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급외관영교서의(使臣及外官迎敎書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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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나가 있는 사신이나 수령(守令)·진장(鎭將) 등의 지방관이 왕의 명령서인 교서(敎書)를 맞이하는 의식.

개설

지방에 나간 사신이나 외관(外官)들이 왕의 교서를 맞이하는 절차는 크게 ‘진설(陳設)→영접(迎接)→사배(四拜)→삼상향(三上香)→교서선포(敎旨宣布)→삼고두(三叩頭)→산호(山呼)→재산호→사배’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절차는 조선초기 『세종실록』 「오례」부터 성종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거쳐 조선후기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변동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였다. 한편 대한제국기의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는 명칭을 ‘사신급외관영제서의(使臣及外官迎制書儀)’로 고쳐서 황제의 명령서인 제서(制書)를 영접하는 의례로 정리하였다.

연원 및 변천

사신과 외관들이 교서를 맞이하는 의식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종실록』 「오례」에서 처음 제정되었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의식 사신 급 외관 영교서의). 이후 『국조오례의』 단계에서 내용이 약간 수정되었는데, 『세종실록』 「오례」에서 향을 1번 올리던 것이 3번으로 늘어났고, 교서를 맞이하기 위해 교외(郊外)로 나가던 것에서 관문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설치한 정자인 원정(遠亭)으로 나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 삼고두 전에 홀을 꽂았다가 산호·재산호 후에 홀을 빼는 행동이 『국조오례의』에서 추가되었다.

1483년(성종 14) 4월 예조(禮曹)에서는 국상(國喪) 중에 지방관이 교서를 맞이하는 경우 길복(吉服)을 입도록 규정하였다(『성종실록』 14년 4월 4일). 그러나 1454년(인종 1) 윤1월에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위와 같은 규정이 예문(禮文)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국조오례의』와 세종대의 전교(傳敎)에 의거하여 지방 수령들이 국상 중에 왕명을 맞이할 때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게 할 것을 주장했고, 인종이 이를 수용하였다(『인종실록』 1년 윤1월 23일).

한편 1524년(중종 19)에는 전주부윤(全州府尹)최명창(崔命昌)이 강서(講書)에 참여한다는 것을 핑계로 교서를 맞이하러 원정까지 나오지 않아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중종은 지방 관원들이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하면서 이를 엄히 추고(推考)하여 죄를 묻도록 했고, 그 결과 최명창은 파직되었다(『중종실록』 19년 12월 11일).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기준으로 사신급외관영교서의(使臣及外官迎敎書儀)의 절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의식 당일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나무 패인 전패(殿牌)를 정청(正廳)의 한가운데 남향으로 설치하고, 교서안(敎書案)을 전패 앞에, 향탁(香卓)을 교서안 앞에 설치한다. 관찰사(觀察使) 이하 외관과 사신들은 조복(朝服)을 입고 교서 운반에 사용하는 가마인 청옥용정(靑屋龍亭)과 의장(儀仗)을 갖춘 다음 원정에 나가 내사(來使)와 교서를 영접한다. 외관이 내사와 교서를 인도하여 정청에 도착한 후 관원들은 정청의 뜰에 정렬하며, 내사는 교서를 받들고 정청에 올라 교서안 위에 교서를 놓는다. 관원들이 사배를 한 후 집사자가 향을 3번 올린다. 내사가 교지가 있음을 알리면 관원들이 꿇어앉는다. 선교자(宣敎者)가 교서를 선포한 후 교서를 다시 교서안에 올려놓는다. 관원들은 엎드렸다가 일어나 사배하고 다시 꿇어앉아 홀을 꽂는다. 집사자의 지휘에 따라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고두를 행하고, “천세(千歲), 천세”를 부르는 산호를 행한 다음, 다시 “천천세(千千歲)”를 불러 재산호(再山呼)를 행한다. 재산호 후에 관원들은 홀을 꺼내 들고 엎드렸다 일어난 후 다시 사배를 한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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