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비의(納妃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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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의식.

개설

왕실의 혼례를 국혼(國婚)이라 하는데, 국혼은 왕·왕세자·왕세손의 혼례인 가례(嘉禮)와 일반 왕자녀의 혼례인 길례(吉禮)로 구분하였다.

가례에 속하는 납비의(納妃儀)는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의식이다. 혼인을 청하는 납채(納采), 혼인이 이루어진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징(納徵), 봉영일이 적힌 교서를 전하는 고기(告期), 왕비로 책봉하는 책비(冊妃), 사자(使者)를 보내 왕비를 맞아들이는 명사봉영(命使奉迎), 교배석 위에 음식상을 놓고 왕과 왕비가 마주 앉아 술잔을 받아 마시는 동뢰(同牢)의 육례(六禮)와 하례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례의 전 과정은 가례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하여 총괄하였고, 각 의식들은 실행하기에 앞서 예행연습인 습의(習儀)를 여러 차례 진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납비의가 실제로 거행된 것은 1454년(단종 2)에 거행된 단종의 가례이다. 그해에 세조는 창덕궁에서 처녀를 간택한 후 납비의를 연습하고(『단종실록』 2년 1월 4일), 24일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補)와 호조(戶曹) 판서(判書)조혜(趙惠)를 보내어 왕비 송씨(宋氏)를 효령대군의 집에서 봉영(奉迎)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24일).

1517년(중종 12)에 왕세자빈을 맞이할 때도 친영(親迎)하는데 왕비를 맞이할 때만 친영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예법을 고찰하여 의논하게 하고(『중종실록』 12년 3월 17일), 친영하는 예를 항구한 법으로 정하여 의주를 오례 의주에 첨가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2년 3월 19일). 이후 왕비의 집으로 사신을 보내어 맞이하는 명사봉영의 절차는 친영으로 대체하였다.

절차 및 내용

납비의 중 납채부터 명사봉영까지의 절차는 궁중과 왕비의 집인 비씨제(妃氏第) 2곳에서 거행되었다. 대궐에서 하는 의례는 왕명을 받들고 떠나는 사자와 부사(副使) 이하 종친 및 문무백관에게 막중한 임무를 잘 수행하고 오라는 위임식 같은 것이었다. 신부 측에서는 명을 받들고 온 사자가 왕의 권위를 대행하는 의미가 있어 엄숙한 가운데 극진히 대접하고 온 목적을 잘 받드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구체적인 절차는 길한 날을 골라 희생과 폐백(幣帛)을 갖추어 사직과 종묘에 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납채는 액정서(掖庭署)에서 미리 설치한 자리에 왕이 면복(冕服)을 입고 참석하여 아무 관직 아무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납채례를 행하게 한다고 선포하면, 정사(正使) 일행이 왕의 교지를 채여(彩輿)에 싣고 상림원(上林園)의 관원이 기러기를 들고 왕비 집으로 가는 절차이다. 의례는 근정전(勤政殿)에서 거행하였다. 비씨제수납채(妃氏第受納采)는 왕비의 집에서 혼주(婚主)가 정사 일행이 가져온 교지와 기러기를 받고, 왕이 청하는 혼인에 응한다는 전문(箋文)을 사자에게 전달하는 의식이다. 비씨제는 왕비의 집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왕비의 사가(私家)가 아니라 별궁(別宮)을 말한다.

납징은 교서와 검은색과 분홍색의 옷감과 승마(乘馬)를 예물로 보내는 절차이다. 납채와 같이 왕이 근정전에서 사자에게 교서와 함께 예물을 전달하면 정사 일행이 이를 왕비의 집에 가져갔다. 비씨제수납징(妃氏第受納徵)은 왕비의 집에서 혼주가 사자가 가져온 교서와 예물을 받고 왕의 전교를 받들겠다는 답서를 사자를 통해 전달하는 의식이다. 고기는 사자에게 교서를 주어 왕비를 궁으로 맞이하는 봉영일을 알리는 절차이다. 비씨제수고기(妃氏第受告期)는 왕비의 집에서 봉영일을 알리는 교서를 받고 이를 따르겠다는 전문을 사자를 통해 전달하는 의식이다. 책비는 왕비로 책봉한다는 내용을 담은 교명(敎命), 책(冊), 왕비의 도장인 보(寶), 왕비의 옷인 명복(命服)을 사자를 통해 전달하는 의식이다. 비수책(妃受冊)은 왕비의 집에서 책봉을 받는 절차이다. 왕비는 적의(翟衣)를 입고 머리장식을 하고 부모(傅姆)를 따라 나가 책봉을 받는다. 명사봉영은 면복을 입은 왕이 왕비의 집으로 사신을 보내어 왕비를 궁으로 모셔오는 절차이다. 동뢰는 왕과 왕비가 술잔을 나누는 절차이다. 음식상을 차리고, 술잔과 근배(巹杯)를 준비하여 술을 3차례 마신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잔에 술을 따르고 세 번째는 근배에 따른다. 궁에 들어와 동뢰연을 마친 왕비가 왕실의 어른인 왕대비에게 조회하는 의식이 왕비조왕대비(王妃朝王大妃)이다. 왕비는 적의를 입고 머리장식을 한 뒤 연(輦)을 타고 정전(正殿)으로 나간다. 말린 고기를 담은 쟁반과 금잔을 준비하여 왕대비에게 4번 절을 하고 바친다. 이외에 모든 신하에게 하례를 받는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왕이 모든 신하와 회례(會禮)하는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가 종친과 봉작을 받은 문무백관의 부인들에게 하례를 받는 왕비수외명부조회(王妃受外命婦朝會) 등의 하례의식을 거행하였다. 왕비수백관하에서 신하들은 왕비에게 “구관(具官) 신 아무개 등은 삼가 생각하옵건대, 왕비 전하의 아름다운 모책이 밝게 갖춰져 지극한 덕이 시기에 응하시니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경사스러운 일에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치사(致詞)를 올린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의식 납비의 전하 회백관).

참고문헌

  • 김용숙,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 일지사, 1987.
  • 김세은, 「19세기 전반기 국왕의 가례와 그 특징: 순조대~철종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4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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