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왕후(端敬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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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7년(성종 18) ~ 1557년(명종 12) = 71세]. 조선조 전기 중종 때 왕비.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곧바로 박원종(朴元宗)에 의하여 왕비에서 폐출(廢黜)되었으므로, 폐비(廢妃)신씨(慎氏)라고 부른다. 본관은 거창 신씨(居昌愼氏)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좌의정(左議政)신수근(慎守勤)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한충인(韓忠仁)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신승선(愼承善)의 손녀딸이고, 연산군의 왕비 신씨(慎氏)의 조카이다. 사림파(士林派)는 폐비 신씨의 복위(復位)를 주장하고, 훈구파(勳舊派)는 이에 반대하였는데, 훈구파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사림파를 타도하였다.

성종~연산군 시대 부부인 신씨의 행복한 시절

중종의 폐비 신씨는 1487년(성종 18) 1월 14일에 태어났는데, 신수근의 4남 3녀 중에서 둘째딸이었다. 이때 아버지 신수근은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고 할아버지 신승선은 병조 판서였다. 그해 3월 고모 신씨가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어 연산군과 혼인하여 입궐(入闕)하였다. 거창 신씨(居昌愼氏) 가문이 한창 번영할 때 16세의 고모 신씨는 12세의 연산군과 혼인하여 집을 떠났으므로, 고모와 조카딸은 한 집안에서 살면서 서로 온정을 나눌 시간은 없었다. 할아버지 신승선은 예조 판서를 거쳐, 1491년(성종 22) 이조 판서가 되었고, 아버지 신수근은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1493년(성종 24) 호조 참의가 되었다. 1494년(성종 25) 할아버지 신승선은 마침내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올라서, 성종 말년에 거창 신씨는 재상 집안이 되었다. 성종 시대 폐비 신씨는 7~8세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명문가의 사대부 집안 규수가 되기 위한 엄격한 예절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1494년 12월 성종이 승하하고, 19세의 연산군이 즉위하여, 연산군은 장인 신승선과 처남 신수근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였다. 소심한 연산군은 정사를 볼 때마다 처남 신수근에게 하나하나 물어보고 신수근의 의견에 따라서 결정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왕의 명령은 모두 신수근에게서 나온다.’고 비난하였을 정도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1년 1월 7일) 1495년(연산군 1) 연산군은 장인 신승선을 좌의정에서 영의정으로 승진시키고, 1496년(연산군 2) 처남 신수근을 우승지(右承旨) ·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시켰다. 그때 연산군의 왕비 신씨가 세자(世子)이황(李*)을 낳았으므로, 거창 신씨 가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드높았다.[『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12월 18일]

그때까지 연산군은 자순대비(慈順大妃: 정현왕후) 윤씨를 생모로 알고, 자순대비가 낳은 진성대군(晉城大君)이역(李懌)을 친동생으로 알고 있었다. 진성대군이 혼인할 나이가 되었으므로, 연산군은 처남 신수근의 둘째딸을 동생 진성대군의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이리하여 1499년(연산군 5) 진성대군은 도승지신수근의 딸 신씨와 가례(嘉禮)를 올렸는데, 관례에 따라 신씨는 부부인(府夫人)에 봉해졌다. 그때 중종은 12세이고, 부부인 신씨(慎氏)는 13세였다. 부부인은 군호(郡號)가 앞에 붙는데,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아마도 거창군과 관계가 있는 칭호였을 것이다. 당시 조혼(早婚)이 널리 행하여졌고, 또 남자가 부인보다 나이가 2, 3세 정도 적은 것이 보통이었는데, 진성대군은 부부인 신씨보다 한 살 아래였다.

