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년(鄭大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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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3년(연산군 9)∼1578년(선조 11) = 76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의정부 좌찬성(左贊成)과 이조 판서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자는 경로(景老)이고, 호는 사암(思庵)이다. 본관은 동래(東來)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문관(藝文館)대교(待敎)정전(鄭荃)이고, 어머니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이조 판서(判書)에 증직된 신극정(愼克正)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의정부 찬성(贊成)에 추증된 정전(鄭荃)이고, 친증조할아버지는 정윤운(鄭允耘)이며, 양증조할아버지는 정형운(鄭亨耘)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31년(중종 26)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방목(榜目)』] 1532년(중종 27) 문과(文科)별시(別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27년 2월 11일, 『방목』] 장원 급제였으므로 6품의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그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서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중종실록』중종 28년 1월 28일] 1535년(중종 30)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1537년(중종 32)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중종 30년 6월 1일, 중종 32년 11월 30일] 1538년(중종 33) 홍문관(弘文館)부교리(副校理)가 되었으며, 이후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고, 의정부 검상(檢詳)으로 전임되었다.[『중종실록』중종 33년 8월 12일, 『소재집(穌齋集)』 권10 「유명조선국고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지경연사정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故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鄭公神道碑銘)」 이하 「정대년신도비명」으로 약칭] 이어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거쳐서,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선공감(繕工監)정(正), 사재감(司宰監) 정, 사복시(司僕寺) 정 등을 역임하였다.[「정대년신도비명」]

1539년(중종 34)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34년 10월 11일] 그해 12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에서, “직제학은 경연청(經筵廳) 당하관의 장으로서 그 임무가 아주 중합니다. 그러므로 출신(出身)한 햇수와 인물의 어짊 여부를 따져서 의망(擬望)했었는데, 정대년(鄭大年)은 출신한 지 이제 겨우 8년 밖에 안 되어 너무 빠른 듯하니, 체직시키소서.”하는 의견에 따라 결국 체직되었다.[『중종실록』중종 34년 12월 21일, 중종 34년 12월 22일, 중종 34년 12월 25일] 1540년(중종 35)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홍문관 전한(典翰)을 거쳐서,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중종 35년 5월 21일, 중종 35년 11월 1일, 중종 35년 11월 18일] 이어 1541년(중종 36)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정대년신도비명」] 1542년(중종 37)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그해 12월 진하사(進賀使)에 임명되어 중국명나라에 다녀왔다.[『중종실록』중종 37년 3월 13일, 중종 37년 12월 28일] 1543년(중종 38)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이듬해인 1544년(중종 39)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중종실록』중종 38년 12월 27일, 중종 39년 3월 11일]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외임(外任)으로 나가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년 4월 10일] 1547년(명종 2) 형조 참의(參議)를 거쳐서, 1549년(명종 4) 병조 참의, 1551년(명종 6) 공조 참의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2년 4월 23일, 명종 4년 6월 21일, 명종 6년 6월 25일] 1552년(명종 7)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승진하였으며, 이후 부모님 봉양을 위하여 고을의 수령이 되기를 청원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7년 7월 3일, 명종 7년 6월 22일, 「정대년신도비명」] 1553년(명종 8)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고, 1555년(명종 10) 호조 참판(參判)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명종실록』명종 8년 7월 21일, 명종 10년 5월 15일, 명종 10년 7월 9일] 그해 윤11월 사간원에서는 정대년이 노비 쟁송과 관련 있다며 탄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그는 심문을 받은 후 그해 12월 대호군(大護軍)으로 좌천되었다.[『명종실록』명종 10년 윤11월 16일, 명종 10년 12월 3일] 이는 정대년이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문정대비(文貞大妃)의 동생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던 이감(李勘)을 견제하자 이에 이감이 사간원 대사간윤춘년(尹春年)에게 청탁하여 탄핵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1557년(명종 12)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서, 한성부우윤이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2년 3월 22일, 명종 12년 8월 14일] 1559년(명종 14)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재임하였는데, 그 고을에서 날마다 소를 도살하여 관청에 바친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 절반을 혁파한 후 “나의 뜻이 아니다.”고 하고는 끝까지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정대년신도비명」] 1561년(명종 16)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1562년(명종 17) 철원부사(鐵原府使)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6년 9월 3일, 「정대년신도비명」] 그런데 이때 보개산(寶蓋山)의 산승(山僧)이 백성들의 전답을 빼앗아 절에 소속시켰다. 심지어 문정대비의 허락도 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부당하다면서 허락해주지 않았다.[「정대년신도비명」] 1564년(명종 19)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1566년(명종 21) 상례(喪禮)를 마친 후 다시 대사헌을 맡았고, 1567년(명종 22) 형조 참판이 되었다.[『명종실록』명종 22년 2월 14일, 「정대년신도비명」]

