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회수(朴晦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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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86년(정조 10)~1861년(철종 12) = 76세]. 조선 후기 순조(純祖)~철종(哲宗) 때의 문신. 이조 판서(判書)의정부(議政府)좌의정(左議政) 등을 지냈다. 자는 자목(子木)이고, 호는 호산(壺山)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박종우(朴宗羽)이고, 어머니 영산 신씨(靈山辛氏)는 통덕랑(通德郞)신명성(辛命聖)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정랑(正郞)을 지낸 박인원(朴麟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사임(朴師任)이다. 첫째 부인 대구 서씨(大丘徐氏)는 서영보(徐榮輔)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원상(李元常)의 딸이다.

순조 시대 활동

1810년(순조 1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뒤 의릉참봉(懿陵參奉)이 되었다. 1816년(순조 16)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그 이듬해인 1877년(순조 17)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를 겸하였다. 1819년(순조 19) 병조 정랑이 되었고, 1820년(순조 20) 용강현령(龍岡縣令)이 되었는데, 이 때 잇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였다. 1823년(순조 23)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으며,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다. 이어 1824년(순조 24) 10월에는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고, 이듬해인 1825년(순조 25) 6월에는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가 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순조 24년 10월 15일, 순조 25년 6월 9일]

1827년(순조 27) 3월 승정원(承政院) 예방승지(禮房承旨)가 되었다가, 그 해 12월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가 되었다.[『순조실록』순조 27년 3월 15일, 순조 27년 12월 22일] 이 때 흉년이 들자 창고를 열고 백성을 구휼하여 어사가 포상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829년(순조 29) 11월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으며, 1832년(순조 32) 6월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고, 이어 그 해 7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가자되었다.[『순조실록』순조 29년 11월 25일, 순조 32년 6월 21일, 순조 32년 7월 9일] 1833년(순조 33) 7월에 진위사(陳慰使)진향사(進香使)의 부사(副使)로 정사(正使)이지연(李止淵) 및 서장관(書狀官)이준호(李竣祜)와 함께 청(淸)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다.[『순조실록』순조 33년 7월 25일] 1834년(순조 34) 3월 비변사(備邊司)제조(提調)가 되었고, 그 해 8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순조실록』순조 34년 3월 10일, 순조 34년 8월 15일, 순조 34년 9월 21일]

헌종 시대 활동

1835년(헌종 1) 6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고, 얼마 후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그 해 10월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부사조기영(趙冀永) 및 서장관한진정(韓鎭庭)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 왔다.[『헌종실록(憲宗實錄)』헌종 1년 6월 10일, 헌종 1년 6월 25일, 헌종 1년 10월 18일] 1836년(헌종 2) 5월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고, 1837년(헌종 3) 1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헌종실록』헌종 2년 5월 25일, 헌종 3년 1월 13일] 이듬해인 1838년(헌종 4) 11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1839년(헌종 5) 8월에는 형조 판서가 되었다.[『헌종실록』헌종 4년 11월 19일, 헌종 5년 8월 10일] 1840년(헌종 6) 2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그 해 7월에는 예조 판서, 10월에는 다시 동지정사로서 부사조기영 및 서장관이회구(李繪九)와 함께 청나라에 갔다 왔다.[『헌종실록』헌종 6년 7월 21일, 헌종 6년 10월 24일]

이후 예조 판서와 형조 판서, 한성부판윤, 병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며, 1843년(헌종 9) 12월 가자되었다.[『헌종실록』헌종 7년 4월 22일, 헌종 8년 4월 22일, 헌종 8년 6월 5일, 헌종 8년 7월 1일, 헌종 9년 9월 17일, 헌종 9년 12월 10일] 이어 1844년(헌종 10) 1월 이조 판서가 되었고, 1845년(헌종 11) 1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있다가, 1846년(헌종 12) 9월에는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헌종실록』헌종 10년 1월 2일, 헌종 11년 1월 11일, 헌종 12년 9월 20일] 이후 그는 1847년(헌종 13) 11월까지 우의정에서 해면하여 주기를 3회에 걸쳐 상소한 후에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가 되었다.[『헌종실록』헌종 13년 11월 21일]

철종 시대 활동

1849년(철종 즉위년) 7월 고부청시겸승습사(告訃請諡兼承襲使)의 정사로 부사이근우(李根友), 서장관심돈영(沈敦永)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가 그 해 12월에 돌아왔다.[『철종실록(哲宗實錄)』철종 즉위년 7월 17일, 철종 즉위년 12월 2일] 1851년(철종 2) 1월 중추부 판사로서 실록청(實錄廳)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다.[『철종실록』철종 2년 1월 19일] 1855년(철종 6) 12월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끝에 1856년(철종 7) 10월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철종실록』철종 6년 12월 5일, 철종 7년 10월 21일] 1858년(철종 9) 6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859년(철종 10) 5월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다가, 1860년(철종 11) 윤3월 다시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철종실록』철종 9년 6월 22일, 철종 10년 5월 5일, 철종 11년 윤3월 23일]

1861년(철종 12) 1월 다시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으나 그 해 5월말에 좌의정에서 물러났다.[『철종실록』철종 12년 1월 16일, 철종 12년 5월 30일] 그리고 그 해 6월 1일 중추부 영부사(領府事)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76세였다.[『철종실록』철종 12년 6월 1일]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성품과 일화

박회수(朴晦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몸가짐이 염정(恬靜)하고 단아하며 온화하고 공손한 자질과 바르고 자상하며 삼가고 신중 하는 지조는 임금이 의지하고 믿던 바이다. 조야(朝野)가 우러러 볼 정도로 모범적이었으며,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돌보는 것에 성실하게 전념하였다.[『철종실록』철종 12년 6월 1일]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