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주(朴弼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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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5년(현종 6)~1748년(영조 24) = 84세]. 조선 중기부터 후기인 숙종(肅宗)~영조(英祖) 때의 문신.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과 의정부 좌찬성(左贊成) 등을 지냈고,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자는 상보(尙甫)이고, 호는 여호(黎湖)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군수(郡守)박태두(朴泰斗)이고, 할아버지는 첨정(僉正)박세교(朴世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금양군(錦陽君)박미(朴瀰)이며, 증조할머니는 선조(宣祖)의 다섯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이다.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이형(李泂)의 딸이며, 아들은 양자 박사근(朴師近)이 있다.

숙종~영조 시대 활동

1716년(숙종 42) 11월 돈녕부(敦寧府)참봉(參奉)이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42년 11월 25일] 1718년(숙종 44) 재상 송상기(宋相琦)의 추천으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자의(諮議)가 되었고, 1720년(숙종 46) 2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44년 2월 27일, 숙종 46년 2월 10일]

1725년(영조 1) 8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 경연관(經筵官)으로 추천되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1년 8월 10일, 영조 1년 12월 27일] 1728년(영조 4) 9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1733년(영조 9) 8월 장악원(掌樂院)정(正)이 되었고, 그 해 9월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4년 9월 14일, 영조 9년 9월 17일] 1735년(영조 11) 11월 보양청(輔養廳)의 요속(僚屬)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 2월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1년 11월 29일, 영조 12년 2월 30일] 1737년(영조 13) 5월에는 사헌부 집의와 세자시강원 진선이 되었고, 7월에는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3년 5월 18일, 영조 13년 5월 27일, 영조 13년 7월 12일] 1738년(영조 14)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으며, 1740년(영조 16) 4월 세자시강원 찬선(贊善)이 되었는데, 1741년(영조 17) 8월과 1742년(영조 18) 1월에 서원을 철폐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상소하여 기자[箕聖] · 공자(孔子) · 주자(朱子)를 모셨던 사우(祠宇)인 삼성사(三聖祠)의 원우(院宇)는 훼철(毁撤)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영조실록』영조 14년 6월 19일, 영조 16년 4월 25일, 영조 17년 8월 7일, 영조 18년 1월 2일] 그리고 그는 1742년(영조 18) 3월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8년 3월 30일]

1743년(영조 19) 11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영조실록』영조 19년 11월 21일] 이어 1746년(영조 22) 윤3월에도 이조 판서(判書)가 되었으나 상소하여 여러 차례 사직하고 나가지 않자, 왕이 강권할 수 없음을 알고 그 해 7월 체직을 허락하였다.[『영조실록』영조 22년 윤3월 6일, 영조 22년 7월 5일, 영조 22년 7월 13일] 그러나 같은 달 다시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는데, 이번에도 상소하여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영조실록』영조 22년 7월 24일] 그러다가 1748년(영조 24) 1월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고, 그 해 4월 특별히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이 되었으며, 그 해 5월에는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를 겸하였다.[『영조실록』영조 24년 1월 8일, 영조 24년 4월 18일, 영조 24년 5월 25일] 같은 해 윤7월 9일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84세이다.[『영조실록』영조 24년 윤7월 9일] 이후 그해 10월에 문경(文敬)의 시호를 받았고, 1755년(영조 31) 12월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영조실록』영조 24년 10월 3일, 영조 31년 12월 8일]

저서로는 『여호집(黎湖集)』·『독서수차(讀書隨箚)』·『주자왕복휘편(朱子往復彙編)』·『춘추유례(春秋類例)』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필주(朴弼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생활이 곤궁해도 지조를 굳게 지키면서 학문에 독실했는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1만 번이나 읽었다 한다. 두어 칸 되는 작은 집에 살면서도 태연하였으며, 두문불출하면서 조신(操身)하고 교유(交遊)는 넓히지 않았다. 때때로 김간(金榦) · 권상하(權尙夏) · 김창흡(金昌翕)에게 가서 학문에 대해 논하였는데 모두 그에게 굴복하였으므로, 같은 동료들이 교우(交友)로 대하였다. 그의 성격은 젊어서는 좀 편협했었는데 늙어서는 온화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한다. 그는 경국제세(經國濟世)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으나, 청고(淸苦)한 지조는 더할 수 없이 훌륭했다고 전해진다. 숙종 · 경종(景宗) · 영조의 세 조정에서 모두 예우(禮遇)를 받았다.[『영조실록』영조 24년 윤7월 9일]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암집(燕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