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인(朴應寅)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32년(중종 27)~1606년(선조 39) = 75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다. 자는 원중(元仲)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지제교(知製敎)박소(朴紹)이며, 어머니 홍씨(洪氏)는 홍사부(洪士俯)의 딸인데, 충의위(忠義衛)박집(朴緝)의 양자가 되었다. 증조부는 박임종(朴林宗)이고, 증조모 허씨(許氏)는 허손(許蓀)의 딸이다. 조부는 박조년(朴兆年)이고 조모 윤씨(尹氏)는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유조인(柳祖訒)에게 수업하였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58년(명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뒤에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 주부(主簿)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7월에 상의원(尙衣院)정(正)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사간원에서 “연안부사박응인은 성품이 느슨하여 정사를 아전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지금 농사철이 되었는데도 농사를 잘 권면하지 않아 1백리 기름진 땅이 거의 모두 황무지가 되었으니,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라고 아뢰어 파직을 당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7년 4월 17일) 1595년(선조 28)에 봉산군수(鳳山郡守)가 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체차되었다. 1599년(선조 32)에 인의(引儀)가 되었고, 그 해 7월에 중전(中殿)의 수안(遂安) 유주(留駐) 때 이의 호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였다 하여 1급이 가자되었으며, 그 해 9월에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1603년(선조 36)에 돈령부 도정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75세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남계집(南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