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개국(崔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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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6년(중종 11)∼1579년(선조 12) = 64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이다. 자는 자성(子省), 호는 남악(南岳)·추담(楸潭)이다.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충주 북촌(北村)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參判)에 증직된 최분(崔汾)이고,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현감(縣監)이옹(李顒)의 딸이다. 증조부는 우사어(右司禦)를 지내고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된 최영(崔榮)이고, 조부는 감찰(監察)을 지내고 형조 참의(參議)에 추증된 최사공(崔士恭)이다. 옥계(玉溪)최대립(崔大立)의 4촌 동생이며, 준암(樽巖)이약빙(李若氷)의 문인이다.

명종 시대의 활동

1538년(중종 33)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방목』)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45년 7월 명종이 즉위할 때 예조 좌랑(佐郞)이 되어서 어가(御駕)를 호위하였고, 1547년(명종 2)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는데, 강직한다는 명성이 있었다.(『월사집(月沙集)』 권42 「강원도관찰사 증 예조 참판 최공개국 신도비명(江原道觀察使贈禮曹參判 崔公蓋國神道碑銘)」 참조. 이하「최개국 신도비명」으로 약칭함.) 1548년(명종 3)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막하(幕下)가 되어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는데, 흉년이 들자 각 고을의 창고에 식량이 모두 떨어졌다. 그는 서울에서 파견된 진휼사(賑恤使)와 함께 기근이 더욱 심한 곳에 염장(鹽醬)과 황각채 등의 물품을 많이 가져다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끓여 먹여서 많은 목숨을 구하였다. 그 공으로 병조 정랑(正郞)이 임명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옮겼다.

1550년(명종 5) 개성 경력(開城經歷)으로 좌천되었는데, 그가 지평으로 있을 때 영의정이기(李芑)의 사사로운 부름을 받고도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충주(忠州)의 옥사>가 일어나서 그의 스승 이약빙(李若氷)과 그의 4촌 최대립(崔大立) 등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고, 충주는 반역향(反逆鄕)이라고 하여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었다. 충주 옥사는 이보다 앞서 일어난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과 관련이 있다. 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일어나자, 소윤(少尹)의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는 그 배후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살아남은 규암(圭菴)송인수(宋仁壽) 등 사림파(士林派)를 벽서의 배후로 지목하여 모두 숙청하고, 우천(牛泉)이약수(李若水)의 동생 준암(樽巖)이약빙도 대윤(大尹)윤임(尹任)의 인척이라고 하여, 그 제자들과 함께 체포하여 죽였다.

충주에 사는 최개국의 4촌 형제들도 모두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으므로, 그는 불안해 하다가 스스로 국청(鞫廳)에 나가서 자백하였다. 이에 대간(臺諫)에서 그를 탄핵하기를, “개성 경력최개국은 이약빙의 고제(高弟)로서 평소에 정이 두터워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또 그 역당 최대립 등과는 동성(同性) 4촌간으로 한 마을에 살았는데, 그들이 역란(逆亂)을 모의할 때에 최개국이 충청도도사로서 고향집에 자주 왕래했으니, 그 역모를 몰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명종이 그를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도록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 참조.) 최개국은 도성(都城)에서 쫓겨나, 황해도 양산(楊山: 안악)에 임시로 옮겨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다. 집안의 식량이 자주 떨어졌으나, 그는 태연하였다.(「최개국 신도비명」 참조.)

1553년(명종 8) 복권되어 함흥 판관(咸興判官)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10여 년간 주군(州郡)의 수령으로 드나들다가, 1565년(명종 20) 해주목사(海州牧使)가 되었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고 하여, 명종이 향표리(鄕表裏)를 1벌을 하사하였다.(『실록』)그가 해주 목사로 있을 적에 권세가 있는 재상이 그 고을 백성의 전답을 빼앗고 관찰사에게 부탁하여 그 땅의 주인을 구속시키자, 그가 부임하여 맨 먼저 그 옥사를 처리하여 주인을 내보내려고 하였다. 그때 황해도관찰사가 그 재상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최개국에게 앞으로 화(禍)가 닥칠 것이라고 위협하니, 최개국이 응수하기를, “나는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낮은 사람에게 재앙을 입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고, 마침내 그 주인을 석방하였다. 그는 전후하여 큰 고을을 여덟 번 맡았으나, 모두 근면하고 근신하면서 자신을 가다듬고 충심으로 공무를 이행하였다.(「최개국 신도비명」 참조.)

