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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선조 1) 10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72년(선조 5)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그 해 9월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573년(선조 6) 2월초에 예조 참판이 되고, 일주일 만에 대사헌이 되었다가 같은 달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그 해 4월 중순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고, 4월 하순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10월에 대사간이 되었다가 12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574년(선조 7) 3월 [[부총관(副摠管)]]이 되고, 5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며, 7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1576년(선조 9) 9월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다. 수릉관(守陵官)으로 있다가 1578년(선조 11) 1월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윤2월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1568년(선조 1) 10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72년(선조 5)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그 해 9월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573년(선조 6) 2월초에 예조 참판이 되고, 일주일 만에 대사헌이 되었다가 같은 달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그 해 4월 중순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고, 4월 하순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10월에 대사간이 되었다가 12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574년(선조 7) 3월 [[부총관(副摠管)]]이 되고, 5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며, 7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1576년(선조 9) 9월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다. 수릉관(守陵官)으로 있다가 1578년(선조 11) 1월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윤2월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동·서 분당으로 한참 논쟁이 심할 때, 박근원은 동인(東人)의 중진으로 송응개(宋應漑)·허봉(許葑) 등과 함께 병조 [[판서(判書)]]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나중에 이이가 돌아오게 해줄 것을 누차 청하였으나 선조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2년 뒤인 1585년(선조 18) 6월 [[영의정(領議政)]][[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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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분당으로 한참 논쟁이 심할 때, 박근원은 동인(東人)의 중진으로 송응개(宋應漑)·허봉(許葑) 등과 함께 병조 [[판서(判書)]]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나중에 이이가 돌아오게 해줄 것을 누차 청하였으나 선조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2년 뒤인 1585년(선조 18) 6월 [[영의정(領議政)]][[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1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과 일화'''==

2018년 1월 9일 (화) 22:42 기준 최신판




총론

[1525년(중종 20)~1584년(선조 17) = 60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참판(參判)이다. 자는 일초(一初)이고, 호는 망일재(望日齋), 낙봉(駱峯)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박빈(朴蘋)이며,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한백(韓伯)의 딸이다. 첫째 부인 평양조씨(平壤趙氏)는 조원명(趙元命)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최륜(崔崙)의 딸인데, 후사가 없어서 동생 박신원(朴愼元)의 작은 아들 박증현(朴曾賢)을 양자로 삼았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1552년(명종 7)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봉교(奉敎)가 되었으나, 1554년(명종 9) 어버이의 병 때문에 사직하였다. 1555년(명종 10) 12월 예조 좌랑(佐郞)이 되고, 1557년(명종 12) 7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11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다. 1558년(명종 13) 7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으며, 10월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 1559년(명종 14) 2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고, 3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12월에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560년(명종 15) 4월에 다시 홍문관 부교리가 되고, 그 해 6월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10월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 <임백령(林百齡)의 시호(諡號) 사건>에 연루되어 파출(罷出)되었다. 1562년(명종 17) 1월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이 되고, 2월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으며, 7월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9월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이때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윤의중(尹毅中)과 함께 재앙이 생기는데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1563년(명종 18) 2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고, 6월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부호군(副護軍), 7월에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가, 12월에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564년(명종 19) 2월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고, 4월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566년(명종 21) 10월에 다시 호조 참의가 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 3월 승정원 우승지가 되고, 5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6월에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으로 있다가 곧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10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72년(선조 5)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그 해 9월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573년(선조 6) 2월초에 예조 참판이 되고, 일주일 만에 대사헌이 되었다가 같은 달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그 해 4월 중순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고, 4월 하순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10월에 대사간이 되었다가 12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574년(선조 7) 3월 부총관(副摠管)이 되고, 5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며, 7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1576년(선조 9) 9월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다. 수릉관(守陵官)으로 있다가 1578년(선조 11) 1월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윤2월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동·서 분당으로 한참 논쟁이 심할 때, 박근원은 동인(東人)의 중진으로 송응개(宋應漑)·허봉(許葑) 등과 함께 병조 판서(判書)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나중에 이이가 돌아오게 해줄 것을 누차 청하였으나 선조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2년 뒤인 1585년(선조 18) 6월 영의정(領議政)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1세였다.

성품과 일화

『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8년 12월 28일조와 명종 21년 윤10월 18일조에 박근원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박근원은 타고난 성품이 순후했으며, 성격이 겸손하고 근실하였으나, 아첨하고 영합하는 태도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