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숭전(永崇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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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어진을 모시던 평양의 진전(眞殿).

개설

선왕의 신위를 모신 건물은 사묘(祠廟)라 하였고 어진을 모신 곳을 영전(影殿) 또는 진전이라 하였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왕이었던 만큼 각지에 영전을 세웠다. 송도 목청전(穆淸殿)·영흥 준원전(濬源殿)·전주 경기전(慶基殿)·경주 집경전(集慶殿)·평양 영숭전이 태조 어진을 모신 지방의 영전이었다. 한양의 영희전에는 세조·원종·숙종·영조와 함께 태조의 어진을 모시고 때마다 봉심(奉審)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다섯 곳의 태조 진전이 잘 경영되었으나 선조·인조 때의 전쟁으로 소실되고, 영흥의 준원전과 전주의 경기전만 남았다.

위치 및 용도

영숭전은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국의 여러 진전 가운데 평양에 있던 전각이다(『세종실록』 24년 6월 22일). 영숭전의 위치에 대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평양부 의리방(義理坊),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장락궁 옛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터는 후에 평양부의 감영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영숭전이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진전을 복원하지 못하였다. 태조의 어진이 이후의 계속되는 국난으로 인해 이리저리 옮겨 모셔지다가 평양의 진전이 그대로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변천 및 현황

1418년(태종 18)경, 태조의 어진을 모셔 두는 진전 5곳이 모두 마련되었다. 1412년(태종 12)에 평양의 어용전(御容殿)이라 하던 곳을 태조의 진전이라 고쳐 부르게 하면서 영숭전의 모체가 되었다(『태종실록』 12년 11월 15일). 전각명이 없던 것을 민망히 여긴 세종이 1442년(세종 24) 영숭전으로 부르게 하였다. 다음 해에 중건인지 보수인지 명확하지 않은 영숭전 공사를 시작했으나 백성의 곤궁함을 이유로 잠시 멈추었다. 1445년(세종 27)에 완공을 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세종실록』 27년 4월 21일).

영숭전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터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 어진은 평양의 한 장소에 묻어 두어 무사히 보존되었다(『선조실록』 26년 1월 15일). 그러나 영숭전을 복원하여 모시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1622년(광해군 14) 강화도에 봉선전(奉先殿)과 함께 영숭전을 중건하여 남별전(南別殿)이라 통칭하고 세조·태조의 어진을 각각 봉안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태조의 어진이 훼손되어 태묘 북쪽에 묻어 처리하였다. 숙종대에 경기전에 보존되어 있던 태조의 어진을 영희전에 모시면서 영숭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695년(숙종 21)에 영숭전의 옛터에 장녕전(長寧殿)을 세웠으나, 1721년(경종 1)에 다시 진전의 곁에 장녕전을 옮겨 세우고, 그 자리는 연여(輦輿)를 간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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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김지영, 「肅宗·英祖代 御眞圖寫와 奉安處所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27,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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