효성과 우애가 많았던 연산군은 진성대군과 부부인 신씨를 위하여 새로 집을 크게 지어서 대궐에서 나가서 살도록 하였다. 그 집을 짓는 데 수군(水軍)을 동원하였는데, 흉년이 들어서 양식을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1500년(연산군 6) 2월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진성대군의 집을 짓는 데 수군(水軍)들이 1백 40일의 역사를 한다고 하는데, 군인들의 고통은 자기 양식을 구해 가지고 다니는 일입니다. 대군의 집은 가을을 가다려 짓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연산군이 의정부 정승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집을 빨리 짓도록 독촉하였다. 또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진성대군이 대궐에서 이사 나갈 때[出閤] 준례에 따라서 곡식 7천 석을 주어야 하는데, 내수사(內需司)에 저장한 것이 부족하다. 국고(國庫)의 곡식을 가지고 충당해서 주려고 하는데, 정승들에게 물어 보라.” 하니, 정승들이 아뢰기를, “대군에게 줄 물건이 적지 아니하니, 내수사의 저장이 부족하면 후년을 기다려서 충당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국고의 저장을 가지고 충당하여 주는 것은 전례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연산군이 의정부 정승들의 말을 듣지 않고 국고의 곡식을 충당해 주게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 2월 7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 2월 12일) 부부인 신씨는 14세 때 진성대군과 함께 대궐을 나와서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많은 하인과 시녀를 거느리고 살았다.

연산군은 임사홍(任士洪)의 밀고(密告)를 듣고, 비로소 생모가 자순대비윤씨가 아니고 폐비(廢妃)윤씨(尹氏: 제헌왕후)라는 사실을 알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서 생모 윤씨를 왕비에서 폐출할 때 관련이 있는 대신과 관료들을 모두 죽였다. 그때 연산군은 생모를 폐출시킨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엄숙의(嚴淑儀) · 정숙의(鄭淑儀)를 죽이고, 두 숙의(淑儀)가 낳은 안양군(安陽君)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이봉(李㦀)을 귀양 보냈다가 죽였다. 그러므로 자순대비와 진성대군이역도 크게 위험을 느꼈고, 부부인 신씨도 불안에 떨었다. 그 무렵 연산군은 사냥을 나가면서 동생 진성대군을 데리고 갔다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 때 연산군은 준마를 타고서 진성대군에게 말하기를, “나는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갈 터이니, 너는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오라. 나보다 늦게 오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하였다. 진성대군은 서형(庶兄) 영산군(寧山君)이전(李恮)의 도움을 받아서 그의 빠른 말을 타고 연산군보다 먼저 대궐 문에 도착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영산군과 그 말은 모두 진성대군을 살리기 위하여 하늘이 때맞추어 내려준 것이다.” 하였다.[『부계기문((涪溪記聞)』] 고모 왕비 신씨가 연산군의 왕비로서 진성대군과 부부인 신씨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신수근도 좌의정으로서 연산군을 보필하면서 음성적으로 사위와 딸을 지켜주었다. 그러므로 연산군 시대 12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었으나, 부부인 신씨와 진성대군은 사랑과 신의로써 서로 의지하면서 참고 견딜 수가 있었다.

중종 반정과 폐비 신씨의 비참한 시절

1506년(연산군 12) 중추부 지사박원종(朴元宗)과 전 이조 참판성희안(成希顔)반정(反正)으로 진성대군을 옹립하려고 계획하고, 우의정강귀손(姜龜孫)을 비밀리 좌의정신수근에게 보내어 그 생각을 떠보게 하였다. 우의정강귀손이 좌의정신수근에게 넌지시 묻기를, “누이와 딸 중 어느 쪽이 더 정이 가는가?” 하니, 신수근이 얼른 그 뜻을 알아차리고 정색을 하면서 대답하기를, “다만 세자(世子)의 영명(英明)함을 믿을 뿐이다.” 하였다. 그 말을 전해들은 박원종이 직접 신수근을 만나서 여러 가지 말로써 설득하고 은근히 그의 뜻을 탐색하였다. 신수근은 박원종의 제의를 거절하기를, “내가 이미 임금으로 섬겼는데, 매부를 폐위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은 나는 못하겠다.” 하였다. 박원종은 신수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돌아섰다.[『서당사재(西堂私載)』 권11 「좌의정신공시장(左議政愼公諡狀)」] <갑자사화> 때 전라도에 귀양가 있던 이과(李顆)가 전라도의 병사(兵使) · 수사(水使) · 수령들과 함께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연산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온다는 소문을 듣고, 박원종은 거사할 기일을 앞당겨서, 9월 2일로 정하였다. 9월 2일 연산군이 황해도 장단(長湍)의 적벽(赤壁)에서 놀이를 하기 위하여 출궁(出宮)한다는 소식을 듣고, 박원종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연산군은 다른 사정이 있어서 장단에 가는 것을 취소하였지만, 박원종은 계획대로 거사를 일으켰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9월 1일 저녁에 박원종 등은 거사에 참여하기로 약속한 장수와 군사들을 훈련원(訓練院) 앞에 집합시켰으나, 초저녁에 모인 사람은 불과 1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자광(柳子光)의 계획에 따라서 유지(油紙)를 오려서 표신(標信)을 만들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군사의 편대를 짰는데, 박원종이 총대장이 되어서 지휘하였다. 밤 3경에 박원종 · 성희안 · 유순정(柳順汀)의 3대장이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돈화문(敦化門) 앞에 나가서 진을 쳤다. 성종을 13자인 운천군(雲川君)이인(李*)을 시켜 얼마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성대군의 저택으로 가서 호위하게 하였다. 박원종은 장수와 군사들로 하여금 연산군이 거처하는 창덕궁(昌德宮)을 철통같이 포위하여 궁문을 지키고, 내사복시(內司僕寺)에 쌓아둔 꼴더미를 가져다가 불을 질러서 대낮같이 밝게 하였다. 이리하여 영의정유순(柳洵),우의정김수동(金壽童) 등의 고관(高官)들이 달려와서 모였고, 백관(百官)과 군민(軍民)들이 반정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길을 가득 메웠다. 박원종은 신윤무(辛允武)를 보내어 역사(力士) 이심(李*)등을 거느리고 신수영(愼守英) · 신수근 · 임사홍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불러내어 죽이도록 했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18]

