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金永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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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46년(세종 28)∼1502년(연산군 8) = 57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연산군(燕山君) 때 활동한 무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자는 적옹(積翁)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안동 풍산(豊山)이다. 아버지는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김계권(金係權)이고,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제평공(齊平公)권맹손(權孟孫)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김삼근(金三近)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합문(閤門)봉례(奉禮)를 지낸 김혁(金革)이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46년(세종 28)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안동 풍산으로 돌아왔다. [『대산집(臺山集)』 권13 「내전(內傳)」] 무예를 열심히 익혔지만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음사로 군직(軍職)에 보임되었다가, 1475년(성종 6)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6년 10월 22일) 타고난 성질이 민첩하여 옥사를 신속하게 처결하고 적체된 옥송(獄訟)이 없었으므로, 당상관(堂上官)노사신(盧思愼)과 홍응(洪應)이 천거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 이후 어머니가 연로하다며 외직을 자청하여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었으나, 군적(軍籍)을 착오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38 「김영수(金永銖)」]

그러다가 명(明)나라 사신 정통(鄭通)이 오자, 영접도감(迎接都監)의 낭관(郎官)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1482년(성종 13) 의금부 경력(經歷)에 임명되었다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로 옮겼다.(『성종실록』 13년 4월 3일) 또 중추부(中樞府) 도사가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영덕현령(盈德縣令)이 되었다. 1485년(성종 16) 극심한 흉년이 닥쳤는데, 김영수가 죽을 끓여 기민(饑民)을 구휼한 덕에 온 고을이 무사할 수 있었으므로, 진휼사(賑恤使)가 조정에 보고하여 직질(職秩)을 건너뛰어 내섬시(內贍寺)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장차 종루(鐘樓)를 수리하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김영수를 천거하였으므로 선공감(繕工監)정(正)으로 전임되었다. 1491년(성종 22)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어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였다가, 상의원(尙衣院) 첨정과 사옹원(司饔院) 첨정을 거쳐, 통례원(通禮院) 봉례에 임명되었다.[『국조인물고』 권38 「김영수」],(『성종실록』 22년 6월 5일)

1495년(연산군 1)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외직을 자청하여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파직당한 후 고향 풍산으로 돌아왔다.(『연산군일기』 1년 2월 24일),(『연산군일기』 1년 4월 3일) 그때 80세를 넘긴 어머니를 위하여 낙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놓고 어머니와 함께 자연의 풍광을 즐겼다. 1496년(연산군 2)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예법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몹시 여위었다.[『국조인물고』 권38 「김영수」]

1498년(연산군 4) 조정에서 평안도 지방의 도로와 역참(驛站)이 쇠잔하고 피폐하다면서 김영수를 정3품의 금교도(金郊道)찰방(察訪)에 임명하였다. 그 해에 큰 홍수가 나서 평안도 지방의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김영수가 기민 구제를 위하여 임금에게 부탁하여 쌀 3백 석(石)과 소금 1백 석을 받아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그 뒤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김영수에게 연해에 있는 소금 굽는 가마를 점검하게 하였으므로, 김영수는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염전을 왕래하다가 장기(瘴氣)에 중독되었다. 그리고 1502년(연산군 8) 7월 12일 금교참(金郊站)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7세였다.[『국조인물고』 권38 「김영수」]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다.

성품과 일화

김영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너그럽고도 굳세었으며, 체격이 장대하고 말수가 적었는데,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좋았다.[『국조인물고』 권38 「김영수」]

1498년(연산군 4) 조정에서 평안도 지방의 도로와 역참을 재건하기 위하여, 김영수를 금교도 찰방으로 보냈다. 그때 김영수가 말하기를, “서쪽 변방에 장기로 인하여 전염병이 유행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병에 많이 걸리는데, 남쪽 지방 사람은 거기에 가서 거처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여러 해 동안 폐출되어 있다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높은 관직에 발탁되었는데, 지금 내가 만일 사양한다면 이것은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고 곧바로 부임하였다. 부임 후 그는 역로(驛路)의 일에 관하여 폐단이 되는 것들을 물어서 전부 개혁하였다. 또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는 사인(使人)의 자제나 군관(軍官)들의 밀무역에 대해 단호하게 처벌하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금법을 범하지 않았다.[『국조인물고』 권38 「김영수」]

그는 활쏘기와 말 타기, 바둑과 음률(音律)을 잘하였으며, 요리하는 일까지도 잘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특히 서법에 있어서 해서를 잘 썼다. 젊을 때에는 글을 읽지 않았으나, 벼슬길에 나가면서부터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여 견문에 해박하였다. 그가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문인들이었고, 무인은 드물었다.

그가 파직당하여 고향 풍산에서 살 때 수시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을 읽고 그 내용을 외웠다. 그리고 항상 아들들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독서를 하지 못하고 늘그막에 이르렀으나, 너희들은 이 늙은이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고 날마다 훈계 격려하여 모두 학업을 성취하도록 하였다. 그는 하루 종일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으며 조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다. 또 그는 가정을 다스리는 데 엄격하여 아들딸과 며느리들에게 시서(詩書)를 가르치고 길쌈에 힘쓰도록 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경건하게 받들고 빈객(賓客)을 잘 접대하도록 한 다음에, 나머지 음식을 모두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봄가을에는 향당(鄕黨)의 부로(父老)들을 모두 모아 향약(鄕約)을 만들어 서로 상부상조할 것을 강론하였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장로(長老)로 추대하고 우러러 보며 존경하였다.[『국조인물고』 권38 「김영수」]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역골의 선영에 있고, 성현(成俔)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능성현령(綾城縣令)김박(金博)의 딸인데, 자녀는 3남 6녀를 낳았다. 장남은 김영(金瑛)이고, 차남은 김번(金璠)이며, 3남은 김순(金珣)이다. 장녀는 김연손(金延孫)의 처이고, 차녀는 김윤종(金胤宗)의 처이며, 3녀는 금원수(琴元壽)의 처이다. 이 외에 3명의 딸이 더 있다.[『국조인물고』 권38 「김영수」]

안동 김씨는 본관이 같으면서도 ‘구안동(舊安東) 김씨’와 ‘신안동(新安東) 김씨’로 나누어지는데, 신안동김씨 가운데 김영수의 후손들을 ‘장동 김씨(壯洞金氏)’라고 부른다. 이것은 김영수의 둘째아들인 김번이 서울의 장동(壯洞)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장동 김씨는 김번의 증손자 김상헌(金尙憲)과 김상용(金尙容) 형제가 나란히 정승이 되면서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17세기 초부터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세도정치를 실시한 안동 김씨가 바로 이들이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풍고집(楓皐集)』
  • 『대산집(臺山集)』
  • 『매헌집(梅軒集)』
  • 『정재집(定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