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嘉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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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례(五禮)의 하나로 경사스러운 예식을 일컫는 말.

개설

사가(私家)에서 가례는 관례(冠禮)나 혼례를 뜻할 뿐이나 공가(公家), 즉 왕가(王家)에서 가례는 관례, 혼례는 물론 각종 하례(賀禮) 및 연례(宴禮) 의식 등으로 그 내용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춘관통고(春官通考)』·『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기록된 가례는 왕을 비롯한 왕세자, 왕세손의 혼례 의식, 왕세자·왕세손 등의 관례 의식, 조정의 여러 가지 정치적 의식, 대왕대비·왕대비·대비 등에 존호를 드리는 의식, 왕비 세자빈 왕세자·왕세제·왕세손 등을 책봉하는 의식, 각종 하례 및 연례 의식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1) 혼례 의식

왕비, 왕세자, 왕세손, 왕세자빈, 왕세손빈, 왕손 가례 등이 있다.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혼례의 종류로는 납비의(納妃儀), 왕세자납빈의(王世子納嬪儀), 왕자혼례의(王子昏禮儀), 왕녀하가의(王女下嫁儀), 종친문무관일품이하혼례의(宗親文武官一品以下昏禮儀)가 있다.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는 납비친영의(納妃親迎儀), 왕세손납빈의(王世孫納嬪儀)가 추가된다.

납비의에 있는 혼례의 절차는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친영(親迎)의 절차인 명사봉영(命使奉迎), 동뢰(同牢)의 육례(六禮)의 절차를 밟았다.

2) 관례(冠禮) 의식

성년식에 해당되는 관례는 일부 예설(禮說)에서 사(士)는 20세, 천자나 제후는 12세에 행하는 것으로 규정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제 의례를 행한 연령은 일정하지 않고, 혼례 전에 행해졌다.

관례는 삼가례(三加禮)라 하여 세 차례에 걸쳐 옷을 갈아입는 의식을 갖는다. 왕세자의 경우에는 초가례에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익선관(翼善冠)을 쓰게 되며, 재가에서는 익선관과 곤룡포를 벗고 집무복인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강사포(絳紗袍)를 입게 되며, 삼가에서는 다시 원유관과 강사포를 벗고 종묘제사나 큰 의례를 지낼 때 입는 면류관(冕旒冠)면복(冕服)을 입는다. 모두 왕보다는 한 등급 낮은 왕세자의 복식에 맞게 만들어졌다.

3) 조정의 정치적 의식

왕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정치적 의식이 모두 가례에 포함된다. 『국조오례의』에 의정(議政)을 비롯한 중신(重臣)과 시종관(侍從官)이 매일 편전(便殿)에서 왕에게 정사(政事)를 아뢰던 상참조계의(常參朝啓儀), 한 달에 네 번 중앙에 있는 문무백관이 정전(正殿)에 모여 왕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政事)를 아뢰던 조참의(朝參儀)가 있다. 왕과 신하가 마주 대하는 의식으로 경연(經筵)도 이 의식에 포함된다. 교서(敎書)를 반강(頒降)하는 교서반강의(敎書頒降儀)문과전시의(文科殿試儀), 무과전시의(武科殿試儀), 문무과방방의(文武科放榜儀), 생원진사방방의(生員進士放榜儀)도 포함된다.

왕세자의 경우 왕세자가 사부·빈객과 상견하는 왕세자여사부빈객상견의(王世子與師傅賓客相見儀), 서연에서 진강하는 서연회강의(書筵會講儀)가 있다.

사신과 외관이 전문(箋文)을 올리며 배례하는 사신급외관배전의(使臣及外官拜箋儀), 사신과 외관이 왕께서 선지(宣旨)를 내리심을 받는 사신급외관수선로의(使臣及外官受宣勞儀), 사신과 외관이 궐내(闕內)에서 내린 향을 맞이하는 사신급외관영내향의(使臣及外官迎內香儀), 사신과 외관이 교서를 맞이하는 사신급외관영교서의(使臣及外官迎敎書儀)가 있다.

4) 존호를 드리는 의식

왕·왕비·상왕·대비·왕대비·대왕대비 그리고 돌아가신 왕·왕비에게 존호를 드리는 의식을 말한다. 상존호책보의(上尊號冊寶儀), 대왕대비상존호책보의(大王大妃上尊號冊寶儀), 왕비상존호책보의(王妃上尊號冊寶儀), 왕대비책보친전의(王大妃冊寶親傳儀) 등이 있다.