9월 2일 박원종은 승지한순(韓洵)과 내관 서경생(徐敬生)을 창덕궁으로 들여보내 연산군으로부터 옥새(玉璽)를 순순히 받아냈다. 박원종 등이 백관과 군교(軍校) 등을 거느리고 경복궁(景福宮)의 대비전(大妃殿)으로 가서 반정을 고하고, 자순대비의 명령을 받들어, 연산군을 폐위하여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유배하고, 왕비 신씨를 폐출하여 성종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정청궁(貞淸宮)으로 내보내고, 세자 이황과 창녕대군(昌寧大君)이인(李仁) 등은 모두 귀양보냈다. 그날 오시(午時) 진성대군은 면복(冕服)을 갖추고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나아가서 즉위하여 중종이 되고, 부부인 신씨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았다. 백관들의 하례(賀禮)를 받고 교지를 내려 사면령을 반포하는 한편, 연산군 때의 옳지 못한 정사를 모두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고 환호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다음날 부부인 신씨는 왕비가 되어 법가(法駕)를 갖추어 타고 대궐의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서, 여러 궁인(宮人)들의 하례를 받았으나, 그 전날 고모 연산군의 왕비 신씨는 내전에서 쫓겨나서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정청궁으로 옮겨갔다.[『국조보감』 권18]

9월 4일 성희안 · 박원종 · 유순정 세 대장(大將)과 유자광 등이 모여서 의논하기를, “이미 그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그 딸이 왕비의 지위에 있을 수 없다.” 하고, 중종에게 왕비 신씨를 폐출하도록 상소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이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중종은 아버지 신수근의 죽음을 슬퍼하는 왕비 신씨에게 차마 왕비에서 폐출한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중종은 19세였고 왕비 신씨는 20세였는데, 7년 동안 부부로서 살면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였다. 1506년(중종 1) 9월 9일 영의정유순 · 우의정김수동 등이 박원종 · 성희안 · 유순정과 함께 6조 판서와 참판 등을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와서 한 목소리로 아뢰기를,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일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대궐 내전에 있는데, 만약 왕후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하게 여길 것입니다. 인심의 불안은 종묘사직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니, 은정(恩情)을 끊고 궁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중종이 한숨을 내쉬면서 전교하기를, “경들이 아뢰는 바가 매우 마땅하지만, 그러나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어떻게 내치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백관들이 모두 아뢰기를, “신 등도 이미 그 점을 헤아리고 있었으나,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생각할 때 어찌 하겠습니까. 머뭇거리지 마시고 빨리 결단하소서.” 하니, 중종은 어쩔 수 없이 전교하기를, “종묘사직이 지극히 중대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좇아서 궁 밖으로 내치겠다.” 하였다. 중종은 세종과 성종처럼 노신(老臣)들을 어거하는 논리적인 변론에 미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조와 연산군처럼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신권을 제압하지도 못하였다. 중종이 내전에 들어가서 왕비 신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빨리 하성위(河城尉)정현조(鄭顯祖)의 집을 수리하고 소제하도록 하라. 오늘 저녁에 왕비가 그곳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1년 9월 9일)

