 어머니를 따라 한양으로 왔다. 어머니가 아들들을 위해 반드시 유명한 스승을 구하여 가르쳤으므로, 그 어머니를 세상에서는 맹자(孟子)의 어머니에 견주었다. 7세 때부터 스승에게 글을 배우고 나서 온종일 어머니 곁에서 글을 읽었으므로 어머니가 기뻐하였고 만년에 매양 손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하였고 친족들과 화목하였다. 마음 씀이 충실하고 몸가짐이 차분한데다가 일을 당하면 신중히 대처하고 사람을 후하게 대우하였으므로 벗들이 믿고 동료들이 존경하면서 사랑하였는가 하면 가난한 친구들은 의리에 감동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잘못한 것을 보았을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경계해 주었으며, 세태(世態)를 교묘하게 잘 영합하는 자에 있어서는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기었다. 가문이 대대로 청빈하고 그가 또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여색(女色)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가정의 살림살이에 담담하였으며 의복과 음식도 서생(書生)이었을 때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오직 서적을 많이 탐독하여 비록 궁중에서 숙직할 적에도 섭렵하고 수록하는 등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으므로, 더욱더 고사를 많이 알아 자제들과 이야기하면 끝이 없었다고 한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金村)에 있다. 최입(崔岦)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부인 선산임씨(善山林氏)는 별좌(別坐)임구령(林九齡)의 딸인데,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 박동윤(朴東尹)은 세자부솔(世子府率)이고, 2자 박동열(朴東說)은 홍문관 교리(敎理)이며, 3자 박동망(朴東望)은 평산부사(平山府使)이고, 4자 박동량(朴東亮)은 이조 참판이다. 1녀는 정혜연(鄭惠衍)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잠곡유고(潛谷遺稿)』
  • 『난중잡록(亂中雜錄)』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간이집(簡易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