1567년(선조 즉위년) 병조 참판으로 전임되었으며, 1568년(선조 1)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호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1년 12월 1일, 「정대년신도비명」] 1570년(선조 3) 이조 판서가 되었고, 1572년(선조 5)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3년 12월 1일, 선조 5년 4월 1일] 그러나 간관(諫官)이 사실과 다르게 그가 중종 대에 김안로(金安老)에게 빌붙었다며 탄핵하다가, 이후 그 말을 삭제하고서는 계속 논핵을 하자, 선조는 정대년이 취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윤허하였다. 이후 다시 우찬성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선조수정실록』선조 5년 6월 1일]

1575년(선조 8) 다시 우찬성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578년(선조 11) 10월 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6세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11년 7월 5일, 『선조수정실록』선조 8년 7월 1일, 선조 11년 10월 1일]

성품과 일화

정대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외모가 단정하였으며 가정생활은 검소하게 하였고 관직을 수행할 때는 성실하였다. 그는 정치에 대한 남다른 안목이 있어서 번거롭게 바쁜 사무를 잘 처리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1년 10월 1일]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나이 11세 되던 때에 부친을 여의고서 어머니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15세가 된 뒤로는 외숙(外叔)인 신거관(愼居寬)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외숙과의 나이 차이가 10세 이내였는데도 그를 마치 엄한 스승처럼 대하였다.「정대년신도비명」]

남과 더불어 교제할 때에는 온화하게 처신하였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강직하게 임하였으며, 가노(家奴)가 이웃 사람과 싸우다가 상해를 입힌 것을 보고서는 곡직(曲直)을 따지지도 않은 채 먼저 자기의 가노를 벌주었다. 얼속(孽屬)으로서 간혹 오랫동안 그를 모셔온 자가 색다른 음식을 그에게 바친 일이 있었으나 그는 물리치고 받지 않았으며, 비록 친구가 선물로 보내준 것들도 그럴 만한 명분이 없는 물건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재산 늘리는 데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간석지 따위의 전장(田庄)이 없었고 시정(市井)의 잡배들도 그의 집에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오직 외롭고 조용하게 살면서 정신을 편안하게 하였다.[「정대년신도비명」]

1552년(명종 7) 부모 봉양을 위하여 고을의 수령이 되기를 청원하여 양주(楊州)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재임하는 동안에 군적(軍籍)을 개정하였는데도 고을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에는 가뭄이 몹시 심하였으나 길에 굶어죽어 나뒹구는 시체가 없었다. 그 해 가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양주 고을 주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을 보내어 비석을 넘어뜨렸으나 뒤에 주민들이 다시 비석을 세웠다.[「정대년신도비명」]

또 1533년(중종 28) 도관산랑(都官散郞)이 되었을 때, 감옥에 수감된 죄인 중에서 인장(印章)을 위조한 죄를 지은 자가 있었는데, 그가 다시 다른 사람을 사건에 끌어들였다. 정대년은 이 사건이 무함(誣陷)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실정을 자세히 캐물어서 사실을 밝혀내면서, 무함을 당한 사람이 결국 풀려나게 되었다. 이후 이 사람은 길에서 정대년을 만날 때면, 번번이 절을 하고 울먹이면서 남들에게 말하기를, “공께서 신명(神明)처럼 밝혀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오래 전에 죽었을 것입니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정대년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고,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정대년신도비명」]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인홍(李仁弘)의 딸이다. 자녀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정휴복(鄭休復)은 개성부도사(開城府都事)를 지냈고, 차남 정선복(鄭善復)은 의영고(義盈庫)봉사(奉事)를 지냈으며, 3남 정인복(鄭仁復)은 홍천현감(洪川縣監)을 지냈다. 4남 정순복(鄭純復)은 정산현감(定山縣監)을 지냈고, 5남 정돈복(鄭敦復)은 무과에 급제하여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냈다. 장녀는 충의위(忠義衛)양사연(梁思衍)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돈녕부(敦寧府)봉사(奉事)송유의(宋惟毅)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조지서(造紙署)별제(別提)김각(金覺)의 처가 되었다. 측실(側室)에서 서출 1녀가 있는데, 현령(縣令)김벽(金壁)의 처가 되었다.[「정대년신도비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미기사(癸未記事)』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각잡기(東閣雜記)』
  • 『석담일기(石潭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죽창한화(竹窓閑話)』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추파집(秋坡集)』
  • 『미암집(眉巖集)』
  • 『소재집(穌齋集)』
  • 『이암유고(頤庵遺稿)』
  • 『동원집(東園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사류재집(四留齋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만취집(晩翠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낙전당집(樂全堂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도곡집(陶谷集)』
  • 『백주집(白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