이리하여 중종의 왕비는 왕비에 책봉된 지 7일만에 왕비에서 폐출되어, 세조의 부마 하성위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 정현조는 영의정정인지(鄭麟趾)의 아들로서 세조의 외동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혼인하였는데, 공주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다른 사대부 집안 딸과 혼인하였다. 부마가 재혼하면 의친(議親)의 권한과 재산을 박탈당하므로, 폐비 신씨는 의숙공주가 살던 옛 저택으로 옮겨간 것이다. 폐비 신씨는 그곳에서 몇 사람의 시녀들과 쓸쓸하게 생활하였으나, 궁중의 대궐에서 중종은 감시를 피해서 사가(私家)에 나가서 신씨를 만날 수가 없었다. 임해군(臨海君)이 강화도에 귀양갔을 때 광해군은 북인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가에 나가서 형님 임해군을 만나서 회포를 풀었던 것과 비교하면, 중종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임금이었다. 폐비 신씨가 사가로 쫓겨나자, 예조 판서송일(宋軼)과 참판정광세(鄭光世)가 아뢰기를, “신씨가 나갔으니, 처녀를 뽑아서 내직(內職)을 갖추게 하고, 또 중궁(中宮)을 책봉하는 일도 미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중종이 마지 못하여 이에 응하여, 파원군(坡原君)윤여필(尹汝弼)의 딸을 뽑아서 궁녀로 입궁시켰다. 처음에 윤씨를 숙의(淑儀)에 봉하였다가, 윤씨가 아름답고 착하여, 숙원(淑媛)으로 올려서 봉하였다. 1507년(중종 2) 6월 좌의정박원종 등이 왕비를 책봉할 것을 청하니, 중종이 윤숙원(尹淑媛)을 왕비로 삼으라고 명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인종(仁宗)을 낳은 장경왕후(章敬王后)윤씨(尹氏)다.[『조야기문(朝野記聞)』]

폐비 신씨는 처음에 하성위정현조의 집에서 살다가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정부에 탄원하여, 중종의 허락을 얻어서 마침내 본가로 돌아갔다. 그때 본가 친정에는 정청궁으로 쫓겨났던 연산군의 왕비 신씨가 돌아와서 살고 있었으므로, 폐비 신씨도 본가 친정으로 돌아가서 고모 거창군부인신씨에게 의지하여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폐출된 조카와 고모 두 왕비가 신승선 · 신수근의 옛집에서 서로 의지하고 같이 살게 되었다. 남자들은 모두 죽거나 귀양가고 없는 폐가(廢家)에서 여자들만이 남아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민담(民譚)에 의하면, 그때 신수근의 딸 중종의 폐비 신씨는 매일같이 인왕산(仁王山)에 올라가서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큰 바위에 그녀가 입었던 치마를 펴서 걸치고, 경복궁에 있는 중종이 혹시라도 그녀를 쳐다보기를 바랐는데, 지금도 그 바위를 ‘치마바위[裳巖]’라고 한다. 신수근의 8대손 신후담(愼後聃)의 묘지명(墓誌銘)을 보면, “단경왕후(端敬王后)의 폐출은 중종의 뜻이 아니었고, 세 사람의 신하가 발호(跋扈)하여 백관들을 위협하여 정청(庭請)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청원한 말이 병란에 관한 중요한 간언(諫言)이 아니었지만, 중종이 부득이 따랐을 뿐이다. 나라의 동문(東門) 안에 치마를 펼쳐 놓았던 ‘치마바위’가 있어서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옛날 사적(事蹟)이 되고 있다.” 하였다.[『성호전집(星湖全集)』 권64 「성균진사 신공묘지명(成均進士愼公墓誌銘)」] 정청은 백관들이 대궐 뜰에 엎드려 청원하는 것이다.

