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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4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의금부가 임금의 특명을 받아 중죄인을 국문(鞠問)하는 일.

개설

추국(推鞫)은 조선시대 의금부(義禁府)·사헌부(司憲府)·형조(刑曹) 등 사법 기관에서 중대 범죄에 관련된 죄인을 심문하고 조사하여 사건의 진실을 밝혀 처벌하기 위한 심리 과정이었다. 추국은 일반 범죄는 물론이고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윤리를 거스르는 강상 죄인을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조선초기 의금부가 설치되기 이전 추국은, 관리의 범죄는 사헌부가 주관하였고 일반 범죄는 형조가 맡았다. 형조는 잉집노비(仍執奴婢)·거집노비(據執奴婢)·도망노비(逃亡奴婢)의 일과 투구(鬪毆)·범간(犯奸)·도적(盜賊) 등의 일을 추국(推鞫)하여 형벌을 결단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사헌부는 관리에 대한 범죄와 비리를 추국하여 탄핵을 주도하였다. 1414년(태종 14)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의금부(義禁府)로 개편되면서 왕의 명령으로 강상 범죄에 대한 추국을 주도적으로 관장하였다. 강상 범죄 가운데 삼성죄인(三省罪人)에 대한 신문은 삼성(三省: 의정부·사헌부·의금부)이 합좌하여 추국하였다. 또한 국가 전복을 기도한 역옥 사건은 국왕이 궁궐 마당에 국청(鞠廳)을 열어 친국(親鞫)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초 태종(太宗)은 고려시대의 수도 치안 기구인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순위부(巡衛府)로 개칭한 후, 곧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재편하면서 성격 변화를 도모하였다. 곧이어 태종은 의용순금사의 포도(捕盜)·순작(巡綽) 등의 고유 업무를 5위(衛)로 이관하고, 국왕의 특별 사법 기관인 의금부(義禁府)로 개편한 후, 왕족의 범죄(犯罪)·대옥(大獄)·강상죄(綱常罪) 등 국사 범죄를 분리시켜 왕명의 직할에 두었다. 태종은 의금부를 통해 사법권을 장악하고, 종국적으로 사법적 처벌을 직접 관리함으로써 왕권 강화 수단을 마련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금부는 추국하는 일을 관장하는 기구로 공식화되었다.

또한 삼성추국은 나라에서 중죄인(重罪人)을 심문할 때 대간(臺諫)·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관원과 육조(六曹)의 관원이 합동으로 심문하는 것으로, 점차 육조(六曹)에서 형조(刑曹)만이 참여하게 되었다. 삼성추국은 의금부 창설 이후 형조와 사간원이 제외되고, 의정부(議政府)·의금부·사헌부가 삼성으로 재편되었다.

한편 중종대에 포도청(捕盜廳)이 창설되어 서울에서 발생한 일반 범죄에 대한 추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포도청은 유적(儒籍)에 이름이 등재된 자는 비록 중죄(重罪)의 정황(情況)이 포착되었더라도 추국을 하지 못하였다. 또한 의금부에서 이미 추국한 죄수는 포도청으로 내려 보내지 않아 두 기관의 사건 조사에 대한 성격을 구분하였다. 조선후기 포도청의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이 규정은 실제로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고, 두 기관의 추국에 있어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내용 및 변천

조선시대 범죄에 대한 처결은 증거와 죄인의 자백(自白: 自服)이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죄인 신문은 용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일종의 고문 취조라 할 수 있는 형문(刑問)을 사용하였다. 형문은 일차적으로 단순한 질문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평문(平問)이 진행되지만, 죄인이 자신의 죄를 실토하지 않을 경우 일종의 고문인 형신(刑訊)을 사용하였다.

추국(推鞫)에는 현직(現職)·전직대신(前職大臣)과 의금부 당상관 및 양사(兩司) 대간(臺諫)에서 진참(進參)하고 형방승지(刑房承旨)와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도 참석한다.

