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궁(貞淸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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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사후에 성종의 후궁들이 살던 궁가(宮家).

개설

연산군 때 건립된 성종 후궁들의 거처이다. 처음에는 문종의 후궁들이 살던 수성궁(壽城宮)에 성종의 후궁을 살게 하고 이름만 정청궁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50칸의 별도 건물을 지어 성종의 후궁들이 살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15일).

위치 및 용도

한양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변천 및 현황

자수궁은 세종대 이후 후궁들의 처소로 이용되었으며 이전부터 비좁고 습하다는 문제로 입지가 논의되던 곳이었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을 수성궁에 살게 하고 이름을 정청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자수궁은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27일). 그러나 제안대군의 제택은 경복궁과 가까이 있어 자수궁에 머무는 여중들의 불경 소리가 대궐 내까지 들릴까 염려하여 자수궁은 옮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서 잠시 임영대군(臨瀛大君) 집에 옮겨 살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11월 1일). 대신 수성궁에 살게 했던 성종 후궁의 처소를 별도의 장소에 건립하였다. 정청궁이 완성되고 나서 이전에 자수궁과 수성궁에 나뉘어 살던 후궁들은 모두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형태

정청궁의 총 규모는 100여 칸이었다. 50칸은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매 1칸에 4인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나머지 50칸은 질병이 있는 사람이 사는 곳[疾病家]으로 매 1칸에 3인이 거처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05년(중종 1) 연산군이 폐위되던 날부터 그 비(妃)였던 신씨(愼氏) 또한 정청궁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중종 즉위 후 폐비 신씨의 거처가 선왕의 후궁의 처소와 같이 있는 것은 옳지 않으니 동대문 밖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집에 옮겨 안치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그러나 중종은 성 밖으로 내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며 한양 내 신승선의 집을 수리해서 안치하도록 했다(『중종실록』 1년 9월 2일).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