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敦義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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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돈의문 |
한글표제 | 돈의문 |
한자표제 | 敦義門 |
상위어 | 성문(城門) |
동의어 | 새문[新門], 서대문(西大門) |
관련어 | 경성(京城), 도성(都城), 성곽(城郭), 왕성(王城), 한성(漢城), 한양(漢陽) |
분야 | 문화/예술/건축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연노 |
건립시기/일시 | 1396년(태조 5) |
장소 | 도성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
양식 | 우진각지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돈의문(敦義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5년 9월 24일, 『태종실록』 13년 6월 19일, 『세종실록』 3년 10월 29일, 『세종실록』 4년 2월 23일, 『숙종실록』 33년 9월 14일, 『영조실록』 12년 4월 22일 |
조선시대 한양 성곽의 서쪽에 위치한 문.
개설
돈의문(敦義門)은 1396년(태조 5)에 한양 성곽을 만들면서 성곽의 서쪽에 만든 문이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몇 차례의 개조가 있었지만 큰 훼손 없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내려오다가 1915년 6월에 총독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위치 및 용도
돈의문은 한양 성곽에서 서쪽 대문의 역할을 담당한 문이다. 일명 새문[新門]이라고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돈의문은 1396년 한양 성곽의 완성과 더불어 만들어졌다. 이때 각 문에는 월단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홍예를 틀고 그 위에 누각을 지은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만들어진 돈의문은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의 의견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태종실록』 13년 6월 19일). 이때의 문은 인덕궁(仁德宮) 앞에 만들었으며 문의 명칭을 서전문(西箭門) 또는 서살문이라고 했다. 서전문의 터를 정할 때, 원래는 안성군(安城君)이숙번(李叔蕃)의 집 앞으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숙번이 인덕궁 앞에 소동(小洞)이 있으므로 길을 열고 문을 세울 만하다고 하여 그곳으로 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서전문을 통과하는 길은 곧게 뻗지 못하고 구불한 길이 되었다.
1421년(세종 3)에는 도성수축도감을 만들어 한양의 성곽을 보수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다(『세종실록』 3년 10월 29일). 이때 서전문과 그 옹성의 허물어진 곳을 보수했는데 이를 토성(土城)이라고 기록했다. 즉 기존의 서전문에는 옹성이 있었고 성곽은 토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보수 공사는 1422년에 마쳤으며 기존의 서전문을 막고 다시 돈의문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4년 2월 23일). 이때 돈의문은 이전 서전문을 만들 당시의 첫 의도대로 이숙번의 집 앞에 만들어졌다. 그 결과 대문을 통과하는 길이 구불거리던 것에서 반듯한 직로(直路)로 변경되었다.
광해군대에 이르러 돈의문 안쪽에 새롭게 경덕궁(慶德宮), 즉 현재의 경희궁을 조성하였다. 경덕궁은 돈의문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돈의문을 열어두었을 경우 지나가는 행인과 수레 때문에 경덕궁 주변이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폐단이 있었다. 이런 까닭에 1706년(숙종 32)부터 왕이 경덕궁에 이어한 경우 돈의문을 닫아두기 시작했다(『숙종실록』 33년 9월 14일). 영조 때에도 왕이 경덕궁으로 이어한 경우 수시로 돈의문을 닫았다가 필요할 때 임시로 문을 열어주었는데, 경영고(京營庫)에서 공상(供上)할 때 문부장(門部將)이 문의 열쇠를 내주도록 청한 후 잠깐 열었다가 곧바로 닫았다는 기록이 있다(『영조실록』 12년 4월 22일).
조선초에 만들어진 돈의문은 언제부터인지 문루 없이 전해졌다. 그러다가 1711년 민진후(閔鎭厚)가 수구문(水口門) 즉, 광희문을 새로 개설하면서 문루도 같이 조성하자고 하였다. 이 건의에 대해 금위영에서는 수구문이 완전히 만들어진 다음에 문루를 조성하자고 하였다. 이때 숙종은 광희문의 문루를 만들기 위해서 모아둔 재목으로 돈의문 문루를 조성하게 했다. 일제강점기까지 전해졌던 돈의문의 문루는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전해진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전차 궤도 복선화 사업으로 헐려나갔다. 1915년 3월 2일 총독부 토목국에서 돈의문의 철거를 위한 경매 공고가 있었고, 6월에 모두 해체되었다.
최근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옛 돈의문의 현판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현판의 뒷면에는 “1711년 11월 15일 유학 신 조윤덕이 쓰고, 1749년 2월 18일 영건소에서 개조하였다[辛卯十一月十五日幼學臣趙潤德奉敎書 己巳二月十八日營建所改造]”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1749년에도 돈의문의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돈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을 가지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공포는 이익공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지붕에는 취두와 잡상을 두고 양성바름을 하였다.
참고문헌
- 서울시, 『돈의문 복원타당성조사 및 기본계획』, 2010.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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