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황(兪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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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9년(선조 32)∼1655년(효종 6) =57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고, 자는 전숙(典叔)이며, 호는 봉주(鳳洲)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의(參議)를 지낸 유성증(兪省曾)이며, 어머니 능주 구씨(綾州具氏)는 참봉(參奉)구준(具濬)의 딸로 정경부인(貞敬婦人)이다. 할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유대의(兪大義)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된 유영(兪泳)이다.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기도 하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고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32년(인조 10)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633년(인조 11)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5세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0년 2월 15일, 『방목(榜目)』]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으로 천거되어 검열(檢閱)을 지냈고, 이어 예문관 대교(待敎) 및 예문관 봉교(奉敎)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1년 10월 2일, 인조 12년 3월 20일, 인조 12년 윤8월 21인] 1635년(인조 13)에는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라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소위장군(昭威將軍)이 되었다.[『인조실록』인조 13년 1월 16일]

1636년(인조 14) 다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유황(兪榥)은 후금이 청(淸)으로 국호를 고친 후 벌인 청나라의 건국 축하에 참석하였던 춘신사(春信使)나덕헌(羅德憲) 등이 돌아오자, 이들을 참(斬)하여 대의를 밝힐 것을 청원하였다.[『인조실록』인조 14년 5월 15일] 또한 청의 국서(國書)가 장차 이를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계청(啓請)하기를, “적노들이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하기가 금노(金虜)의 조유(詔諭)보다 더 심합니다.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마땅히 일심으로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 팔도에 사신을 보내어 면목을 일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삼군은 기세를 증강시켜야하는 것인 바, 이야말로 그러한 때입니다.”라고 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7 「전라감사유공신도비명(全羅監司兪公神道碑銘)」 이하 「유황신도비명」으로 약칭] 즉 청의 국서를 받지 말 것과 팔도에 사신을 보내어 전쟁에 대비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반청주전론(反淸主戰論)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후 성균관 전적으로 체직되었다가 병조 좌랑(佐郞)을 거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보임되었다.[『인조실록』인조 14년 10월 8일, 「유황신도비명」] 이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강화도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인조가 남문(南門)에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겨서 머물렀다. 이에 유황도 말을 달려서 다다랐으나, 성(城)이 이미 완전히 포위되어서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유황신도비명」] 그러자 그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을 강화도에 호종하고, 곧 호서순검사(湖西巡檢使)가 되어 전라도 지역에서 충의를 격려하였으며, 군사 모집 및 군량 조달을 위해 활약하였다.[『인조실록』인조 15년 윤4월 13일] 이때 길에서 전라병사(全羅兵使)를 만났는데, 그가 군사를 머물러 두고 움직이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꾸짖기를,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에 있는데, 감히 이처럼 배회하고 있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북을 울리며 군사를 진격시켰다.[「유황신도비명」]

철저한 배청파(排淸派)였으므로, 전쟁이 끝난 뒤에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향리(鄕里)에 은거하였다.[『인조실록』인조 15년 2월 19일, 「유황신도비명」] 1640년(인조 18)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으며, 1642년(인조 20)에는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인 1643년(인조 21) 7월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인조실록』인조 20년 6월 23일, 인조 21년 7월 6일, 「유황신도비명」] 1644년(인조 22) 2월 다시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전국에 전염병이 만연해 많은 백성들이 죽자, 외방(外方)의 신당(神堂)에서 기도하기 위하여 영남 지방을 다녀온 후 시사육조(時事六條)를 인조에게 올렸다.[『인조실록』인조 22년 2월 7일, 「유황신도비명」] 이후 연달아 홍문관의 관리가 되었는데, 그해 8월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12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인조실록』인조 22년 8월 8일, 인조 22년 12월 18일]

1645년(인조 23) 4월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정랑이 되었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을 겸하였다.[『인조실록』인조 23년 4월 16일, 「유황신도비명」] 그리고 그해 9월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이 과정에서 유황은 세자책례도감(世子冊禮都監)의 도청(都廳)을 역임하였으며, 왕세자 책봉이 끝난 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인조실록』인조 23년 9월 27일, 인조 23년 10월 12일] 1646년(인조 24)에는 병조 참의(參議)를 거쳐 형조 참의를 역임하였고, 1647년(인조 25) 12월에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24년 9월 5일, 인조 25년 12월 26일, 「유황신도비명」] 그리고 1648년(인조 26)에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가 바로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제수되었다.[『인조실록』인조 26년 윤3월 20일] 이후 그는 전라도관찰사와 승정원 우승지(右承旨), 공조 참의 등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26년 4월 17일, 인조 26년 6월 16일, 「유황신도비명」]

1651년(효종 3)에는 서천군수(舒川郡守)가 되었는데, 이때 이익을 추구하여 백성들을 해치는 간신들을 체포하여 형벌을 가하였으나, 형벌이 엄격하였던 것이 문제가 되어 파면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3년 10월 23일, 「유황신도비명」] 1655년(효종 6) 4월 1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7세였다.

성품과 일화

유황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총명하고 영특하여 젊어서 월사(月沙)이정구를 따라서 공부하였는데, 이정구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또한 단아하고 검약(儉約)하였으며, 분화(紛華)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이름난 사우(士友)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 어버이를 섬기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집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보살피는 이치와 일을 주재하는 의리가 진실로 다른 사람들이 능히 미치지 못하였다.[「유황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유황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차산리에 있는데, 아버지 유성증의 묘 바로 아래에 있으며 둘째 부인인 은진 송씨(恩津宋氏)와 합장되어 있다.

유황의 첫째 부인인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현감(縣監)유건(柳健)의 딸로, 1녀를 낳았는데 승지(承旨)이정(李程)에게 시집갔다. 입후(入後)한 아들 유명기(兪命夔)는 정랑을 지냈다. 둘째 부인인 은진 송씨는 직장(直長)송시욱(宋時煜)의 딸로 정경부인이며, 1남 유명뢰(兪命賚)를 낳았는데, 유명뢰가 4세 되던 해에 유황이 세상을 떠났다.[「유황신도비명」] 그리하여 국가의 법과 유황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유명뢰가 종사(宗事)를 이어 받았으나, 유명뢰가 성장한 후 유명기에게 정통(正統)을 양보하였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27 「감역유공묘갈명(監役兪公墓碣銘)」]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