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형(金克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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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5년(선조 38)~1663년(현종 4)= 59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공조 정랑(正郞)과 화순현감(和順縣監) 등을 지냈다. 자는 태숙(泰叔)이고, 호는 사천(沙川), 또는 운촌(雲村)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광주(廣州)이다. 아버지는 학생(學生) 김인백(金仁伯)이고,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현령(縣令)권대훈(權大勳)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를 지낸 김계(金繼)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대호군(大護軍)김여광(金汝光)이다.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인데, 원두표(元斗杓) 형제와 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 등과 동문(同門)이다. 남인(南人)윤휴(尹鑴)와 절친한 사이였고, 노론(老論)송시열(宋時烈)과 성선(性善)체용(體用)에 대하여 극렬하게 논쟁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인재를 널리 구할 때 김극형(金克亨)의 스승 박지계는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사헌부 지평(持平)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박지계가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추존(追尊)할 것을 처음으로 발의(發議)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찬반양론으로 나누어 오래도록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자 박지계의 제자 김극형이 상소하기를, “이런 일은 실로 부자(父子)의 대륜(大倫)에 관계되므로 의리상 포의(布衣)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서인(西人)의 실권자들이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 8년 10월 23일 1번째기사』],[『남계집(南溪集)』 권73 「공조정랑증호조참판김공묘갈명(工曹正郞贈戶曹參判金公墓碣銘)」 이하 「김극형묘갈명」으로 약칭] 그때 김극형의 나이가 겨우 20세였다.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의 탐구에 전념하였다. 1631년(인조 9)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1633년(인조 11) 복제(服制)를 마치자, 박지계가 사헌부 지평으로서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서인들의 공박을 당하였으므로, 김극형이 상소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1635년(인조 13) 스승인 박지계가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 원두추(元斗樞)·원두표 형제, 조극선·이해(李澥)·권시, 변호길(邊虎吉)·변인길(邊麟吉) 형제와 함께 심상(心喪)을 1년 동안 입었다.[『잠야집(潛冶集)』]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전란을 피하여 충청도로 가서 두메산골에 들어갔었다. 1637년(인조 15) 나라에서 창릉참봉(昌陵參奉)을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김극형묘갈명」]

얼마 안 되어 강원도·경상도 여러 고을에 옮겨 다니면서 살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경기도 광주(廣州)의 백운산(白雲山) 아래 옛날 살던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사(精舍)를 짓고 윤휴·권시 등 절친한 친구들을 초치하여 주자(朱子)의 『성리대전(性理大典)』을 강습하였다. 그때 나라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여진족은 청(淸)나라를 건국하여 중국 본토를 점령하고 명(明)나라를 멸망시키고, 1644년(인조 22) 서울을 심양(瀋陽)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겨 연경(燕京)이라고 불렀다. 천하의 정세가 크게 변하여 오랑캐가 중국을 차지하고 조선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하자, 조선의 선비들은 과거 시험을 보고 관리가 되는 것을 기피하였으며, 관리들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김극형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서인들의 태도를 비판하고, 현실의 정세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태도가 옳다고 생각하였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北伐) 정책’을 표방하고 널리 인재를 구하였다. 이때 김극형은 “벼슬하는 것과 도(道)를 행하는 것은 다르다”며,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에 임명되자 주저하지 않고 부임하였다.[「김극형묘갈명」] 이후 세자익위사 위솔(衛率)로 승진하였고, 또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이어 공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김극형은 공조 정랑으로 있을 때 송시열과 성선의 체용에 대하여 편지를 주고 받으며 오래도록 논쟁을 벌였다. 김극형의 성설(性說)은 성(性)을 체(體)로 삼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용(用)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17] 그는 회덕(懷德)의 냉천(冷泉)으로 노론의 송시열을 직접 찾아가서 논쟁을 벌였고, 소론(少論)의 윤증(尹拯)과 서신을 교환하다가 <회니시비(懷尼是非)> 때에는 윤증을 지지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31]

1659년(효종 10) 전라도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갔는데, 직접 향약(鄕約)의 규칙을 만들어 농촌 마을의 풍속을 계도(啓導)하였다. 또 향교(鄕校)의 학규(學規) 조목(條目)을 간결하게 정비하고, 직접 향교에 나아가 일과(日課)를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효종(孝宗)이 김극형의 향소(鄕所)와 이약(里約 : 마을 규약)에 대하여 유시하기를,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향소는 고을의 심복(心腹)이고 이약은 고을의 이목(耳目)인데, 향소와 이약에 적임자를 얻으면 그 고을이 잘 다스려지고,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그 고을이 어지러워진다’고 하는데, 그 말이 진실로 맞다”고 칭찬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21]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현종이 즉위하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 문제가 일어났다. 서인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등은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윤선도(尹善道)와 윤휴 등은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삼년복(三年服)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송시열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여 기년복을 채택하고, 남인 윤선도를 삼수(三水)로 귀양 보냈다. 그 결과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 윤휴 등은 축출되었는데, 이것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고 부른다. 기해예송 때 화순현감으로 있던 김극형은 윤휴의 3년복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나 김극형은 전라도의 화순현감으로 있었으므로, 기해예송의 여파가 적게 미쳤다. 이후 화순현감으로 선정(善政)을 베풀면서 화순 사람들이 김극형의 유임을 바랐으므로, 그대로 화순현감으로 연임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1663년(현종 4) 2월 8일 전라도 화순의 관아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9세였다.[「김극형묘갈명」]