문사랑(問事郞)은 4명인데 의금부에서 4~6명의 후보자를 올려 1명을 선출하였다. 문사랑은 승지가 추안을 가져 오면 승전색(承傳色)으로 하여금 입계(入啓)하도록 하고, 사관(史官)이나 선전관(宣傳官)이 가지고 오면 사알(司謁)로 하여금 입계하였다.

추국 죄인에 대한 체포와 조사 및 형문은 한 사람의 대관의 계청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국청에서 합의한 후 임금의 허락을 받아 시행할 수 있었다. 추국죄수(推鞫罪囚)는 신문할 때와 감옥에 구금할 때 가쇄(枷鎖)와 수갑(杻)을 채워 도망을 방지하였다. 수갑은 죄수의 오른쪽 손만 채우는 것이 관례였으나 조선후기 양손에 수갑을 채우는 방법[兩杻法]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1729년(영조 5) 영조는 양축법을 죄수를 학대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왼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을 폐지하였다.

추국할 때 신장(訊杖)의 규격은 너비가 9푼, 두께가 4푼이고, 삼성추국(三省推鞫) 때의 신장은 너비가 8푼, 두께가 3푼으로 추국신장이 약간 크다. 조선전기 추국할 때 형신의 회수가 제한되지 않아 추국 과정에 죄인이 사망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에 1745년(영조 21) 영조는 추국할 때 형신(刑訊)은 하루에 한 차례로 규정하였고, 보다 엄중한 추국일 경우에도 2차례로 제한하여 죄인에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였다. 또한 1780년(정조 4)에는 추국 죄인에게 형을 적용할 때 자백한 죄수 및 목숨이 위태로운 자에 대해서 위관이 왕에게 보고하여 형 집행을 정지하도록 개정하였다.

한편 삼성추국의 죄상은 부모(父母)·조부모(祖父母)·시부모(媤父母)·남편·백숙부모(伯叔父母)·형과 누님 등을 살해, 노비가 주인을 죽이고 관노(官奴)가 관장(官長)을 살해, 고공(雇工)이 가장(家長)을 살해, 계모(繼母)를 간음, 백숙모(伯叔母)·고모(姑母)·자매(姉妹)·자부(子婦)를 간음, 노(奴)가 여상전(女上典)을 간음, 적모(嫡母)를 방매(放賣), 부모(父母)를 구타(毆打) 및 욕(辱), 아비의 시체를 화장(火葬)하는 등은 모두 의정부·의금부·사헌부의 관원이 합좌(合坐)하여 추국(推鞫)하였다

삼성추국은 왕이 시행을 명령하고 의정대신(議政大臣) 가운데 위관(委官)을 임명하여 추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삼성추국을 행하는 장소는 주로 의금부였고, 특별한 경우 빈청(賓廳)에서도 진행되었다. 참여 인원 및 절차는 일반 추국과 유사하지만 문사랑(問事郞) 2인이 추가되었다. 또한 추국신장은 너비가 8푼, 두께가 3푼으로 일반 추국에 사용한 신장보다는 약간 가벼웠다.

의의

조선시대 추국은 왕조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심리 과정이었다. 특히 추국은 범죄에 대한 명확한 사실에 도달하기 위해 다양한 절차와 규정이 마련되었고, 동시에 형정에 인도적인 절차를 가미시킨 심리(審理) 체계였다. 결국 조선의 통치는 법치(法治)와 함께 덕치(德治)를 겸비하는 법의식을 적절히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은대조례(銀臺條例)』
  • 『비국등록(備局謄錄)』
  • 車仁培, 『朝鮮時代 捕盜廳硏究』, 東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2008.
  • 韓國法制硏究院, 『大典會通硏究-刑典·工典編-』, 1996.
  • 이상식, 「義禁府考」, 『법사학연구』4, 1977.
  • 정순옥, 「조선전기 의금부 죄수의 삼복과 의금부 상복 시행 논란」, 『역사학연구』29, 2007.
  • 한상권, 「세종대 治盜論과 『대명률』」, 『역사와 현실』65, 2007.
  • 한우근, 「麗末鮮初 巡軍硏究 -麗初 巡檢制 起論하여 鮮初(義禁府成立까지 미침-」, 『진단학보』22,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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