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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1569년(선조 2) 23세의 나이 때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德山)에 갔다. 1572년(선조 5)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1574년(선조 7) [[노수신( | + |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1569년(선조 2) 23세의 나이 때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德山)에 갔다. 1572년(선조 5)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1574년(선조 7)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 뒤 한 때 [[영숭전(永崇殿)]][[참봉(參奉)]]이 되었었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6년(선조 19)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고, 1587년(선조 20) 7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홍문관 [[교리(校理)]] 등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을 다녀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학봉(鶴峰)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선조 26) 10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고, 11월 [[지제교(知製敎)]]가 되었고, 윤11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으며, 12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 1월 이조 [[좌랑(佐郞)]]이 되고, 10월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하였다. 1595년(선조 28) 1월 이조 [[정랑(正郞)]]이 되고, 3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599년(선조 32) 3월 다시 홍문관 부응교가 되고, 4월 초에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가 4월 하순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5월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이때 부교리박이서(朴彛叙) · 이덕형(李德泂), 수찬유희분(柳希奮) 등과 대사헌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다. 그 해 6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10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 1601년(선조 34) 1월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가 9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으며, 12월 [[상의원(尙衣院)]][[정(正)]]이 되었다. 1602년(선조 35) 1월 1일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고, 1월 14일 홍문관 부응교, 2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겸 세자시강원 보덕, 윤2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이때 [[참찬관(參贊官)]]을 겸하였다. 그 해 3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9월 3일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9월 16일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그는 이 당시 [[유영경(柳永慶)]]의 [[소북(小北)]]에 속하여, 반대 세력을 탄핵하였다. 1603년(선조 36) 1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그 해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1604년(선조 37) 3월 예조 참의가 되고, 4월에 다시 이조 참의가 되었고, 12월 6일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12월 26일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었다. |
=='''광해군 시대 활동'''== | =='''광해군 시대 활동'''== |
2018년 1월 9일 (화) 22:5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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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이장 |
한글표제 | 박이장 |
한자표제 | 朴而章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학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광해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숙필(叔弼) |
호 | 용담(龍潭), 용주(龍洲), 호은(壺隱)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47년(명종 2) |
사망 | 1622년(광해군 14) |
본관 | 순천(順天) |
주거지 | 경상도 합천(陜川) |
증조부 | 박한하(朴漢何) |
조부 | 박식(朴埴) |
부 | 박양좌(朴良佐) |
모_외조 | 성산 배씨(星山裵氏): 배은(裵垠)의 딸 |
형제 | (형)박이문(朴而文) |
처_장인 | 충주 박씨(忠州朴氏): 박응복(朴應福)의 딸 |
자녀 | (딸)유성(柳惺)의 처 |
저술문집 | 『용담집(龍潭集)』, 『정서절요(程書節要)』, 『육경여해(六經蠡海)』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이장(朴而章) |
총론
[1547년(명종 2)~1622년(광해군 14) = 76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 학자. 병조 참판을 지냈다. 자는 숙필(叔弼)이고, 호는 용담(龍潭), 용주(龍洲), 호은(壺隱)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합천이다. 아버지는 박양좌(朴良佐)이며, 어머니 성산 배씨(星山裵氏)는 배은(裵垠)의 딸이다. 거주지는 합천(陜川)이다. 조식(曺植)과 노수신(盧守愼)의 문인(門人)이다.
선조 시대 활동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1569년(선조 2) 23세의 나이 때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德山)에 갔다. 1572년(선조 5)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1574년(선조 7)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 뒤 한 때 영숭전(永崇殿)참봉(參奉)이 되었었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6년(선조 19)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고, 1587년(선조 20) 7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홍문관 교리(校理) 등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을 다녀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학봉(鶴峰)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선조 26) 10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고, 11월 지제교(知製敎)가 되었고, 윤11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으며, 12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 1월 이조 좌랑(佐郞)이 되고, 10월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하였다. 1595년(선조 28) 1월 이조 정랑(正郞)이 되고, 3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599년(선조 32) 3월 다시 홍문관 부응교가 되고, 4월 초에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가 4월 하순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5월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이때 부교리박이서(朴彛叙) · 이덕형(李德泂), 수찬유희분(柳希奮) 등과 대사헌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다. 그 해 6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10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 1601년(선조 34) 1월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가 9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으며, 12월 상의원(尙衣院)정(正)이 되었다. 1602년(선조 35) 1월 1일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고, 1월 14일 홍문관 부응교, 2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겸 세자시강원 보덕, 윤2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이때 참찬관(參贊官)을 겸하였다. 그 해 3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9월 3일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9월 16일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그는 이 당시 유영경(柳永慶)의 소북(小北)에 속하여, 반대 세력을 탄핵하였다. 1603년(선조 36) 1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그 해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1604년(선조 37) 3월 예조 참의가 되고, 4월에 다시 이조 참의가 되었고, 12월 6일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12월 26일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2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는데, 이때 정인홍(鄭仁弘)을 논계하였다. 그 해 8월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1월 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1월 춘추관(春秋館)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2월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며, 12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11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削職)되었다. 그 뒤 성주(星州)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 배양에 힘썼다. 1622년(광해군 14)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76세이었다. 저서로는 『용담집(龍潭集)』, 『정서절요(程書節要)』, 『육경여해(六經蠡海)』가 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박이장의 성품에 대하여는 『선조실록』에 “영남 사람으로 몸가짐이 바르고 재주와 학문이 있어 당시 사류에게 촉망을 받았다라”고 하였다.[『선조실록』선조 34년 2월 27일]
제향과 후손
경상북도 성주(星州)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부인 충주 박씨(忠州朴氏)는 박응복(朴應福)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다. 1녀는 유성(柳惺)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용담집(龍潭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