한편 김극형, 그의 아들 김징(金澄), 그의 손자 김구(金構)까지 청풍 김씨(淸風金氏) 가문의 3대에 걸쳐 시문(詩文)을 모운 『청풍세고(淸風世稿)』에 그의 시와 글 몇 편이 전한다. 또 윤증의 『명재유고(明齋遺稿)』와 윤휴의 『백호전서(白湖全書)』에도 그의 서간문(書簡文)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김극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기품이 장중(莊重)하였다. 처음 대면하면 의연하여 범하기 어려울 것 같으나, 가까이 하면 온화하고 인자하여 관대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는 학식이 통달하여 행동이 바르고, 일을 처리할 때 한결같이 의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해관계와 명예 따위를 위하여 자기 몸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집안에 제사를 지낼 때 미리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제기(祭器)와 어육(魚肉) 등을 각각 맡아서 준비하게 하고, 향사(享祀)를 지낸 뒤에는 다시 품평하고 맛을 보아 상벌을 내렸다. 부인과는 서로 손님처럼 대하고 출입할 때에는 배례(拜禮)를 행하였다. 또 자제들을 엄격하게 가르치고, 비록 조그마한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먹을 것도 충분치 못하였으나, 오직 자기의 분수로 여기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졌다. 남과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삼가하여 비록 친한 친구끼리 주고받는 예물이라고 하더라도 정도에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받지 않았다.[「김극형묘갈명」]

김극형은 평소 하루종일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었는데, 항상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을 즐겨 읽었고, 유교의 사서(四書)와 정자(程子)·주자의 여러 책 등을 번갈아 읽었다. 그가 학문을 궁리(窮理)하는 방법은 쇄소응대(洒掃應對 : 청소하고 손님 접대하는 잗단 일)와 같은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음양성명(陰陽性命)의 어려운 원리에까지 이르렀다. 연구하다가 간혹 잘 알지 못하는 부문이 있을 때에는 밤을 꼬박 새우고 식사하는 것도 잊은 채 궁리하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가끔 정사(精舍)나 선방(禪房)에서 윤휴·권시처럼 친한 친구와 어울려 학문을 여러 날 동안 토론하였는데,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이때 젊은 행자(行者)들이 그 토론을 듣고 유학의 이론을 익히는 자도 많았다.[「김극형묘갈명」]

김극형이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그 고을에서는 옛날부터 유치미(留置米)라고 하여, 공인(工人)들의 늠료(廩料)로 지급할 포목(布木)을 거두어 병조에 상납하고 일부를 남겨 고을의 경비로 사용하는 관례가 있었다. 김극형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사실대로 모두 바치게 하고, 다만 잡종 요역(徭役)을 감면시켜서 백성들의 힘을 들어주었다. 아전 가운데 법을 범한 자가 있었는데, 그 범죄가 사형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사형을 고집 부린 적이 있었다. 이에 김극형이 굳게 항의하면서 사직고 관직을 떠나려고까지 하자 전라도관찰사가 아전을 감면하여 논죄(論罪)하게 하였다. 또 큰 흉년이 들어서 길거리에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 있자 현감김극형이 정성을 다하여 기민(饑民)을 구휼하고, 심지어 관아에 쓰는 물품마저 줄여서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에 보태게 하였으므로, 백성들 가운데 죽지 않고 목숨을 건진 자가 많았다.[「김극형묘갈명」]

묘소와 후손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백운산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 1705년(숙종 31) 12월 좌의정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을 세웠다가, 1710년(숙종 36) 3월 증손자 김재로(金在魯)가 지은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그 뒤에 그의 무덤을 충청도 충주(忠州) 봉황리(鳳凰里)로 이장하였는데, 현재의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능골 마을이다. 그의 두 부인인 광주 정씨(光州鄭氏)와 청송 심씨(靑松沈氏)의 묘역도 함께 있다. 그는 죽은 뒤에 호조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다.

첫째 부인 광주 정씨는 정호(鄭頀)의 딸이고, 둘째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은 대호군심대해(沈大瀣)의 딸이다. 첫째 부인 정씨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전라도관찰사김징이고, 딸은 진사(進士)조세달(趙世達)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부인 심씨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담(金澹)·김혼(金混)·김순(金洵)·김견(金涀)이고, 딸은 박상일(朴尙一)과 장령(掌令)임원구(任元耈)에게 출가하였다.[「김극형묘갈명」] 4남 김순은 공조 정랑을 지냈다. 장남 김징의 후손 가운데 손자 김구는 우의정을 지냈고, 증손자 김재로는 영의정을 지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명재유고(明齋遺稿)』
  • 『백호전서(白湖全書)』
  • 『백호집(白湖集)』
  • 『잠야집(潛冶集)』
  • 『탄옹집(炭翁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서계집(西溪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한수재집(寒水齋集)』
  • 『남계집(南溪集)』
  • 『서계집(西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