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남(朴應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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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7년(중종 22)~1572년(선조 5) = 46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旨)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이다. 자는 유중(柔仲)이고, 호는 남일(南逸)·간재(艮齋)·퇴암(退菴)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박소(朴紹)이고,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사섬시(司贍寺)정(正)홍사부(洪士俯)의 딸이다. 증조부는 상주목사(尙州牧使)박임종(朴林宗)이고, 조부는 이조 정랑박조년(朴兆年)이다. 박응천(朴應川), 박응순(朴應順)의 동생이고, 박응복(朴應福), 박응인(朴應寅)의 형이다.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숙부이다. 유조순(柳祖詢)·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다.

명종 시대의 활동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여, 1552년(명종 7)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1553년(명종 8)에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1555년(명종 10) 7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 해 10월에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었는데, 검토관(檢討官)을 겸하였다. 1556년(명종 11) 10월 병조 좌랑(佐郞)이 되고, 1557년(명종 12) 2월에 다시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으며, 5월에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해 6월에는 수은어사(搜銀御史)로 평안도에 갔다가 왔다. 7월에는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고, 8월에 다시 병조 좌랑이 되었으며, 10월에는 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558년(명종 13) 5월에 이조 좌랑이 되고, 1559년(명종 14) 9월에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1560년(명종 15) 6월에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이 되고, 10월에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 1561년(명종 16) 4월 초에 사복시(司僕寺)부정(副正)이 되고 4월 말경에 사복시 정이 되었으며, 윤5월에 다시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이 해 6월에 내자시(內資寺)정(正)이 되고, 9월에 또 다시 의정부 사인이 되었으며, 11월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1562년(명종 17) 7월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9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 1월에 좌부승지(左部承旨)가 되었고, 8월 중순에 형조 참의(參議)가 되었으며, 8월 말경에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고, 10월에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564년(명종 19) 2월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고, 6월에 호조 참의가 되었으며, 7월에 다시 승정원 우승지가 되었다. 1565년(명종 20) 2월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고, 5월에 병조 참의가 되었으며, 10월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11월에는 병조 참의가 되었다. 1566년(명종 21) 1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며, 3월에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 이 해 6월에 이조 참의가 되고, 11월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 4월에 다시 이조 참의가 되고, 6월에 승정원 좌승지가 되었다.

선조 시대의 활동

1567년(선조 즉위) 10월말에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1571년(선조 4년) 10월 중순 병으로 체직되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1572년(선조 5) 9월 24일 향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에는 거리낌 없이 말하는 기풍이 있어 전후에 탄핵하고 논박한 것이 80여인에 이르렀는데, 국정을 전단하던 윤원형(尹元衡)·이양(李樑) 등을 모두 배격하여 제거하였으니, 선조조(宣祖朝)의 청명한 정치에 그의 힘이 많았다. (『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8년 3월 26일(계미)조 기사 참고)

성품과 일화

박응남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여덟 살에 어머니를 따라 한양에 와서 유조순(柳祖詢)에게 배우고, 뒤에 성제원(成悌元)과 이중호(李仲虎)에게서 배웠으며, 사귄 벗은 박순(朴淳)과 기대승(奇大升) 등 여러 사람이었다. 기대승이 박순에게 박응남에 관하여 말하기를, “우리 벗 가운데 유중(柔仲)이 글을 읽어 소득이 많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오직 유중만이 정승의 직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타고난 자품이 엄정(嚴正)하여 비리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악을 미워하지 않으면 이는 선행을 하는 길을 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옳지 않는 일을 보면 비록 친근한 사람이나 오래 사귄 사람이라도 반드시 통렬히 배척하였다. 농담이나 하고 행실이 단정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대뜸 자리를 옮기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가 하면, 조정에 나가 발언한 것도 한결같이 이를 위주로 하였다. 이로 인해 그를 원망한 사람이 세상에 가득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심지어 갓을 털며 나와 서로 축하하기도 하였다. 이이(李珥)도 『일록(日錄)』에서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우직하여 과감히 말하였고 기탄없이 탄핵하였으므로 원망한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박응남의 성품은 신응시(辛應時)와 나눈 대화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박응남은 신응시의 문정(門庭)에 손님이 많은 것을 보고 물으면서 “나는 평생 동안 사귄 친구가 두세 사람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가깝게 지낸 적이 없습니다. 직책이 대헌(臺憲)이고 뜻이 혼탁한 조정을 격양(激揚)시키자는데 있는데, 이미 그들과 친근히 지내놓고 나서 다시 그들의 죄를 탄핵한다면 원한이 더 깊어질 것이니, 애당초 서로 친근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그에 대한 사관의 평가를 볼 수 있는 기록도 있다. 『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20년 11월 17일(경술)조 기사에는 당시 사간원 대사간이었던 그에 대하여 “박소(朴紹)의 아들이다. 겸손하고 신중하며 말이 적었다. 조행이 단정하며 돈후하고 검약해 사치를 하지 않았고, 취향도 정직했다. 성품이 매우 확고해 남을 따라 좌우되지 않았다. 단지 인색해서 궁핍한 친족이 있어도 돌보아 주지 않아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라고 하였다. 또 명종 21년 12월 6일(임진)조 기사에는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그에 대하여, “몸가짐을 삼갔고 권세를 좇지 않았으며 묵묵히 스스로를 지켰으나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치소(治所) 서쪽 의곡리(義谷里)에 있다. 1732년(영조 8) 조정에서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하였고,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다. 박필주(朴弼周)가 묘표(墓表)를 지었다. 부인 윤씨(尹氏)는 장원서(掌苑署)별좌(別坐)윤화(尹和)의 딸인데,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 박동도(朴東燾)는 군수(郡守)이고, 2자는 박동휴(朴東烋)이며, 3자 박동점(朴東點)은 현감(縣監)이다. 1녀는 이암(李巖)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이정간(李挺榦)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계전서(沙溪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