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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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변가주서 |
한글표제 | 사변가주서 |
한자표제 | 事變假注書 |
상위어 |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 |
동의어 | 가주서(假注書) |
관련어 | 비변사(備邊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주서(注書), 참하관(參下官)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고종 |
집필자 | 한충희 |
관품 | 정칠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
조선후기에 승정원(承政院)에 소속된 정7품 관직.
개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로 인해 폭주하는 군사(軍事)와 국옥사(鞫獄事) 등을 기록하기 위해 임시 관직으로 설치되었다. 이후 정식 관직으로 정착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존속하면서 비변사와 국옥에 관한 문서를 전담하여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자료로 제공하고, 주서(注書)·가주서(假注書)와 함께 『승정원일기』를 기록하였다.
담당 직무
승정원 소속의 주서는 국왕이 친림하는 자리에 입시하여 사관(史官)과 함께 기록을 담당하였는데, 이것이 『승정원일기』로 기록되었다. 선조대 임진왜란을 치르는 과정에서 군사 업무나 칙사 관련 업무가 증대하면서 주서의 업무가 증가하자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를 차출해 그들에게 이와 관련된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사변가주서는 이후에도 군사 업무나 국문 관련 기록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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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사변가주서는 1480년(성종 11) 이전에 승정원의 정7품 주서 2명이 모두 출사 중이거나 결원일 때 임시로 주서에 임명하여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한 가주서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의 군기(軍機) 사무와 국안 문서를 맡아서 관리하고 처리하기 위하여 승정원에 정7품으로 1명을 두면서 정착되었다. 사변가주서는 처음에 설치될 때는 임시직이었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혁거되지 않고 그대로 존속되다가 1746년(영조 22)에 이르러 『속대전(續大典)』에 수록됨으로써 법제화되었다. 그 뒤 1894년(고종 31)에 갑오개혁이 일어나 관제를 근대식으로 개혁할 때, 승정원이 궁내부(宮內府) 소속의 승선원(承宣院)으로 개정되면서 주서와 함께 기주(記注)로 통합·개칭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전해종, 「승정원일기 해제」, 『승정원일기』, 국사편찬위원회, 1961.
- 한충희, 「조선초기 승정원연구」, 『한국사연구』 59, 1987.
- 한충희, 「조선초기 승정원주서 소고」, 『대구사학』 78,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