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량(朴守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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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1년(성종 22)~1554(명종 9) = 64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인종(仁宗) · 명종(明宗)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참찬(參贊)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자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莪谷)이다. 본관은 태인(泰仁)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장성(長城)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 판서박종원(朴宗元)이고,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평호공(平胡公)김개(金漑)의 문인이다.

중종 시대의 활동

1513년(중종 8)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1514년(중종 9) 별시(別試)문과(文科) 을과(乙科) 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으로 들어가 광주(光州) 주학(州學)의 분교관(分敎官)이 되었다.

1515년(중종 10) 승문원(承文院)으로 들어가서 부정자(副正字)에서 박사(博士)로 승진하였고, 종6품하 선무랑(宣務郞)의 품계에 올랐다. 성균관 전적(典籍), 예조 좌랑(佐郞), 사간원 정언(正言)을 전임하였으며, 호서(湖西) 지방 도사(都事)로 나갔으나, 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임기가 차자 형조 정랑(正郞)으로 전직되어 역시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였다. 1522년(중종 17)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형조로 옮겼으며, 1524년(중종 19) 병조 정랑이 되었다. 1525년(중종 20)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 고을을 자청하여 고부군수(古阜郡守)로 나갔다. 고부군수에 부임한 지 3년 만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1529년(중종 24) 6월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고, 1530년(중종 25) 3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그해 5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그 뒤에 사도시(司䆃寺)부정(副正)을 거쳐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 1531년(중종 26)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보성군수(寶城郡守)로 나갔다가, 1년이 지나, 1532년(중종 27)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 사성(司成), 내섬시(內贍寺)정(正), 군기시(軍器寺)정(正)을 역임하였다.

1534년(중종 29) 함경도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되었는데, 안원보(安原堡)권관(權管)인 전주남(全周男)이 야인(野人)들에게 임의로 우마(牛馬)를 준 사실을 발견하고도 조정에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1536년(중종 31)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가, 그해 승문원 판교(判校) 겸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이 되었다. 이어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병조 첨지(僉知)가 되었고, 그해 12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경연 참찬관(參贊官), 춘추관 수찬관(修撰官) 등의 관직을 겸임하였다. 1537년(중중 32) 의주(義州) 별전위사(別錢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였다. 그해 우승지(右承旨)가 되고, 얼마 안 되어 함경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1538년(중종 33) 2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그해 4월 공조 참판(參判)이 되었으며, 그해 7월 호조 참판이 되었다. 1539년(중종 34) 오위 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가 예조 참판이 되었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요청하여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나갔는데, 1542년(중종 37)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

인종·명종 시대의 활동

1545년(인종 1)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편두통(偏頭痛)을 앓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벼슬하지 못하였다. 1546년(명종 1)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고, 그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는데, 그해 4월 청백리에 뽑히게 되었다.(『동각잡기(東閣雜記)』 하권 참조) 1547년(명종 2)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가 되었다가, 1548년(명종 3) 3월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되고, 그해 춘추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3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어, 오위 도총관(五衛都摠管)을 겸임하였다. 1551년(명종 6) 2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그해 8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552년(명종 7) 7월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고, 9월에 다시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청렴하고 근신하는 관료에 주세붕(周世鵬) 등과 함께 초계(抄啓)되어 특별히 포상을 받았다.(『국조보감(國朝寶鑑)』 22권 참조) 1553년(명종 8) 1월 다시 한성부 판윤에 임명 되었다가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554년(명종 9) 1월 19일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64세였다. 그는 의정부 우참찬을 역임할 당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성품과 일화

그는 성품이 간결하고 중후하며 신중하고 치밀한데다가 예법(禮法)으로 자신을 통제하였으므로 겸손하였다. 또한 문장을 잘 지었으나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과 사귈 때 지나치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고, 향리에 있을 때에는 근신하였으며, 항상 만족할 때 그치는 것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는 다스리는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는데, 사람들이 의리에 벗어나는 일은 감히 털끝만큼도 그에게 거론하지 못하였다. 조정에 나가 38년 간 벼슬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나 조그만 집 한 채도 없었다고 한다.

또 그는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초야(草野)의 출신으로 외람되게 판서(判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묘소와 비문

1805년(순조 5) 1월 나라에서 정혜(貞惠)의 시호를 내려주었다. 묘소는 전라도 장성현(長城縣) 호구(狐丘)의 선영에 있는데, 묘지명(墓誌銘)은 김인후(金麟厚)가 지었다. 부인 무송유씨(茂松庾氏)는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자녀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박사우(朴思愚)로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고, 차남은 박사로(朴思魯)로 풍저창(豊儲倉) 봉사(奉事)를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각잡기(東閣雜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해동역사(海東繹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