폐비 신씨는 본가 친정집으로 쫓겨나서, 한번도 중종을 만나지 못하고, 50여 년을 홀로 쓸쓸히 살다가, 1557년(명종 12) 12월 7일 돌아갔는데, 향년이 71세였다. 그 사이 1537년(중종 32) 연산군의 왕비였던 고모 신씨가 66세의 나이로 돌아갔고, 1544년(중종 39) 중종이 5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폐비 신씨는 남편 중종과 7년 동안 함께 부부로 살았으나, 자녀가 없었다. 또 폐비 신씨는 고모 신씨와 한 집에서 30여 년 동안 같이 살았는데, 폐출된 왕비로서 똑같은 운명을 서로 한탄하면서 눈물로 긴 날 긴 밤을 보냈을 것이다. 폐비 신씨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장흥(長興) 수회동(水回洞) 해좌(亥坐)에 있었는데, 1739년(영조 15) 폐비 신씨가 왕후에 복위(復位)되어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봉해지자, 그 묘소를 온릉(溫陵)으로 조성하고, 종묘에서 그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15년 3월 28일) 단경왕후의 기일(忌日)은 거창 신씨 본가(本家)의 기록에는 12월 5일로 되어 있으나,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12월 7일로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실록의 기록에 따른다.

폐비 신씨의 복위를 둘러싼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1515년(중종 10) 2월 장경왕후윤씨가 원자(元子: 인종)를 낳다가, 2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그때 조정의 여론은 새로 왕비를 간택하기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박원종과 홍경주(洪景舟) 등은 성종 때처럼 후궁 가운데 후덕한 여관(女官)을 승진시켜서 정비(正妃)로 삼자고 주장하였다. <중중반정> 직후에 공신 박원종과 홍경주 등은 그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당시 박원종의 양녀인 박경빈(朴敬嬪)과 홍경주의 딸인 홍희빈(洪禧嬪) 등이 모두 장성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신들은 자기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왕비로 만들고 그 외손을 후사왕(後嗣王)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므로, 사림파의 비난을 받았다.

그해 윤4월 장경왕후를 희릉(禧陵)에 장사지내고, 중종이 여론을 듣기 위하여 전국에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순창군수(淳昌郡守)김정(金淨)과 담양부사(潭陽府使)박상(朴祥)이 연명하여 상소하기를, “정국(靖國) 초기에 박원종 등이 신수근을 제거하고 나서, 그 아버지를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세우면 뒷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자신들을 보존하려는 계책에서 신비(愼妃)를 폐출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의리도 명분도 없는 짓이었습니다. 신씨는 전하와 점괘(占卦)가 서로 잘 맞아 좋은 배필이 되어서, 혼례 의식을 치루고 자전(慈殿)을 알현(謁見)하였으니, 고부(姑婦)의 분수와 의리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전하가 대통(大統)을 이어받을 때 신씨는 중곤(中壼)에 정식으로 자리잡고 신민(臣民)들의 하례를 받았으니, 국모의 명분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전하가 강포(强暴)한 신하들의 압력을 받아서 부부의 인연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말에 ‘가난할 때의 친구는 잊을 수 없고, 조강지처는 내쫓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씨는 잠저(潛邸) 때 몇 년 동안 손수 술과 장(醬)을 담가서 음식을 만들고 손수 집안을 쓸고 닦으면서 청소를 하였습니다. 죽음과 삶을 같이 하기로 굳게 맹세하고, 의로운 용기를 가지고 서로 믿으면서 암울한 연산군 시대의 변란을 함께 겪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귀하게 왕비의 몸이 되어 천승(千乘)의 나라를 차지하였다가, 미련도 없이 버림을 받았으니, 한때 높은 하늘에 오르는 듯하다가, 다시 아홉 길의 연못에 빠진 격입니다. 지존(至尊)의 배필이며 금슬(琴瑟)의 짝이었던 신씨가 지금 임금의 정전(正殿)을 떠나서 멀리 여염집에서 쓸쓸하게 지내니, 이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그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한탄합니다.” 하였다.[『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