5) 왕세자·왕세손 등의 책봉 의식

왕세자·왕세손·왕세자빈 등을 정하게 되면 이를 정식으로 책봉하는 의식을 행한다. 왕비를 책봉하는 책비의(冊妃儀), 왕세자를 책봉하는 책왕세자의(冊王世子儀), 왕세자빈을 책봉하는 책왕세자빈의(冊王世子嬪儀)가 있다.

6) 각종 하례(賀禮)와 연례(宴禮)

하례는 왕과 왕비에 대한 정월 초하루, 동지 및 탄신일에 드리는 하례, 대왕대비 및 왕세자에 드리는 하례 의식이 있다. 하례의 종류로는 정지왕세자백관조하의(正至王世子百官朝賀儀), 정지왕세자빈조하의(正至王世子嬪朝賀儀), 회례하는 정지회의(正至會儀), 중궁정지명부조하의(中宮正至命婦朝賀儀) 등이 있다. 그리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왕세자와 백관이 하례하는 삭망왕세자백관조하의(朔望王世子百官朝賀儀), 정월·동지·탄일에 사신과 외관이 멀리서 하례하는 사신급외관정지탄일요하의(使臣及外官正至誕日遙賀儀), 초하루·보름에 사신과 외관이 멀리서 하례하는 사신급외관삭망요하의(使臣及外官朔望遙賀儀)가 있다.

연례로는 중궁정지회명부의(中宮正至會命婦儀) 등이 있다. 『국조속오례의』에 진연의(進宴儀), 왕비진연의(王妃進宴儀), 대왕대비진연의(大王大妃進宴儀), 삼전진연의(三殿進宴儀), 어연의(御宴儀) 등이 추가되었다.

또 어첩(御帖)을 기사(耆社)에 봉안하는 의식인 어첩봉안기사의(御帖奉安耆社儀)와 기로연(耆老宴)에 친림(親臨)하는 의식인 친림기로연의(親臨耆老宴儀), 영수각(靈壽閣)에 어첩을 친제(親題)하는 의식인 영수각어첩친제의(靈壽閣御帖親題儀)가 있다.

7) 양로의(養老儀)

세종대에 양로연을 행하면서 양로연의(養老宴儀)가 만들어지게 된다. 양로연은 기본적으로 노인을 공경하는 잔치이지만, 노인들이 많은 경험을 가졌으므로 스승과 같다는 의미에서 사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왕실에서 행해지는 양로연으로는 왕과 중궁이 베푸는 양로연이 있었고, 지방이나 학교에서도 행해졌다.

세종대 양로연은 문묘에서 스승 공경을 하는 방법으로 주나라 때 시행했던 삼로오경제(三老五更制)와 천자가 학궁(學宮)에 나아가 노인에게 절하는 임옹배로(臨雍拜老)에서 유래하였다. 우선 궁중에서 모범을 보여 스승 공경의 모범이 되겠다는 의미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양로연에서는 회례연과는 달리 처음부터 왕이 노인들이 들어오면 일어나서 맞이하는 의식이 정해진다. 또 하나의 특징은 천인까지도 양로연에 입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양로연의 의식은 『국조오례의』에 양로연의(養老宴儀), 중궁양로의(中宮養老儀), 개성부급주현양로의(開城府及州縣養老儀)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에 준한 향음주의(鄕飮酒儀)도 있다.

8) 황제와 사신 관련

정월·동지 및 성절(聖節)에 황제의 궁궐을 바라보고 행례(行禮)하는 정지급성절망궐행례의(正至及聖節望闕行禮儀), 황태자의 천추절에 궁궐을 바라보고 행례(行禮)하는 황태자천추절망궁행례의(皇太子千秋節望宮行禮儀),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영조서의(迎詔書儀), 칙서를 맞이하는 영칙서의(迎勅書儀), 표문(表文)을 배송(拜送)하는 배표의(拜表儀)가 있다.