선조 시대의 활동

선조 초기에 참상관(參上官) 여러 관직을 전직하다가, 통례문(通禮門) 좌통례(左通禮)에 이르렀다. 임기가 차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여, 당상관(堂上官)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 7) 호조 참의가 되었다가, 호조 참판(參判)으로 승진하였고,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조.) 1576년(선조 9)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조선에서 포로된 중국 사람들을 돌려보내 주었다고 하여, 칙서(勅書)를 내려서 포장(褒獎)하고 은량(銀兩)과 채단(綵緞)을 보내주었다.(『연려실기술』 별집 권5 참조.) 그 뒤에 사옹원(司饔院)정(正)·군기시(軍器寺) 정·봉상시(奉常寺) 정을 역임하였다.

1578년(선조 11) <을사사화>때 소윤 윤원형과 이기를 도와서 사림파 인물들을 숙청한 공훈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된 사람들의 위호(位號)를 삭제하였다. 최개국도 그때 예조 좌랑으로서 명종의 어가를 호위하여 관례에 따라 위사 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이 되어 한 품계를 승진하였기 때문에 위사 공신 위호가 삭감되면서 품계도 정3품하 통훈 대부(通訓大夫)로 강등되었다. 1579년(선조 12)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4세였다.(「최개국 신도비명」 참조.)

성품과 일화

최개국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차분하고 침착하며, 얼굴에 화기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의리(義利)에 따지거나 시비(是非)를 가릴 때에는 확고한 신념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았다. 태어난 지 7세 때에 이미 글을 읽고 그 글의 대의(大義)에 통하였고, 13세 때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어른처럼 상례(喪禮)를 지켰다. 이미 아버지를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가정을 꾸릴 수 없게 되자,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충주의 북촌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서, 마침내 과거에 합격하였다.(「최개국 신도비명」 참조.)

이기가 명종 때 소윤 윤원형과 손을 잡고 권력을 휘두를 때, 그의 부인이 이기의 종손녀였으므로, 이기가 그의 명성을 듣고 좋은 말로 한번 만나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최개국은 이기의 사람됨을 경박하게 여겨서 끝내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종 초기 이기의 배척을 받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최개국 신도비명」 참조.) 1550년(명종 5) 7월 그의 스승 이약빙이 <충주의 반역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서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유자(儒者)들은 모두 이약빙의 제자들이었다. 그때 개성경력최개국도 자진하여 체포되어 형문(刑問)을 당하고 파직되어 문외 출송되었다. 당시 사림파에서는 윤원형과 이기를 ‘2흉(凶)’이라고 일컬으면서 모두 싫어하였다.

최개국은 집이 가난하여 더러 끼니를 잇대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고아를 데려다가 양육하고 어려운 과부를 도와주는 등, 남의 다급할 때 자신의 유무(有無)를 따지지 않고 은정을 베풀었으며, 그가 조정에 나가서 30여 년 동안 벼슬살이 하면서 검소하게 일생을 끝마쳤던 것도 모두 부인의 덕택이었다.(「최개국 신도비명」 참조.) 부인 이씨는 저자에서 어떤 물건을 사고 나서 그 값을 계산해 보고, 그 물건의 값보다 싸게 샀을 경우에는 쫒아가서 돈을 더 주면서,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였을 만큼 현모양처였다.

비문과 후손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월사집』 권42 「강원도관찰사 증 예조 참판 최공개국 신도비명」)

첫째부인 개성고씨(開城高氏)는 고희윤(高希胤)의 딸인데, 일찍이 죽었다. 둘째부인 평창이씨(平昌李氏)는 사포(司圃)이희양(李希陽)의 딸이고, 이기의 종손녀인데,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 최전(崔錪)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시 정을 지냈고, 셋째 아들 최섬(崔銛)은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지냈고, 둘째 딸은 사헌부 장령(掌令)조응문(趙應文)에게 시집갔다.(「최개국 신도비명」 참조.)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월사집(月沙集)』
  • 『간이집(簡易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퇴계집(退溪集)』
  • 『미암집(眉巖集)』
  • 『지봉집(芝峯集)』
  • 『동강유집(東江遺集)』
  • 『옥계집(玉溪集)』
  • 『야계집(倻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