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도감(嘉禮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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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혼례식을 주관하던 임시 관청.

개설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경사스러운 의례라는 뜻이다. 가례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오례 가운데 하나로, 왕의 즉위식, 왕실의 관례·혼례·책봉례, 왕세자 입학식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였다. 그러나 의궤의 기록에는 혼례식만을 ‘가례’라 하였고, 혼례식을 주관한 임시 관청을 ‘가례도감’이라 하였다. 현재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라 기록된 의궤는 모두 혼례식을 정리한 것이다.

가례도감에서는 혼례식 전체를 주관하는 도감을 중심으로 도청(都廳),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등으로 업무를 분장하여 혼례식을 추진하였다. 혼례식이 끝난 후에는 가례도감 이름으로 『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고, 왕은 도감의 관원들에게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상을 주었다. 왕과 왕세자의 혼례를 준비할 때는 전국의 처녀들에게 혼인을 금지하는 금혼(禁婚)을 명했는데, 혼례식이 끝나면 금혼한 처녀들에게 혼인을 허락하고 가례도감을 폐지했다. 이것은 의궤나 『인조실록』의 기록 등에 나타나 있다(『인조실록』 3년 8월 26일).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왕실에서 혼례식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가례도감을 설치하였다. 가례도감에서는 혼례식의 주요 절차인 납채(納采)·납징(納徵)·고기(告期)·책비(冊妃)·친영(親迎)·동뇌(同牢) 등의 육례(六禮)를 준비하고 거행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례에 앞서 실시하는 간택 기간부터 가례도감을 구성하였다. 숙종 때에는 초간택(初揀擇)이 일정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지연되자 간택 이전에 가례도감을 미리 설치하기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가례도감의 총책임자는 도제조 1명이며, 부책임자인 제조는 3명으로 구성되었다. 도제조는 정승급에서, 제조는 판서급에서 임명되었다. 제조 3명은 대개 호조 판서, 예조 판서, 병조 판서, 공조 판서가 포함되었으나 경우에 따라 판중추부사, 우찬성 등이 담당하기도 하였다. 도감의 핵심 관원으로는 도청(都廳)과 낭청(郎廳)이 있었으며 감조관(監造官), 서리(書吏), 서사(書寫), 서원(書員), 고지기[庫直], 사령 등의 관원을 배치하였다. 낭청은 8명을 차출하여 그 가운데 2명은 도청(都廳)으로 호칭하였으며, 나머지 6명은 3방(房)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당상과 낭청, 감조관은 소속 관아에 상직(常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회(公會)에 참석하지 않고 가례도감의 업무를 겸임하게 하였다. 도감에 참여한 구성원들의 명단은 ‘별단(別單)’에 따로 기록되어 있다. 가례를 주관한 관리들의 명단은 ‘도감 별단’에, 가례의 실무를 맡은 서리들의 명단은 ‘도감 원역(員役) 별단’에, 행사에 필요한 물품 제작을 맡은 장인들의 명단은 ‘도감공장(工匠) 별단’에 각각 기록하였다. 별단을 통해 역대 가례도감 참여자들의 총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가례도감에서는 추진하는 업무에 따라 일방, 이방, 삼방, 별공작(別工作), 수리소(修理所) 등으로 나누었다. 일방에서는 교명(敎命)·의대(衣襨)·포진(鋪陳)·의주(儀註)에 대한 것을 관장하였다. 이방에서는 연(輦), 여(轝), 백택기(白澤旗)·봉선(鳳扇) 등의 의장기, 의장물을 관장하였다. 삼방에서는 옥책(玉冊), 금보(金寶), 각종 그릇 등을 관장하였으며, 별공작에서는 상(床)과 탁자, 궤(樻), 촉롱(燭籠) 등을 조성하고 관장하였다. 수리소는 물품의 수리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즉, 교명문과 옥책문의 작성, 의대(衣襨)·연(輦)·의장물의 준비, 예조·병조·상의원·각 감영(監營) 등 협조 기관과 주고받은 문서의 정리, 반차도·의궤의 제작 등이 가례도감에서 추진하는 주요 업무라고 할 수 있다. 혼례식은 조선시대 왕실 의례 중에서도 가장 축제적 성격이 강하고, 그 의례를 후대에 참고하게 했기 때문에 행사가 끝난 후 가례도감에서는 의궤를 편찬하였다.

