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우(朴光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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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5년(연산군1)~1545년(명종즉위) = 51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국이(國耳), 호는 필재(蓽齋)·잠소당(潛昭堂)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인데, 서울에서 태어났다. 사헌부(司憲府)감찰(監察)박유(朴濡)의 손자이고,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박광좌(朴光佐)의 아우이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훌륭한 재주와 자질을 가졌다고 조광조(趙光祖)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또 스스로 자기 학문을 이룩하려고 항상 노력하였다. 1519년(중종14) 25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는데, 이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성균관(成均館)의 유생들을 이끌고 대궐로 들어가서 이에 항의하는 극렬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1525년(중종20) 나이 31세에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시위 경력 때문에 좋은 보직을 얻지 못하고 항상 산관(散官)에 머물렀다. 1528년(중종23) 겨우 형조좌랑에 임명되어,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를 거쳐서 1533년(중종28) 호조정랑이 되었다. 1536년(중종31) 재령군수(載寧郡守)로 있을 때 문장에 능하다고 하여 차사원(差使員)으로 선발되어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여 중국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 그 뒤에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자 1543년(중종38) 성균관사예(司藝)로 발탁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사헌부에서 강원도 지방의 구황(救荒)을 위해서 박광우를 강릉부사에 잉임(仍任)시킬 것을 요청하자 중종(中宗)이 허락하였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1545년(인종1) 사헌부장령(掌令)·집의(執義)로 승진하였으며,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1545년(명종즉위) 사간원사간으로 임명되었으나,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서 신장(訊杖)을 맞고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는데, 나이가 51세였다.

기묘사화 때 활약

1519년(중종14)에 25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이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박광우는 이약수(李若水)와 함께 성균관의 유생 1천여 명을 이끌고 대궐로 달려가서, 조광조 등을 체포한 것을 항의하면서 호곡(號哭)하였다. 이때 박광우가 여러 학생 가운데에서 뛰어나와 큰 소리로 외치기를, “전하께서 오늘날 하시는 일은 정말 천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하고 항의하였다. 궁궐을 수위하던 군사들의 곤봉을 맞아 박광우는 몸에 상처가 나서 피를 흘렸고, 제생(諸生)들도 혹은 망건이 벗겨지기도 하고 혹은 머리가 풀어져서 피를 흘리면서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대내(大內)에까지 들렸다 한다. 격노한 중종은 당장 그들을 끌어내게 하였으므로, 모두 의정부(議政府) 행랑(行廊)으로 끌려나와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옷자락을 찢어 머리를 동여매고, 의정부 행랑에 나와 앉아서 제생과 상의하여 조광조 등을 구원하는 글을 올리기로 결의하였는데, 장안 방리(坊里)의 향도(鄕徒)들 중에서 조광조 등의 신원(伸冤)을 위해 글을 쓰기를 요청하는 자가 그의 앞에 죽 늘어섰다. 그가 입으로 구술(口述)하는 내용을 당시 젊은 학생이던 이찬(李澯), 김노(金魯)에게 붓을 들고 받아 적게 하였는데, 그가 글을 줄줄 불러주는데 글이 샘솟듯 하여 김노와 이찬이 미처 종이에 받아쓰지를 못할 정도였다. 단번에 10여 통의 글을 만들어 중종에게 바쳤는데, 그 사연이 매우 간절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때 이약수 등은 체포되었으나, 박광우는 방면되었다.

을사사화 때 피화

1545년(명종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박광우가 사간원사간으로 있었는데, 윤임 일파는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몰아내면서 ‘사림파(士林派)의 잔당(殘黨)’도 아울러 제거하려고 하였으므로, 그는 명종이 싫어하는 것을 무릅쓰고 간쟁(諫爭)하다가, 윤원형의 숙적 우의정유관(柳灌)과 내통하였다고 하옥되었다. 박광우는 곽순(郭珣)을 만난 것이 그 이웃에 사는 유관과 만난 것으로 와전된 것이라 공초하였으나, 영의정(領議政)홍언필(洪彦弼) 등이 박광우가 승복하지 않았다고 하여 형추(刑推)할 것을 청하니, 어린 명종이 아뢴 대로 하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때 명종은 12세였으므로, 이는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명령이었다. 박광우는 곤장을 맞으면서 온갖 문초(問招)를 받고도 끝까지 자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해도 봉산(鳳山)의 동선역(洞仙驛)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반죽음이 된 상태로 겨우 돈의문(敦義門) 밖에 나서자마자, 길 위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이듬해 가산(家産)마저 관가에 몰수당하였다. 그의 형 박광좌(朴光佐)도 이때 함께 장살(杖殺)당하였다.

성품과 일화

박광우가 귀양을 가다가 돈의문 밖에서 숨을 거둘 때 친구들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세 아들이 학문을 하더라도 제발 과장(科場)에는 가지 말게 해 달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처음에 기묘사화 때에는 훈구파(勳舊派) 남곤(南袞)·심정(沈貞)에게 화를 당하였고, 뒤에 을사사화 때에는 소윤(小尹)윤원형·이기(李芑) 등에게 해를 입어서, 마침내 두 형제가 함께 목숨까지 잃는 비극을 당하였다. 처음에 박광우는 조광조 등 사림파의 학자들을 추종하였고, 나중에는 이언적(李彦迪)·송인수(宋麟壽)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를 이끌었으므로, 후일 사림(士林)의 선비들이 그의 사상과 절의를 숭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오리동(梧里洞) 선영의 언덕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상주박씨세보(尙州朴氏世譜)』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기묘록보유(己卯錄輔遺)』
  • 『동각잡기(東閣雜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성호사설(星湖僿說)』
  •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