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대부(沈大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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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6년(선조 19)∼1657년(효종 8) = 72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예조 좌랑(佐郞)과 부안현감(扶安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신숙(信叔)이고, 호는 가은(嘉隱) 또는 범재(泛齋)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심대(沈岱)이고, 어머니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낸 최홍한(崔弘僴)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낸 심의검(沈義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창녕현감(昌寧縣監)을 지낸 심광종(沈光宗)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13년(광해군 5) 증광시(增廣試)진사(進士) 1등으로 입격(入格)하였다.[『방목(榜目)』]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가 즉위한 후, 그 해 3월 심대부(沈大孚)는 선행(善行)으로 천거되어 사포서(司圃署)별제(別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미수기언(眉叟記言)』 권21 「범재심공묘갈명(泛齋沈公墓碣銘)」 이하 「심대부묘갈명」으로 약칭]

1630년(인조 8)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1632년(인조 10) 형조 좌랑이 되었다.[「심대부묘갈명」] 1633년(인조 11) 증광시 급제 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1634년(인조 12)에는 송화현감(松禾縣監)이 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1년 7월 25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1년 6월 14일, 『방목』, 「심대부묘갈명」] 이무렵 가도(椵島)에는 명(明)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이졸(吏卒)들이 군읍의 백성들을 괴롭히자 조약을 맺어 횡포를 금지하였다.[「심대부묘갈명」] 이어 1637년(인조 15)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을 거쳐, 홍문관 교리(敎理)에 제수되었다.[『인조실록』인조 15년 8월 4일, 인조 15년 8월 8일, 인조 15년 12월 2일] 1638년(인조 16)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된 후 신경원(申景瑗)과 윤방(尹昉) 등의 처벌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였다.[『인조실록』인조 16년 2월 2일, 인조 16년 3월 22일, 인조 16년 3월 24일]

이후 그는 1640년(인조 18)부터 1649년(인조 27) 인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과 홍문관 부교리(副敎理), 이조 좌랑, 이조 정랑(正郞),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집의(執義),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 홍문관 응교(應敎),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등을 역임하였다.[『인조실록』인조 18년 9월 15일, 인조 19년 2월 3일, 인조 19년 6월 12일, 인조 19년 12월 25일, 인조 20년 3월 3일, 인조 20년 8월 3일, 인조 20년 12월 27일, 인조 21년 4월 22일, 인조 21년 12월 17일, 인조 21년 12월 25일, 인조 27년 3월 7일]

효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 즉위 후 인조의 묘호(廟號)를 정할 때 심대부는 조(祖)로 의정(擬定)한 것이 적당하지 않음을 상차하였으나 효종은 윤허하지 않았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즉위년 5월 23일] 그리고 그 해 6월 심대부는 홍문관 집의에 제수되었다가, 7월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효종 즉위년 6월 19일, 효종 즉위년 7월 24일] 그런데 이때 심액(沈詻)이 상피(相避)를 어겼다는 논의가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심대부가 김상헌(金尙憲) 등의 이름을 거론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나라의 원로대신을 성명으로 부르는 것을 불가하다고 지적하였다.[『효종실록』효종 즉위년 8월 19일] 이로 인하여 심대부는 결국 파직되었다가, 이듬해인 1650년(효종 1)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를 반대한 것은 선왕을 비방한 것이라며 추죄(追罪)되어 회양(淮陽)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효종실록』효종 즉위년 8월 25일, 효종 1년 4월 3일, 효종 1년 4월 4일, 「심대부묘갈명」] 그러자 승정원과 사헌부 등에서 비방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며 적극 변호하였고, 이 덕분에 심대부는 석방될 수 있었다.[『효종실록』효종 1년 4월 4일, 효종 1년 4월 6일, 효종 1년 4월 9일, 효종 1년 4월 10일, 효종 1년 4월 16일] 그러나 이후 효종은 심대부를 다시 조정으로 부르지 않았는데, 홍무적(洪茂績)과 홍우원(洪宇遠), 민정중(閔鼎重), 심광수(沈光洙), 조경(趙絅) 등이 그의 등용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으나 효종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효종실록』효종 1년 11월 25일, 효종 2년 10월 7일, 효종 3년 1월 21일, 효종 3년 12월 2일, 효종 5년 6월 10일, 효종 8년 7월 20일]

이런 가운데 심대부는 1656년(효종 7) 선공(先公)의 묘를 이장하였다. 그러면서 석 달 동안 시마복(緦麻服)을 입고, 거처(居處)와 곡읍(哭泣), 음식(飮食)을 모두 초상(初喪)때처럼 하였는데, 이때 병을 얻어 이듬해인 1657년(효종 8) 10월 28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심대부묘갈명」] 이후 허목(許穆)과 김수항(金壽恒), 이응시(李應蓍) 등이 그의 사면을 적극 주장하였고, 이에 효종은 그해 11월 그를 서용하였다.[『효종실록』효종 8년 11월 3일, 효종 8년 11월 6일, 효종 8년 11월 9일, 효종 8년 11월 20일]

성품과 일화

심대부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젊어서 군자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옛 성현의 학문을 두루 익혔으며, 집에서는 어버이를 섬기고 형제간에 처신함이 모두 덕선(德善)의 모범이 되었다. 남들과 충애(忠愛)하고 독후(篤厚)하여 착한 일을 보면 권하고, 허물을 알면 고치도록 하였다. 또한 스스로 엄하게 지켜 한 번도 자신을 굽혀서 남을 쫓지 않았다.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경학(經學)을 중히 여겼다.[「심대부묘갈명」]

1623년(인조 1) 5월 사간원은 인조에게 심대부의 큰형인 심대복(沈大復)이 자신의 어머니를 가두고 욕보이게 한 죄를 물어 불효한 자식들의 경계가 되도록 할 것을 청하였고, 그 해 6월 심대복은 북변(北邊)에 유배된 일이 있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년 5월 7일, 「심대부묘갈명」] 이때 심대복은 곤장을 맞아 상처에 구더기가 생겼는데, 아우인 심대부가 이를 입으로 빨아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심대부묘갈명」] 심대부가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을 당시 조정에서는 그가 어머니에게 불효한 형과 사나운 형수 사이에서 어머니를 섬기고 형을 섬기되 도리를 잃지 않았다고 하여, 어려운 일을 해 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인조실록』인조 15년 8월 4일]

후손 및 묘소

심대부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있는데, 선친의 묘도 함께 있다. 허목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심대부는 부인 둘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 서하 임씨(西河任氏)는 임수(任琇)의 딸로, 자식이 없었다. 둘째 부인 광주 노씨(光州盧氏)는 노도형(盧道亨)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다. 1남 심창징(沈昌徵)은 어려서 지성(至性)과 선행(善行)이 있었으나 요절하였으며, 1녀는 도사(都事)권상규(權尙規)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에게서 1남 4녀를 두었는데, 1남은 심창윤(沈昌潤)이다. 1녀는 이진겸(李震謙)에게 시집갔고, 2녀는 군수(郡守)정하(鄭何)에게 출가하였으며, 3녀는 찰방(察訪)남두징(南斗徵)에게 시집갔고, 4녀는 목사(牧使)이관(李慣)에게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송자대전(宋子大全)』
  • 『포저집(浦渚集)』