이때 대사간(大司諫)이행(李荇)과 대사헌(大司憲)권민수(權敏手)대간(臺諫)을 이끌고 김정과 박상의 상소문을 공박하고 두 사람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중종이 의정부와 6조의 당상관으로 하여금 이것을 의논하게 하니, 모두 아뢰기를, “구언한 다음이므로 말이 맞지 않더라도 죄를 주어 언로(言路)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중종은 김정과 박상을 3년 동안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신진 사림파의 영수 조광조가 대사헌에 임명되어, 대사간이행을 탄핵하여 마침내 그를 파직시켰다. 김정과 박상이 폐비 신씨를 왕후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문 사건을 계기로 반정 공신파와 신진 사림파가 크게 대립하였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새로 왕비를 간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1517년(중종 12) 파산군(坡山君)윤지임(尹之任)의 딸을 뽑아서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명종(明宗)을 낳은 문정왕후(文定王后)윤씨(尹氏)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서 김종직(金宗直)과 그 제자들이 참화를 입은 뒤에 사림파는 조정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훈구파가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1515년(중종 10) 이조 판서안당(安塘)이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한 정암(靜庵)조광조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는데, 정치의 새로운 국면을 모색하던 중종은 성리학(性理學)에 바탕을 둔 조광조의 왕도(王道) 사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조광조를 신임하여 중용하고, 그 친구 김정과 박상 등을 다시 등용하였다. 도학(道學)을 중시하던 조광조는 사장(詞章)을 중시하던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추천제도를 통하여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뽑자고 주장하여, 1518년(중종13) 천거 방식의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김식(金湜) · 안처겸(安處謙) 등 28인을 추천하여 정부의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의 3사(三司)의 요직에 안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종의 반정 공신 76명의 위훈(偉勳)을 삭감하여버렸다. 이에 격분한 훈구파 홍경주(洪景舟) · 남곤(南袞) · 심정(沈貞) 등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를 일으켜서 조광조와 김정 · 김식 등을 잡아서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사림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중종도 처음에 폐출된 신씨를 못 잊어하고 가슴이 아파하였으므로, 조광조 · 김정 · 박상 등의 사림파가 신씨의 왕비 복위를 주장하자, 중종도 이에 동조하여 사림파의 신진 사류(士類)를 대거 등용하였다. 그러나 훈구파 심정 · 홍경주 등은 사림파 조광조 일당을 타도하는 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홍희빈는 중종에게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한다.”고 음해하고 그 증거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새겨진 나뭇잎을 가져다가 바쳤다. 주초위왕이란 네 글자는 조씨와 왕이 된다는 뜻이다. 조광조가 과거에서 사장(詞章)을 폐지하고 추천 방식의 현량과를 설치하자, 사장파(詞章派) 남곤 · 이행 · 소세양(蘇世讓) 등도 조광조 일파와 크게 대립하여, 박경빈(朴敬嬪)을 이용하여 중종과 조광조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남곤 · 심정 · 홍경주 등이 마침내 중종의 허락을 얻어내고, 궁중 안에서 정변을 일으켜서 조광조 · 김식 · 박상 등 사림파 신진 세력을 일망타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다. 그러므로, <기묘사화>는 훈구파에 이용당한 우직한 중종에게 책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의정부의 3의정정광필(鄭光弼) · 신용개(申用漑) · 안당 등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중간에서 양파의 대립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손자 신용개는 훈구파의 발호를 억제하였으므로, 신용개가 살아 있을 때에는 훈구파에서 감히 정변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1544년 중종이 돌아가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大尹)의 윤임(尹任)이 사림파를 등용하고, 폐비 신씨와 아버지 신수근을 신원(伸寃)하여, 신씨는 왕비로 복위되고, 신수근은 죄의정으로 복작(復爵)되었다.[『서당사재』 권11 「좌의정신공시장」] 1739년(영조 15) 영조는 폐비 신씨를 단경왕후(端敬王后)로 책봉하고 그의 아버지 신수근을 영의정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에 봉하였는데, <중종반정> 때 참화를 당한 지 233년이 지나서 이루어진 일이다.(『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15년 3월 28일)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서당사재(西堂私載)』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음애일기(陰崖日記)』
  • 『부계기문((涪溪記聞)』
  • 『성호전집(星湖全集)』
  • 『눌재집(訥齋集)』
  • 『충암집(冲庵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수당집(修堂集)』
  • 『용재집(容齋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용헌집(容軒集)』
  • 『허백정집(虛白亭集)』
  • 『대봉집(大峯集)』
  • 『남계집(藍溪集)』
  • 『일두집(一蠹集)』
  • 『목계일고(木溪逸稿)』
  • 『수헌집(睡軒集)』
  • 『송재집(松齋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무릉잡고(武陵雜稿)』
  • 『금호유고(錦湖遺稿)』
  • 『지퇴당집(知退堂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도곡집(陶谷集)』
  • 『번암집(樊巖集)』
  • 『입재집(立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