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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12년(중종7)~1584(선조17) = 73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에 활동하던 문신. 자는 수백(守伯), 호는 무위당(無違堂)· 무환당(無患堂)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서울 출신이다. 돈녕부(敦寧府)[[정(正)]]박세영(朴世榮)의 아들이고, 이황( | + | [1512년(중종7)~1584(선조17) = 73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에 활동하던 문신. 자는 수백(守伯), 호는 무위당(無違堂)· 무환당(無患堂)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서울 출신이다. 돈녕부(敦寧府)[[정(正)]]박세영(朴世榮)의 아들이고,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
=='''명종 시대 활동'''== | =='''명종 시대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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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시대 활동'''== | =='''선조 시대 활동'''== | ||
− | 1568년(선조1) 홍문관[[부제학(副提學)]]이 되었는데, 이때 [[차자(箚子)]]를 올려 조광조(趙光祖)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기를 간청하였다. 선조(宣祖)가 윤허하여, 조광조는[[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1570년(선조3)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고, 공조참판, 형조참판을 거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7)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으나, 함경도 백성들이 살 곳을 잃고 방황하자, 1575년 선조가 적임자인 관찰사를 얻지 못한 탓이라 생각해서, 이에 관찰사박대립을 [[체직(遞職)]]시키고 임금이 처음으로 직접 전주(銓注)를 맡아서 후임자를 선발하였다. 그 뒤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대사헌으로서 주장하는 의논이 공평하고 법을 집행하는 것이 엄격하였으므로, 사헌부의 기강이 바로잡혔다. 1579년(선조12)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 이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581년(선조14) 호조판서박대립이 병으로 사직하자, 선조가 이이( | + | 1568년(선조1) 홍문관[[부제학(副提學)]]이 되었는데, 이때 [[차자(箚子)]]를 올려 조광조(趙光祖)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기를 간청하였다. 선조(宣祖)가 윤허하여, 조광조는[[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1570년(선조3)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고, 공조참판, 형조참판을 거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7)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으나, 함경도 백성들이 살 곳을 잃고 방황하자, 1575년 선조가 적임자인 관찰사를 얻지 못한 탓이라 생각해서, 이에 관찰사박대립을 [[체직(遞職)]]시키고 임금이 처음으로 직접 전주(銓注)를 맡아서 후임자를 선발하였다. 그 뒤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대사헌으로서 주장하는 의논이 공평하고 법을 집행하는 것이 엄격하였으므로, 사헌부의 기강이 바로잡혔다. 1579년(선조12)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 이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581년(선조14) 호조판서박대립이 병으로 사직하자, 선조가 이이(李珥)를 발탁하여 그 후임으로 삼았다. 1581년(선조14) 돈녕부(敦寧府)[[판사(判事)]]를 거쳐서 의정부우찬성(右贊成)·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다. 1584년(선조17) 6월 8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 73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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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4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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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대립 |
한글표제 | 박대립 |
한자표제 | 朴大立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수백(守伯) |
호 | 무위당(無違堂), 무환당(無患堂)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12년(중종7) |
사망 | 1584년(선조17) 6월 8일 |
본관 | 함양(咸陽)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신혈리(神穴里) |
증조부 | 박신동(朴信童) |
조부 | 박중검(朴中儉) |
부 | 박세영(朴世榮) |
모_외조 | 김씨(金氏): 김한우(金漢佑)의 딸 |
형제 | (동생)박희립(朴希立) |
처_장인 | 우주황씨(紆州黃氏): 황헌(黃憲)의 딸 |
자녀 | (양자)박지술(朴知述) |
유명자손 | 박유공(朴由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대립(朴大立) |
총론
[1512년(중종7)~1584(선조17) = 73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에 활동하던 문신. 자는 수백(守伯), 호는 무위당(無違堂)· 무환당(無患堂)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서울 출신이다. 돈녕부(敦寧府)정(正)박세영(朴世榮)의 아들이고,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시대 활동
1540년(중종35)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성균관(成均館)에 보임되었다가 양주교수(楊州敎授)를 거쳐 봉상시(奉常寺)참봉(參奉)이 되었다. 1549년(명종4)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어,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 군기시(軍器寺)정(正)을 거쳐, 의정부(議政府)검상(檢詳)에 올랐다. 1560년(명종15) 사헌부집의(執義)에 임명되었고 병조(兵曹)참지(參知)를 거쳐 의정부사인(舍人)과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를 지냈다. 그가 의정부사인으로 있을 때 명종(明宗)의 처외삼촌 이량(李樑)이 왕후의 세력을 믿고 의정부의 자리로 들어오려고 하였는데, 박대립(朴大立)이 나서서 이를 적극 거절하니, 명종이 이량을 견제하려고 그를 특별히 승정원(承政院)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시켰다. 1566년(명종21)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567년(명종22)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1) 홍문관부제학(副提學)이 되었는데, 이때 차자(箚子)를 올려 조광조(趙光祖)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기를 간청하였다. 선조(宣祖)가 윤허하여, 조광조는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1570년(선조3)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고, 공조참판, 형조참판을 거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7)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으나, 함경도 백성들이 살 곳을 잃고 방황하자, 1575년 선조가 적임자인 관찰사를 얻지 못한 탓이라 생각해서, 이에 관찰사박대립을 체직(遞職)시키고 임금이 처음으로 직접 전주(銓注)를 맡아서 후임자를 선발하였다. 그 뒤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대사헌으로서 주장하는 의논이 공평하고 법을 집행하는 것이 엄격하였으므로, 사헌부의 기강이 바로잡혔다. 1579년(선조12)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 이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581년(선조14) 호조판서박대립이 병으로 사직하자, 선조가 이이(李珥)를 발탁하여 그 후임으로 삼았다. 1581년(선조14) 돈녕부(敦寧府)판사(判事)를 거쳐서 의정부우찬성(右贊成)·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다. 1584년(선조17) 6월 8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대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태어나면서 골상(骨相)이 범상하지 않았다. 기국(器局)이 장엄하고 중후하며, 사려(思慮)가 깊고 지조가 확고하였다. 가정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성실히 행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전후 여묘살이를 할 때 한 번도 집에서 자지 않았다. 아내의 병이 심할 때 한번 문병하였으나, 침실에 들어가지 않고 저녁에 여묘(廬墓)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범을 만났으나 겨우 화를 면하였다. 숙부가 병이 들자, 밤낮으로 약시중을 들었는데, 하루는 큰 추위에 밤새도록 벽에 기대어 있다가 수염이 벽에 얼어붙었다. 죽은 여동생과 홀로 된 형수의 어린 아이를 모두 데려다가 자기 소생과 똑같이 가르치고 길러서 시집보내고 장가들였다. 집에서는 평소에 엄정(嚴整)하여 부부가 서로 빈객(賓客)처럼 공경하고, 자제가 낯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항상 검소한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반찬을 갖춘 음식을 먹지 않고 해진 옷을 입고 터진 갓을 쓰고 다녔으며,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고 완호(玩好) 잡기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남의 초청(招請)을 사절하였으므로 집 앞에 거마(車馬)가 없었다. 그러나 친척과 친구가 찾아오면, 정성으로 대접하고 성의를 다하여 담소(談笑)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신혈리(神穴里)의 언덕에 있는데,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석담일기(石潭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계갑일록(癸甲日錄)』
- 『학봉전집(鶴峯全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