변천

『국조오례의』의 가례 규정은 이후 『국조속오례의』 등의 편찬을 거치며 일부 변화를 보였다. 먼저 혼례 의식의 경우 친영의(親迎儀)가 규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여자 집으로 장가를 가서 자식을 낳아 기르다가 본가로 돌아왔기 때문에 신부를 맞이하여 오는 친영의가 행해지지 않았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 친영의가 행해지게 되는데, 세종 때에 처음 시행되어 『세종실록』 「오례」의 혼례에 친영의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세자나 왕자는 친영을 하는 데 비해, 왕은 친영의 대신 명사봉영으로 대신한다. 그러다가 중종대와 선조대에 친영의가 행해지나 『국조오례의』에 추가되지 않다가 숙종대에 왕이 별궁에 나가 친영하는 납비친영의가 행해지고 『국조속오례의』에 추가된다.

그리고 조선후기 숙종대에 처음으로 묘현례(廟見禮)가 추가되었다. 혼인을 하게 되면 사당의 조상에게 알현하는 묘현례를 행해야 하는데, 왕실에서는 종묘에 여자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를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대에는 이런 원칙을 내세워 왕비나 세자빈이 되면 종묘에 가서 알현하는 묘현례가 처음 시행되었다. 처음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와 세자빈이 처음 묘현례를 하고 이후에 이는 계속 행해졌다. 그래서 왕실의 혼례는 납채·납징·고기·책봉·친영·동뢰 묘현의의 순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밖에도 『국조속오례의』 단계에 이르면, 대왕대비·왕비·왕대비 등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존호책보의(尊號冊寶儀)가 추가되었다. 존호를 올리는 의식도 숙종대부터는 환갑이나 즉위 50년을 축하하는 등 특별히 큰 행사 때만 존호를 올렸다. 그러나 세도정치기에 가면 망오(望五)·사순(四旬)·오순(五旬)·육순(六旬) 등으로 번거로울 정도로 존호를 자주 올려 존호가 32자, 40자가 될 정도로 허례허식화되었다.

또한 연회 의례로 진연의(進宴儀)가 역시 추가되었다. 조선시대 연회 의례는 조선전기에 주로 행해졌던 회례연(會禮宴)·양로연(養老宴)·풍정(豊呈)과 성종대부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 주로 행해졌던 진연(進宴)과 영조대에 행해졌던 어연(御宴)이 있다. 순조대에 가면 진연이 진찬(進饌)·진작(進爵)으로 구분되어 행해진다.

조선전기에는 왕을 신성시하여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풍정·회례연 등이 행해지고, 왕실 내에서 소규모로 행해지는 곡연(曲宴)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군신 관계를 표현하는 회례연을 본받아, 사제 관계를 표현하는 양로연이 스승 공경의 의례로 행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잔치들은 낭비가 심해지기 때문에 점차 풍정이나 회례연보다 규모가 작은 진연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중종·명종·선조대에는 규모가 축소된 진연마저도 특별한 날에 행해지는 잔치로 바뀌어 간다. 조선후기에는 왕실에서 매년 행하던 풍정·회례연을 축소한 진연도 회갑연이나 혼인 잔치 같은 특별한 날에만 여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이처럼 조선시대 연회 의례는, 조선전기에는 매년, 생일, 명절 등 수시로 행해지던 풍정·회례연 중심에서 규모가 축소된 진연 중심으로 변화하고, 조선후기에는 사대부처럼 특별한 날에만 행해지는 진연 중심으로 변화하여 갔다. 그러나 19세기에 행해지는 진연은 야연(夜宴)을 하고 세자회작(世子會爵)을 하는 등 사치하고 화려하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고종대에는 황제식으로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왕이 친히 유생을 대해 시행하는 유생전강의(儒生殿講儀)도 『국조속오례의』 단계에서 추가된 것이었다.

의의

조선시대 가례는 조선전기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에서 조선후기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으로 사상이 변함에 따라, 그 형식과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조선전기에는 성리학 이념에 맞게 관례, 혼례, 연회례, 양로연 등이 행해지면서도 왕과 왕실의 권위를 표현했다면, 조선후기에는 조선성리학 이념에 따라 도리와 감정에 맞게 변화하면서 백성들을 위하여 검소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세도정치기에 가면 허례허식과 사치스럽게 변화해갔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대전회통(大典會通)』
  •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 『문헌비고(文獻備考)』
  • 문화재관리국 편, 『宮中文化再現行事 考證硏究叢書』, 문화재관리국, 1997.
  •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1, 민속원, 2003.
  •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2, 민속원, 2003.
  •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3, 민속원, 2003.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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