가례도감에서 편찬한 의궤는 현재 21건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 왕의 가례가 9건, 왕세자의 가례 9건, 왕세손 1건, 황태자 1건이며 특이하게 사도세자의 딸인 청근현주(淸瑾縣主)의 혼례식이 가례도감의궤로 남아 있다. 가례도감에서는 의궤 제작 때 ‘친영반차도(親迎班次圖)’를 꼭 포함시켜 혼례식의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가례도감의궤』의 앞부분에는 도감사목(都監事目)이라 하여 도감의 업무 지침이 기록되어 있다. 도감에서 지휘하는 구체적인 업무는 다음과 같다. 당상과 낭청의 인신(印信)은 담당 부서에서 만들어서 올린다. 감조관 6명을 뽑아서 3방에 나누어 배치한다. 부역에 응해야 할 장인(匠人)이 회피하거나 각사의 하인 가운데 명령을 어기는 자는 태형(笞刑)으로 처벌한다. 각사의 관원 가운데 심하게 태만한 사람은 보고하여 죄를 다스린다. 각종 장인이 여염에 전혀 없는 경우에는 상의원과 관상감의 장인, 상급아문의 조례(皂隷), 나장(羅將), 액정서의 하인, 여러 궁가의 장인, 각 군문(軍門)의 군사 가운데 공역에 합당한 자를 관례대로 부린다. 많이 사용하는 지지(地紙), 필묵(筆墨), 각종 잡물을 각기 해당 관서에서 올리게 한다. 각종 장인의 역(役)에 대한 상역가(賞役價)로 제공하는 쌀과 포(布)를 호조와 병조에서 수효를 따져 지급한다.

이 외에도 가례도감은 혼례식에 필요한 의례의 준비를 비롯하여 인원의 배치, 상과 벌의 지급, 물품의 조달, 참여자들에 대한 급료 지급 등에 이르는 모든 업무를 총괄적으로 수행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실록』에서부터 가례도감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의 건국과 함께 왕실의 혼례식이 있으면 가례도감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즉, 1397년(태조 6) 10월 6일 가례도감을 설치하여 영삼사사(領三司事)이화(李和)·좌정승조준(趙浚)·우정승김사형(金士衡)·봉화백(奉化伯)정도전(鄭道傳)으로 제조를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성종·중종대 왕실의 혼례식이 있는 경우에도 가례도감의 제조, 낭청 등에 대한 포상 기록이 나타난다. 이처럼 가례도감은 조선전기부터 꾸준히 사용된 용어이다.

한편, 가례도감과 더불어 가례색(嘉禮色)·가례청(嘉禮廳)이라는 말이 가례도감과 함께 왕실 혼례의 주관 관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조선 초 태종과 세종·문종·세조 연간에는 세자의 혼례와 후궁의 선발을 위해 가례색을 설치하였으며, 이 밖에도 『연산군일기』에 ‘가례청’이 나타나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도 가례청이라는 용어가 여러 차례 나타난다. 그러나 의궤의 경우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식을 모두 『가례도감의궤』로 정리하였으며, 가례청은 왕이나 왕세자 이외의 군(君)이나, 공주와 옹주 등의 혼례 때 주로 설치되었다. 왕자군(王子君)의 경우에는 특별히 국(局)을 세운 예가 없으며, 단지 가례청이라고 일컬었다고 한 『중종실록』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정조가 세손 시절 거행한 혼례식의 경우에도 가례도감 대신 가례청이 설치되었고, 총책임자의 직책은 도제조 대신 제조가 담당하였다.

의궤의 기록으로 볼 때 가례도감의 인원 구성은 인조대 이후 그대로 유지되다가 고종의 가례 때 큰 변화를 보인다. 제조가 11명으로 증가하였으며, 부제조와 문낭청(文郎廳)이라는 직책이 신설되었다. 제조 11명 중에는 종친이 4명 포함되었다.

참고문헌

  •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분류별 의궤 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의궤 종합목록』,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 1~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3~2005.
  • 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가례도감의궤』로 본 왕실의 혼례문화』, 효형출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